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
요일 4:7~21, 부활절 다섯째 주일, 2021년 5월2일
오늘 설교를 위한 성경 본문인 요일 4:7~21절은 사랑을 주제로 하는 말씀입니다. 이 본문은 사랑 예찬으로 잘 알려진 바울의 고린도전서 13장 못지않을 정도로 의미심장합니다. 그 내용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말씀은 “친구와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며,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라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처럼 너무나 당연해서 영혼의 울림이 없습니다. 이런 말씀 앞에서 기독교인들은 한편으로 형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고, 다른 한편으로 형제 사랑을 적당하게 흉내 내면서 만족해합니다. 기독교인의 모습이 세상에서 코믹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풍자적으로 말하면, 조폭들이 “착하게 살자!”라는 글자를 문신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 & 사랑
오늘 설교 본문은 사랑 실천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정확하게 아는 데에 초점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를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본문이 시작하는 7절과 8절을 보십시오. 이 내용이 전체 본문의 토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이 문장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여섯 번 나옵니다. 이후에도 이 단어가 명사형과 동사형으로 수없이 반복됩니다. 사랑을 의미하는 헬라어는 대략 세 가지입니다. 신적인 차원의 아가페, 우정을 기본으로 하는 필리아, 연인들이나 예술가들에게서 발견되는 에로스가 그것입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사랑을 그렇게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각각의 특징이 서로 겹치기도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모두 아가페입니다. 고전 13장에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도 아가페입니다. 요한은 여기서 매우 담대한 표현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16절에도 똑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사랑은 주로 낭만적인 감정이나 윤리적인 의지 정도로 취급됩니다. 어떤 사람을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를 위한 좋은 행동을 사랑이라고 보는 겁니다. 드라마나 소설의 영향인지 모르겠으나 요즘 젊은 분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합니다. 딸이 아빠에게, 아빠나 엄마가 딸과 아들에게 “사랑해.”라고 말합니다. 젊은 부부나 연인들끼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더 자주 하는 듯합니다. 서로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이런 표현은 나이 든 사람들도 배우는 게 좋겠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이 말하는 사랑은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요한의 표현을 잘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은 사랑입니다.”라고 표현했지 “사랑이 곧 하나님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랑 자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능력으로 자기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정의와 심판으로 자기를 나타내기도 하십니다.
제 생각에 요한이 말하는 아가페는 우리말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생명이라고 번역하는 게 개념적으로 더 정확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사랑을 말하다가 갑자기 말을 돌려서 독생자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이 문장에서 핵심은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는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지금 하나님의 사랑 자체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생명을 말하는 겁니다. 그 생명을 우리가 실감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한 겁니다.
요한은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10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려고 아들을 화목 제물로 보내셨다고 말입니다. 속죄가 곧 생명을 얻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맞는 말일까요? 속죄라는 말은 우리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인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를 우화 방식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아프리카 초원에서 동물들의 달리기 시합이 열렸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입니다. 사자, 코끼리, 늑대, 원숭이, 낙타, 토끼, 거북이 등등, 많은 동물이 참가했습니다. 거리는 5㎞입니다. 출발 신호가 울리면 출발해야 하고, 다시 신호가 울리면 그 자리에 멈춰야 합니다. 출발 신호와 함께 모두 열심히 달렸습니다. 그 시간 안에 달린 거리에 차이가 났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동물이 1등이라고 판정했습니다. 여기서 달리기 규칙은 얼마나 빨리 달리느냐가 아니라 자기 능력만큼 최선을 다했느냐로 판정되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모든 동물이 미리 알았다면 1등에 대한 과도한 욕심 없이, 그리고 자기의 형편없는 달리기 능력에 대한 부담감 없이 행복하게 달리기를 했을 겁니다.
이와 비슷한 의미의 비유를 예수님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 20:1~16)입니다. 포도원 수확기에 포도원 주인은 일용직 노동자들과 계약을 맺고 일을 시켰습니다. 아침 7시부터 일한 노동자가 있고, 9시부터 일한 노동자가 있었고, 오후 5시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노동자도 있었습니다. 하루 일이 끝났습니다.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은 불안했겠지요. 그런데 그는 당시 일당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10시간 일한 노동자는 더 많은 일당을 받으리라고 기대했습니다만, 똑같이 한 데나리온만 받자 불평을 쏟아놓았다고 합니다. 만약 그들이 똑같이 일당을 받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불안해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을 겁니다.
