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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하나님, 역사, 삶

하나님, 역사,

45:3-11, 주현절 후 일곱째 주일, 2019224

 

3.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9.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10.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15.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

 

구약성경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배경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들의 역사를 염두에 두어야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출애굽이고, 다른 하나는 바벨론 포로입니다. 출애굽은 학자들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기원전 15세기에 일어난 사건이고, 바벨론 포로는 기원전 6세기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 모두 제국과 연관됩니다. 출애굽은 고대 애굽, 그러니까 이집트 제국으로부터 탈출한 사건이고, 바벨론 포로는 바벨론 제국에 의한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였기에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가기보다는 주변의 제국에 의해서 좌우되곤 했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제국이 역사를 주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 의해서 무너진 정권이 세계 곳곳에 허다합니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가장 노골적인 정권교체 작업이었습니다. 북한도 오랜 세월에 걸쳐서 미국과 밀당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북한 정권을 무력으로 무너뜨리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만 실제로 실행하지 못한 이유는 그 전쟁으로 인해서 수백만 명이 생명을 잃게 될 것이 분명해보였기 때문입니다. 오는 227일과 28일에 북미 최고지도자들이 베트남 하노이에서 2차 회담을 엽니다.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북미 협상과 회담을 보면서 출애굽 당시의 상황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대표자는 모세였습니다. 지금이야 모세를 구약에서 가장 뛰어난 영웅으로 보지만 당시에는 애굽 제국에 사는 소수민족의 대표자에 불과했습니다. 바로는 모세와 벌인 협상 약속을 번번이 깼습니다. 자그마치 열 번이나 깼습니다. 그 과정이 출애굽기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자기 민족이 광야로 나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바로는 모세 앞에서는 허락한다고 약속했지만 뒤돌아서면 번복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애굽 지역에 있는 모든 가축의 맏배와 가정의 장남이 죽는 사건이 벌어지자 바로는 굴복하고 애굽을 떠날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그 약속도 잠시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센을 떠나자 바로는 군대를 출동시켜서 이스라엘을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의 기지와 혜안으로 홍해를 건너지 못했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로의 기마병에 의해서 떼죽음을 당했을 겁니다.

창세기는 출애굽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출애굽을 설명하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애굽의 고센에서 살게 되었는지를 밝혀야만했습니다. 여기서 요셉이 중심인물입니다. 요셉이 겪은 운명에 의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향인 가나안을 떠나서 애굽의 고센이라는 지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고대 이스라엘 족장 시대의 마지막 세대에 속합니다. 처음 족장은 아브라함이고, 그 다음은 이삭이고, 뒤를 이어 야곱이 등장합니다. 야곱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열두 아들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태두가 됩니다. 열두 아들들은 이복형제들입니다. 야곱은 네 명의 여자를 통해서 아들만 열두 명을 낳았습니다. 네 명의 여자 중에서 야곱이 가장 사랑한 여자가 라헬입니다. 라헬은 늦도록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라헬은 자기 몸종인 빌하를 남편과 동침하게 하여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 와중에 라헬은 직접 자기 몸으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요셉인데, 야곱의 전체 아들 중에서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라헬은 두 번째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노산인 탓인지 출산 중에 그녀는 죽습니다. 모든 인생이 구구절절 사연도 많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통해서 얻은 요셉과 베냐민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그중에서 요셉에 대한 사랑이 더 극진했습니다. 편애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로 인해서 가족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야곱은 요셉을 끼고 돌았습니다. 명품 옷을 요셉에게만 입혔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셉은 형들과 부모가 모두 자기에게 절을 한다는 꿈을 꾸고 그걸 자랑하듯이 내뱉었습니다. 부모의 태도가 자녀들의 무의식에까지 영향을 끼친다고 봐야겠지요. 어느 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야곱은 애지중지하는 요셉을 형들이 양을 치는 목장으로 보냈습니다. 목장이 잘 운영되는지 보고 오라는 것입니다. 평소에 요셉은 양 치는 일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명품 옷을 입고 목장에 들어선 요셉을 형들은 대상(隊商)에게 팔았습니다. 거기에 얽힌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창 37장에 나옵니다. 형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이 짐승들에게 잡아먹혔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애굽에서 어느 장군집의 노예로 지내던 요셉은 우여곡절 끝에 애굽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런 방식으로 각자의 인생이 끝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역사는 우연한 방식으로 흘러서 형제들을 다시 만나게 합니다.

