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질문
막 13:1-8, 창조절 열한 번째 주일, 2015년 11월15일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3 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 4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7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서울 송파구에 있는 롯데 월드 타워가 내년 말에 완공되면 555미터로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건물이 된다고 합니다. OECD 국가 중에서는 가장 높은 건물입니다. 63빌딩만 봐도 너무 높아 현기증이 느껴지는데 이것보다 두배 이상 높은 롯데 월드 타워는 어떨지 상상이 안 갑니다. 앞으로 서울을 찾는 관광객들과 수학여행 온 학생들의 필수 방문지가 되겠지요. 사람들은 그 웅장함에 놀라기도 하고, 재미있어 하기도 할 겁니다. 이집트 피라미드나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는 고대로부터 거대 건축물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종교적 권위를 강화해보려고 했습니다.
묵시적 대파국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도 유명한 건축물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그것입니다. 최초의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 왕이 지었습니다. 그 성전은 기원전 587년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파괴되었습니다. 기원전 536년 스룹바벨에 의해서 성전이 재건축되었습니다. 그것은 기원전 63-62년에 로마에 의해서 파괴되었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던 헤롯 대왕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기원전 20년부터 예루살렘에 거대한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헤롯 성전이 바로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입니다. 이 헤롯 성전도 70년에 로마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파괴되어서 지금은 성전에 딸린 성벽만 남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성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릅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실 때마다 성전에 들르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성지였고, 성지의 중심은 성전이었기 때문에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당연히 예루살렘 성전에 들르신 겁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막 13:1절에 보면 예수님이 성전에 들렀다가 나오는 중에 제자 하나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제자들만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은 모두 이 헤롯 성전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상 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2절입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이 짤막한 대화가 있은 뒤에 제자들은 성전을 마주한 감람산에 올라갔을 때 예수님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어날 것이며, 이런 일이 일어날 때 무슨 징조가 있습니까?’(4절).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 파괴가 곧 세상의 마지막이며,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만합니다. 당시 헤롯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건축물이었습니다. 세상 종말이 오지 않는 한 그것이 파괴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의 이런 생각을 묵시사상이라고 합니다.
묵시사상은 기원전 587년 바벨론 제국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에 기인합니다. 하나님의 도성이었던 예루살렘 전체가 초토화되었습니다. 당연히 솔로몬 성전도 파괴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왕족과 귀족들은 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 바벨론 포로 사건으로 인해서 기존의 모든 세계관과 가치관이 허물어졌습니다. 하나님 신앙까지 흔들릴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는 바벨론에 의해서 파멸 당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바벨론의 신보다 떨어진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을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한 전능의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왜 하나님의 백성과 의로운 사람들, 그리고 죄가 없는 사람들이 고난과 재난을 당하는지에 대해서 아주 진지하게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답을 찾는 과정에서 묵시사상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는 세상과 인간 운명에 대한 두 가지 통찰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 인간이 죽은 다음에 저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 이전까지는 저 세상에 대한 생각 없이 살아있는 동안에 행복하게 사는 것을 최선으로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의한 참혹한 사건을 경험하면서 이제 무죄한 이들의 억울한 죽음이 저 세상에서 보상받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2) 악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결국 파멸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악의 힘이 너무 강해서 자신들은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습니다. 메시야가 와야만 이 세상의 기존 질서가 해체되고 악이 제거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새로운 세상이 옵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묵시사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눈에 이상하게 비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세상을 아주 정확하게 뚫어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크고 작은 묵시적 대파국은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지난 금요일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테러로 인해서 120 여명이 죽고 더 많은 이들이 중상을 입은 사건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구와 우주의 대파국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태양계를 떠돌아다니는 혜성이 지구와 충돌할 수도 있습니다. 지름 1km 혜성과 충돌하면 지구의 용암이 분출되고 화산재로 뒤덮이기 때문에 결국 모든 생명체는 멸종하게 될 것입니다. 대빙하기는 지구에서 반드시 일어납니다. 지구의 적도 부근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은 다 얼음으로 뒤덮일 겁니다. 인간은 거기서 살아남기 힘듭니다. 이런 경우를 겨우 모면한다고 해도 앞으로 45억년 후에는 태양의 죽음과 함께 지구도 마지막을 맞을 겁니다.
