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말씀의 성취
눅 4:14~21, 주현 후 셋째 주일, 2022년 1월23일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은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부터 공적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회당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옵니다. 눅 4:14~15절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후에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의 여러 회당을 돌면서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16절 이하에 예수님이 고향 마을 나사렛에 들어간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고향에서 안식일을 맞아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나오듯이 회당에 갔고, 거기에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읽었습니다. 양피지에 기록된 성경이겠지요. 읽은 내용이 18절에 나옵니다. 이사야 61:1, 2절과 거의 비슷합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이 그 본문을 어떻게 해설할지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설교의 시작은 21절에 나옵니다.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당시로부터 500년 전에 선포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이 지금 회당에 모인 그들에게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발언이 옳을까요? 이 발언을 현장에서 들은 나사렛 사람들은 은혜를 받았을까요? 그 장면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보십시오. 나사렛은 별로 크지 않은 마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라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사람이나 선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요 1:46) 당시의 풍문을 전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볼 때 얼마 전까지 형 동생 하면서 지내던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오더니 회당에서 설교한다는 겁니다. 눅 4:22절에 따르면 동네 사람들은 예수를 가리켜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고 수군거렸습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사렛 사람들은 화를 내고 급기야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보면, 동네 사람들은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거부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자신들의 운명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말씀이나 사건을 외면하는 일들은 당시 나사렛 회당에 모였던 그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종종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이미 여기서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신 사 61:1, 2절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재건을 꿈꾸다가 실의에 떨어진 예루살렘 주민에게 선포된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소명을 우선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아름다운 소식’은 곧 ‘복음’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다른 데서 도움의 손길을 기대할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하나님만을 희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과 자신의 운명이 완전히 달라지기를 희망하는 겁니다. 이들과 달리 오늘 우리는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지 못합니다. 다른 온갖 것에 희망을 겁니다. 잘만하면 벼락부자가 될지 모른다는 야심도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행복한 삶의 설계도가 우리 영혼을 매혹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와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넉넉하게 사는 오늘 우리가 역설적이게도 불행한 사람일지 모릅니다.
이사야는 가난한 자를 구체적으로 세 부류로 열거합니다. 마음이 상한 자와 포로된 자와 갇힌 자입니다. 이를 인용한 눅 4:18절에는 포로 된 자와 눈먼 자와 눌린 자로 나옵니다. 구약을 히브리 원전에서 인용하느냐, 70인역에서 인용하느냐에 따라서 이런 차이가 벌어집니다. 전체적으로는 삶에 지친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얼마 전까지 바벨론에서 디아스포라 소수민족으로 힘들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억압받았습니다. 갇힌 신세였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지 못했으니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나 형편이 좋아질 기색이 없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에게서 소명으로 받은 말씀을 그들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내용을 압축하여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것(눅 4:19)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은혜의 해’는 안식일과 안식년에 기초한 희년을 가리킵니다. 희년에는 가난으로 인해서 벌어졌던 모든 왜곡된 억압 구조가 해체되어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팔렸던 땅도 제 주인에게 돌아가고, 종으로 팔렸던 사람도 해방됩니다. 50년만에 돌아오는 희년은 인간 해방의 해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한 인간 해방이 나사렛 회당에 모인 사람 가운데서 성취되었다고 말한 겁니다. 그의 말에 설득력이 있었으면 회중들이 ‘아멘!’으로 화답했을 겁니다. 그런데 앞에서 설명한 대로 그 회중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회중들이 어리석은 겁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발언이 잘못된 겁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 해방이 실제로 실현되었나요? 그게 아니라면 그의 발언은 대중을 부화뇌동하는 선동이었나요? 예수님은 무엇을 근거로 인간 해방에 관한 하나님 말씀이 그곳에서 이미 성취되었다고 말한 걸까요? 이걸 사람들에게 설명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사이비라는 말을 들어도 됩니다.