그 우연한 사건은 대흉년입니다. 7년에 걸친 흉년이 애굽과 인근 지역을 덮쳤습니다. 흉년이 들기 전에 대풍년이 7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총리가 된 요셉은 풍년 기간에 싼값으로 곡식을 사서 정부 창고에 비축해두었습니다. 흉년이 시작되자 곡식 값이 올랐습니다. 애굽 백성들은 비싼 돈으로 정부미를 사먹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무역상들이 애굽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곡식을 처리하는 전권이 요셉에게 있었습니다. 대흉년은 야곱이 열한명의 아들과 며느리와 수십 명의 손자 손녀와 함께 사는 가나안 지역도 피해가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애굽에는 곡식이 넘친다 하니 그곳에 가서 곡식을 사오라고 말했습니다. 막내 베냐민을 남겨두고 열 명의 아들들이 수레를 끌고 곡식을 구입하려 애굽에 가서 요셉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 식의 의관을 차려입은 요셉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대상에게 팔려갈 때 살려달라고 매달리던 요셉과 지금 애굽의 최고 권력자 사이에는 그 어떤 연관성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들은 지금 곡식 구입에만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

요셉과 형들은 세 번에 걸쳐서 만납니다. 처음 만났을 때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끝까지 밝히지 않았습니다. 형들의 생각이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음모를 꾸몄습니다. 형들의 수레에 곡식만이 아니라 곡식 값으로 가져온 돈까지 실어 보냈습니다. 다음에는 반드시 막내인 베냐민을 데리고 와야 한다는 다짐을 주었습니다. 형들은 나중에 이것이 음모라는 걸 알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야곱은 자초지종을 듣고 베냐민을 절대로 보낼 수 없다고 버텼지만 흉년이 계속되자 어쩔 수 없이 다시 곡식을 구입하기 위해서 베냐민을 동행시킵니다. 여기서 유다가 큰 역할을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베냐민을 책임질 테니 염려하지 마시라고, 만약 일이 잘못되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여도 좋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만났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친 동생입니다.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음모를 꾸몄습니다. 곡식 자루에 자기가 가장 귀하게 사용하는 은잔을 넣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득의양양 곡식을 실은 수레를 끌고 고향땅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보낸 청지기가 그들을 쫓아왔습니다. 총독 요셉의 은잔이 없어졌다는 겁니다. 곡식자루를 풀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베냐민의 곡식자루에서 은잔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다시 요셉에게 끌려갔습니다. 심문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요셉의 노예가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요셉은 베냐민만 남겨두고 모두 편안하게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유다가 나서서 만약 베냐민을 두고 가면 요셉을 잃은 뒤에 베냐민만 의지하고 살았던 늙은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것이라고 한탄합니다.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44:31).