이런 파멸을 피해보려고 우주 물리학자들은 지구와 닮은 행성을 찾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NASA는 39광년 거리에 지구와 비슷한 행성을 발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런 행성에서 먼 미래의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낮의 기온이 3백도이고 밤의 기온이 영하 2백도라고 한다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설령 생태 환경이 지구와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거기까지 이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초속 30만km의 속도로 날아가는 우주선을 타도 39년이 걸리는 거리를 인간이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도대체 우주 가운데서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한 지구는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그 지구에서 문명을 이루고 사는 인간은 누구이며, 그들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너무 아득한 질문이라서 일상에 묶여 살아가는 우리는 이런 것을 현실로 느끼기 힘들고, 또 느끼다보면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엄정한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걸 외면한다는 것은 삶의 가장 깊은 토대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했으며, 또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는 성경 말씀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사실이 더더욱 중요합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다는 묵시적 대파국은 개인의 실존적인 삶에서도 분명하게 일어납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삶을 헤롯 성전이라고 가정해보십시오. 겉으로 볼 때 화려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일일이 제가 열거하지 않더라고 더 크고 화려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게 우리 인생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분들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머지않아 모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 상태로 떨어집니다. 때가 오면 죽음이라는 묵시적 대파국을 맞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이런 실체적 진실을 외면하면서 사는데 아주 익숙해졌습니다. 지난 주간에 수능시험을 친 대구샘터교회 어느 여학생이 두 주일 전에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분이 (아마 학교 선생님이라고 추정되는데) ‘너의 인생 목표가 뭐니?’ 하고 묻기에 ‘죽음이요.’라고 대답했더니 뜨악해 하더라 하면서, 저의 동의를 구하는 거였습니다. 그 학생의 말이 맞습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우리는 모두 묵시적 대파국으로 묘사될 수 있는 죽음을 목표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미리 내다본다는 것은 허무주의나 비관주의, 또는 거꾸로 쾌락주의에 빠져서 살자는 게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묵시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한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다 망해버릴 거니까 나 몰라라 하자거나, 거꾸로 거기에 탐닉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 이 세상에서의 삶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무상하고 지나가고 뿌리 채 흔들린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정확하고 냉정하게 뚫어보는 사람은 일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2) 삶을 유일회적인 기회로 알고 소중하게 살려고 최선을 다 합니다. 삶을 소비하지 않고 창조적으로 누리게 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돈 버는 걸 목적으로 하지 않고 삶 자체를 누리며 사는 걸 목적으로 하는 겁니다. 지금 예배를 함께 드리는 우리가 오늘을 끝으로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한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오늘 우리가 어떻게 지낼까요? 공연한 것으로 다투겠습니까? 한국교회 신자들이 서로 싸우는 일이 많다는 것은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기독교 영성에서 거리가 멀다는 의미입니다.
성전 파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언제 이런 일이 있겠냐?’ 한 제자들의 질문, 즉 하나님 나라가 언제 도래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묵시적 대파국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세상의 마지막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8절을 읽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오늘 설교 본문에 이어지는 막 13:9-13절에는 묵시적 대파국의 시절에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유대교 산헤드린에 잡혀가고, 재판을 받으며, 매질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형제나 가족에게서도 배신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여기서 묘사된 일들은 기원후 70년 유대전쟁이 끝난 뒤에 거의 사실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만이 아니라 로마 황제들로부터도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기 전 묵시적 대파국의 시대에 일어날 사건들입니다.
이것을 유대교와 로마로부터 순교에 가까운 박해를 받은 초기 기독교만의 문제로 간주하면 곤란합니다. 모양은 다르겠지만 박해는 기독교인들에게 운명입니다. 보십시오.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이 입으로 들어가는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주장하면 동의를 얻기기 어렵습니다. 정치인들이 입만 열었다 하면 경제를 살린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정의로운 질서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겁니다. 저는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는 정치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좀 덜 먹고 덜 쓰더라도 좀더 정의로운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 천박한 자본주의에 오롯이 대항한 적이 있을까요? 없으니 박해받는 일도 없지요. 기껏해야 사립학교법 개정이나 성소수자 인권, 양심적 대체복무 제도를 반대하다가 생각 있는 사람들에게 욕을 먹을 뿐입니다. 현실안주나 기득권 지키기에만 열을 올렸습니다.
견딤의 영성
예수님은 고난을 말씀하시면서 막 13:13b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식의 단순한 덕담 차원에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는 기독교인의 참된 실존이 놓여 있습니다. ‘견딘다.’는 말에는 고수한다거나 지킨다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 신앙을 지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요? 끝까지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한 순간의 열광적인 경험에 머무는 게 아니라 묵시적 대파국과 고난의 삶을 실존적으로 끝까지 버텨내는 겁니다. 그런 이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은 2015년 추수감사절입니다. 먹을거리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모두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고 함께 마시고 먹는 축제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에게 즐거운 날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추수감사절은 두려운 날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지구가 더 이상 먹을거리를 생산하지 못하는 묵시적 대파국의 순간이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더 이상 먹고 마시지 못하는 죽음의 순간이 반드시 옵니다. 이게 명백한 사실이라면 추수감사절은 오늘의 한끼 식사가 마지막일 수 있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돌아가는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유월절 만찬을 대하는 심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삶을 서로 공유하고 연대하고 누리는 이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묵시적 대파국과 같은 세상에서도 예수 신앙을 지켜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보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질문’이라는 오늘 설교 제목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성전 파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느냐?’ 하고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제자들이 출가를 감행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초창기부터 그들의 영혼을 불살랐던 주제였습니다. 우리도 역시 그들과 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최대 관심사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곧 생명의 완성이니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현실 세상에서 그 하나님 나라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대신 묵시적 대파국의 흔적들만 보입니다. 그런 일들이 다행하게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삶이 겉으로는 밝은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어둡습니다. 블랙홀과 같습니다. 비밀 가득한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바로 앞에 일어날지를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더구나 완전한 어둠인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삶을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적으로 버텨내어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요?
저는 여러분이 만족할만한 뾰족한 방법을 제시할 자신이 없습니다. 저 역시 이 묵시적 운명을 버텨내야 할 한 사람에 불과하지 모든 걸 다 성취해낸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선언적으로 선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묵시적 대파국을 경험하시고 부활 승리를 하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니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을 못견뎌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오늘의 삶 한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와 함께, 예수를 통해서, 예수 안에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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