예수의 공생애
예수님은 공생애 전 과정을 통해서 오늘 인용한 이사야 선지자의 신탁을 기준으로 활동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눅 4:31절 이하에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는 이야기와 온갖 병자를 고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병자와 장애인을 고치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공생애 과정을 설명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항목입니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 말씀의 성취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과 함께했습니다. 마 5장에 나오는 ‘팔복’은 유명합니다. 비슷한 내용이 누가복음 6:20절 이하에도 나옵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어서 주린 자와 미움 당하는 자와 욕먹는 자도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부자에게는 화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이런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않을 겁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이런 공생애 활동이 가리키는 인간 해방의 능력을 예수님의 출생 전승과 연결합니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예수를 임신한 뒤에 곧 여섯 달 먼저 세례 요한을 임신한 친족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낳을 아이를 “내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를 듣고 마리아는 그 유명한 ‘마리아 찬가’를 노래합니다. 그 찬가의 핵심은 태어날 아이가 교만한 자를 흩고,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칠 것이며, 반대로 비천한 자를 높이고, 주린 자를 배를 불릴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과 출생 전승에 나오는 마리아 찬가와 오늘 본문에서 인용한 사 61장의 내용이 일맥상통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주의 은혜의 해’인 희년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이런 선포를 사람들은 좋아할까요? 개인에 따라서 다르겠으나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실제로 가난해서 먹고 살려다가 떠안은 빚을 일괄 탕감해주자고 어떤 정치인이 주장했다고 합시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고 반대할 겁니다. 부자 나라가 가난한 나라에 빌려주었던 차관(借款, credit)을 탕감해주자고 주장하는 정치인은 부자 나라에서 배척될 것입니다. 이왕 정치 문제가 나왔으니 한 가지만 더 예를 들겠습니다. 시골에 사는 이들에게 매월 30만 원씩 ‘생태 지킴이’ 지원이라는 명분으로 보조금을 주자는 의견이 최근 어느 운동단체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시골에서는 자녀 교육 문제도 어렵고 의료 문제도 불편합니다.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으니 요즘처럼 추운 계절에는 연료비도 도시보다 더 많이 듭니다. 월 30만 원은 그분들이 인간답게 사는 데에 필요한 돈입니다. 희년 정신을 담는 이런 정책을 대한민국 국민이 용납할까요? 쉽지 않을 겁니다. 대다수 도시에 사는 분들은 자기들이 손해 본다고 생각할 겁니다. 춥고 배고프면 이를 악물고 노력할 것이지 왜 공짜 밥을 먹으려고 하느냐, 하는 생각이 강합니다. 그들이 경험한 세상은 그렇게 기득권 중심의 현실 유지(status quo)에 기울어져서 사람이 착한지 아닌지를 불문하고 생각을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사야가 선포한 하나님 말씀이 지금 여기서 성취되었다는 예수님의 발언은 현실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걸 공감했다면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의 발언과 삶에 실질적인 능력이 있었다면 그가 십자가에 처형당했을 리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을 묘사하면서 함께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입을 통해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이렇게 전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 23:39) 오늘도 우리는 이런 말을 종종 듣습니다. 예수 믿으면 밥이 나와 떡이 나와, 이렇게 바쁜 인생살이에서 예배는 뭐하러 드리는 거야, 예수 믿는 자들이 믿지 않는 자들보다 더 행복하다는 증거가 있으면 내놓으라고 닦달합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만이 아니라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이런 생각을 감추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직접 대답하기 전에 그들이 행복한 삶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실제로 그런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듯이 고급스러운 삶의 조건들은 우리를 행복하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첨단 스마트 냉장고를 들여놓으면 처음 몇 달간만 기쁠 뿐이지 시간이 지나면 색 바랜 싸구려 그림책이 되고 맙니다. 월세살이하는 우리 교회가 만약 200평 정도 되는 아담한 교회당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당분간은 즐겁습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면 그 즐거움도 흐지부지됩니다. 고급스러운 교회당만으로 행복한 신앙생활은 불가능합니다. 성형수술로 어느 정도 미모를 얻어냈다고 해도, 잠깐입니다. 오히려 미모에 더 매달리게 할 뿐입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요? 세상이 모범 청사진으로 내미는 삶이 실제로는 별 것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먼저 뚫어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의 가르침은 공염불이 되고 맙니다. 아니면 세상의 욕망을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는 포장지일 뿐입니다.