그 말을 들은 요셉은 더 이상 자기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를 돕는 수하 사람들을 모두 물러가게 하고 자신이 누군지를 형제들 앞에서 밝히고, 큰소리로 울었습니다. 형제들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위로합니다. 45:4,5절을 읽겠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의 발언은 좀더 길게 이어집니다. 형들이 자기를 대상에게 팔았다는 사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극심한 흉년이 반복되는 때에 생명을 본존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겁니다. 이제 형들은 요셉과 완전히 화해를 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에 대한 안부를 더 자세하게 묻고 대답을 들었습니다. 나중에 요셉의 일을 전해들은 야곱은 식솔들을 모두 이끌고 애굽 땅으로 왔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출애굽 이전에 이스라엘 민족이 고센 지역에 터를 잡고 살게 된 내력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발언이 이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들이 정작 하고 싶은 것입니다. 요셉이 대상에게 팔린 비극까지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역사관, 역사철학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역사관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죽음은 개인에게 가장 비극적인 운명입니다. 예수 자신도 십자가로 생을 마감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운명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받아들였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그 어떤 업적과 소유에 의한 게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유대교의 종교적 업적인 율법과 로마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역사를 제국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역사를 제국에 의해서 실행되고 기록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현실적인 생각입니다. 학교에서 배운 세계역사는 모두 당대의 제국을 중심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한반도의 역사도 주변의 제국에 의해서 결정된 적이 많습니다. 오는 금요일 31일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91931일을 기점으로 일어난 일본 제국을 향한 비폭력 저항 운동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당시 한반도는 19108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체결된 합병조약으로 인해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한일합병조약 같은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오늘날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이상한 게 전혀 아닙니다. 당시 많은 이들은 일본에 빌붙어야만 조선이 서양의 열강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도 이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주한미군과 전시작전권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국토를 우리 힘으로 지키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럴만한 힘이 없으면 몰라도 힘이 막강한데도 미국 군대를 붙들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적지 않습니다. 더구나 전시작전권을 돌려받는 걸 두려워합니다. 이런 생각이 점점 확대되면 대한민국을 미국의 한 주로 편입시키자는 말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어떤 영문학자는 영어를 우리나라의 제2 공용어로 삼자는 주장을 했습니다. 좀더 진행되면 우리나라 말은 다 잊고 영어가 국어가 되겠지요.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나라 말인 히브리어를 못하고 아람어를 사용한 것처럼 말입니다. 형식적으로만 독립 국가이지 정신적으로는 이미 미국의 식민지나 다름이 없는 생각입니다. 세계 역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제국이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이런 생각과 주장을 배격합니다. 오늘 요셉이 형들 앞에서 격정적으로 외친 발언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악행까지도 선하게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이 발언은 인간의 악행에 대한 책임이 인간에게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알아서 하니까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괜찮다는 말도 아닙니다. 역사 냉소주의나 허무주의는 성서의 신앙에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감당해야 할 일을 최선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동생을 파는 행위는 책임을 져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실을 믿기에 지금의 악한 질서와 투쟁할 수 있고, 투쟁해야 할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설교 앞부분에서 구약성경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두 사건 모두 당시 막강 제국과의 관계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만 보면 두 사건이 1천년 정도의 간격이 있지만 신앙의 차원에서는 동시대 사건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들은 자신들의 운명 앞에서 절망했습니다. 바벨론 제국 앞에서 느끼는 패배주의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선지자들은 제국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선포했습니다. 출애굽의 놀라운 사건도 하나님의 능력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이런 관점을 요셉 설화를 통해서 설명했습니다. 애굽으로 팔린 요셉의 운명을 하나님이 오히려 생명 구원의 기회로 삼으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제국의 막강한 힘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제국이라는 말이 멀게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구체적인 나라로서의 제국만이 제국이 아니라 제국 이데올로기가 제국의 실체입니다. 제국 이데올로기는 독점이고 강요이고 힘과 돈의 숭배이며, 완고한 자기중심성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제국의 힘에 귀신 들린 것처럼 사로잡혔습니다. 그런 현상을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나라 기업이 인도나 파키스탄 등에 수출을 많이 해서 외화 획득을 많이 하는 걸 무조건 좋아합니다. 가난한 나라에 가서 돈벌이 잘하는 게 그렇게 좋은 일일까요? 우리가 잘살게 되면 거꾸로 가난하게 되는 나라가 생깁니다. 물론 우리가 안 가면 일본이나 다른 나라가 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경쟁을 해야 하지만, 이런 세상 원리를 무조건 박수칠 일은 아닙니다. 한 교회가 부흥한다고 무조건 좋아할 일이 아닌 거와 같습니다.

세계 역사만이 아니라 개인의 역사, 혹은 개인의 한평생 삶도 제국주의적 마인드로 살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 중심으로 살 것이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여러분에게 좋은 일들만 많이 일어나기를 저는 바라지만, 설령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도 좌절하지 마십시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재난과 고난까지도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로 만드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깊어지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요?

창세기 45:3-11, 15
https://youtu.be/DAq07d9OP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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