불안과 불평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인생이 자신의 소망대로 풀리지 않을 때 나옵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은 왜 저래, 하는 불평이나, 내가 인정받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도 자기가 기대하는 기준으로 인생을 판단하기에 발생합니다. 이 기준은 대체로 세상살이에서 학습된 것이라서 종종 과장되거나 왜곡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기준에 고착되었기에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라 해도 그 기준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삶에 대한 불안과 불평에서 벗어나는 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속죄입니다. 그런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났기에 요한은 우리가 “살리심”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살리심이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생명이다
저는 앞에서 요한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읽는 게 옳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랑을 모두 생명으로 바꿔 읽어도 말이 잘 통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표현은 곧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하나님은 생명’이라는 표현을 가리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읽을 때 17절과 18절이 말하는 사랑의 능력을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사랑의 능력은 우리를 두려움에서 해방합니다. 17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이어서 요한은 18절에서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고, 즉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말했습니다. 생명을 이미 얻었다면 당연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현실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도사 흉내를 내는 이들도 말만 그렇게 하지, 속으로는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무(無)의 충격에서 누가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그런 두려움으로 인해서 현재의 삶까지 위축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의 삶이 한편으로는 왜소해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부하에 걸린 이유는 생명이 위축되었기에, 즉 생명을 좁은 의미에서만 생각하기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얼마 전에 저는 위르겐 몰트만의 책 『나는 영생을 믿는다』를 읽으면서 생명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걸 경험했습니다. 몰트만은 자기가 죽는 순간에 즉시 영생을 얻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전의 생각이 달라진 것입니다. 이전에는 바울이 말하는 대로 인간은 죽어서 잠자는 상태로 있다가 세상 마지막 때 잠에서 깨어나 영원한 생명의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고전 15장과 살전 4:13절 이하에서 이에 관해서 설명했습니다. 이런 설명은 죽음과 마지막 생명 심판 사이에는 잠자는 중간 상태가 있다는 말씀으로 읽힙니다. 두려운 기간입니다. 그런데 몰트만은 잠에서 깨어나면 그 이전의 시간은 그에게 의미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 중간 상태가 백 년이 되었든지 1만 년이 되었든지 잠에서 깨는 순간에는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시간에 대한 이해가 새로워진 겁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아침에 눈을 뜨면 다섯 시간을 잤든지 한 시간을 잤든지 차이는 없습니다. 죽는 순간이 오면 50년을 살았든지 90년을 살았든지 차이가 없습니다. 결정적인 사건 안에서는 모든 상대적인 사건들은 그 차이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그 삶에서 벌어지는 온갖 문제들이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수렴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인생살이에서 행했던 시행착오도 녹슨 철물이 용광로를 거쳐서 불순물이 제거된 철로 정화되듯이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흡수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신비로운 생명을 이해하는 사람은 요한이 말하듯이 심판 날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
형제 사랑
여기까지는 우리가 요한의 가르침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결정적인 증거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겠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살이로 인해서 마음먹은 대로 신앙이 깊어지지는 않으나 방향은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 형제 사랑입니다. 요한은 20절과 21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거짓말하는 자이며,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형제는 가족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나 교회 교우, 이렇게 저렇게 관계를 맺는 대상입니다. 형제 사랑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본문에서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표현했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방식의 삶이 우리에게 훨씬 익숙합니다. 오늘의 시대정신인 경쟁의 바탕에는 미움이 자리합니다. 총선이나 대선에서 후보들도 선의의 경쟁이라기보다는 미움을 동력으로 삼습니다. 기업 운영도 비슷합니다. 개인들끼리는 미워하지는 않으나 무시하는 일은 흔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높이려다 보니 상대방을 무시하는 겁니다. 남편과 아내도 서로 무시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교양을 갖춘 사람들은 미워하거나 무시하지 않으나 무관심합니다. 무관심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형제를 사심 없이 사랑하는 사람은 아주 소수입니다. 우리 교회에 선생님들이 많으니까 그분들에게 질문합니다. 학생들을 정말 사랑하고 계십니까? 선생을 귀찮게 만드는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으시나요? 학생들을 정말 인격적으로 대하면서 사랑을 베푸는 선생님들이 있긴 하겠으나, 많지는 않을 겁니다. 목사도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사랑을 실행하기에는 크게 부족하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사랑 실천이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형제 사랑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요즘 페미니즘과 연관해서 벌어지는 이슈의 하나는 임신 중단 문제입니다. 임신 중단 결정을 임신부에게 완전히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 여성 인권을 강조하는 쪽에서 나옵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성폭행을 당해서 원치 않게 임신한 경우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임신 중단은 불법입니다. 태아가 장애를 입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임신부가 원하는 대로 아무 때나 임신 중단을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게 사랑인가요, 아니면 모든 태아에게는 고유한 생명권이 있다는 쪽으로 가는 게 사랑인가요? 임신 4주나 두 달까지는 중단할 수 있고 그 시간이 넘으면 불법으로 하는 게 사랑인가요? 하나의 예를 들었습니다만,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는 형제를 사랑하라는 명제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차원이 많습니다. 노동과 복지와 의료와 전쟁과 기후변화와 부부생활까지 인간의 전반적인 삶이 이렇게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이런 복잡한 문제를 알고 있었을 텐데도 형제를 사랑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왜 그럴까요? 요한이 이런 말을 하게 된 동기는 이단을 경고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이단은 “거짓 선지자”(요일 4:1)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셨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자(2절)입니다. 신학은 그들의 주장을 가현설(Docetism)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육체로 사신 게 아니라 그림자로 살았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 인간과 똑같이 육체를 지니고 살았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육체로 살았다면 배가 고팠을 것이며, 외로웠을 것이고, 남자니까 여자를 그리워했을 겁니다. 이런 인간적인 요소들과 예수님을 연결해서 생각하기 불편했던 겁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가현설에 치우치면 인간의 구체적인 삶이 무시되는 밀의종교(密儀宗敎, Mystery religion)에 떨어질 위험성이 있었습니다.
요한을 비롯한 초기 교회 지도자들은 육체를 지닌 사람들이 이전투구처럼 살아가는 세상의 한 중심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의 인간적인 육체성을 부정하면 안 됩니다. 세상 형제들과의 관계를 외면하면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과 담을 쌓지 않습니다. 싸울 때 싸우고, 참을 때 참고, 외칠 때 외치고, 침묵할 때 침묵하면서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사랑할는지는 여러분이 각자 자신이 선 자리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결정해야 합니다. 그 출발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사랑을 경험한 분량만큼 여러분은 형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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