이사야가 선포한 인간 해방이라는 하나님 말씀이 오늘 여기서 성취되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이것이 종말론적인 차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한 하나님 나라도 종말론적입니다. 예수님은 현재 벌어지는 인생살이의 구체적인 문제를 직접 해결해주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시간인 종말로 열려 있다는 사실을 뚫어보았고, 이를 열정적으로 선포하고, 그런 삶의 방향을 제시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설교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눅 4:1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마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대답하셨습니다. 마귀에게 절하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요구를 받고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서 초능력을 보이라는 요구를 받고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치인이 아닙니다. 사업가도 아니고 도덕군자도 아닙니다. 그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선포한 선지자이고, 묵시적인 인자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이며, 앞으로 종말에 생명 완성을 위해서 다시 오실 분이십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그가 인간 해방과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 말씀의 성취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경험
여기서 관건은 예수님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리얼리티로 경험하고 선포한 그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어떻게 실감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하는데 자신은 그런 경험이 없어서 답답하게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손으로 만질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보이는 것만이 실재라고 생각하지 않으실 겁니다. 『보이는 세상은 실제가 아니다』(카를로 로벨리, Reality is not what it seems)에서 보듯이 물리학도 보이지 않는 실재를 말하고 있으니 하물며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야 오죽하겠습니까. 비유적으로 일상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가난한 부부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짜증 날 만한 일들이 그들에게서 많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부부이기에 그들은 그 어떤 부부보다 행복합니다. 그 사랑은 보이지 않으나 그 부부를 행복하게 하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저의 아내는 피곤하면 남편에게 저녁밥 알아서 차려 먹으라고 종종 말하는데, 딸에게는 피곤한 게 없는 듯한 기세입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딸이 말려도 시중을 듭니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을 공급받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를, 그 다스림을, 그 능력을 언제 느낍니까? 각각 다르겠으나 그 핵심은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죄와 죽음이 우리를 억압하는 악한 세력의 본질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포로로 삼고, 우리를 눈멀게 하고, 우리를 억압하고, 우리의 마음에 상처를 냅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욕망이 우리의 삶의 파괴합니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일용할 양식만으로 삶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 일상에서 벌어지는 대부분 문제는 별로 심각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 경험이 주어지면 삶이 전혀 다르게 보일 겁니다. 햇살과 달빛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겠지요. 교회 공동체도 예배를 예배답게 드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게 영적으로 일용할 양식인데, 만족할 수 있다면 행복한 교인이 될 것입니다. 그럴 때 교우들이 사랑스럽고 예쁘게 보이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참된 코이노니아가 가능하겠지요.
말이 그렇지 어떻게 일용할 양식만으로 행복할 수 있느냐고 묻고 싶으신가요? 여러분이 만족할만한 대답은 제가 드릴 수 없습니다. 개인에 따라서 일용할 양식의 기준이 다르기도 하고, 저 자신이 일용할 양식만으로 만족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게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로도 행복할 수 있는 바른길이고, 더구나 우리 주 예수님이 가르쳐준 기도의 내용이기에 설교자로서 그쪽을 향해서 가보시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쉽지 않겠지만 저도 그런 길을 가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평생 먹을 거를 준비해야 한다는 세상의 요구가 거세지만 그럴수록 정신 차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제시하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기도대로 사는 게 왠지 불안하여 많은 걸 끌어안고 있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알 겁니다.
삶이 불안한 분들에게 다시 다음의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한 하나님 말씀은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운명이 곧 가난한 자에게 전파될 복음이며, 희년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를 통해서 포로 된 자가 자유를 얻고, 눈먼 자가 보게 되고, 눌린 자가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되었습니다. 칠흑같이 어둡고 비바람 치는 숲속에서 길을 잃은 이들의 눈에 들어온 불빛처럼 말입니다. 그 빛을 향해서 한걸음이라도 가까이 가고 싶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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