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er::bec483ba-d204-47d4-afbd-8005746530c3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 6:7-13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에서 기도는 거의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합니다.
우리만큼 기도를 많이 하는 교회는 세계 그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기도에 관한 책도
많고 간증도 많고, 실제로 교회에서 기도를 중심으로 한 프로그램들이 적지 않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체험을 함으로써 가능한대로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어떤 사람
들은 아예 기도와 담을 쌓고 삽니다. 그런 것은 모두 미신적인 행위라고 치부하고 자기
자신만은 아주 고상하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기도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드러내놓고 기도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겠
지만 삶의 자세에서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경우는 많습니다. 이 양자가 모두 기
도를 왜곡시킵니다. 한쪽은 기도의 인플레이션이고, 다른 한쪽은 기도 결핍증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올바른 기도일까요? 사실 기도에 대한 정답은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
의 대화에 어떤 정해진 격식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 따라서 다른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의 영적인 호흡이라 할 수 있는 기도도 역시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두 마디
로 짧게 기도를 드릴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좀더 세부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기도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매일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서 기도를 드리겠지만, 또
다른 사람은 자기의 일상에 따라서 기도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기도의 형
식이나 그 효과에 대해서 신경을 쓰기보다는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충분히
인식한 다음에 자기 형편에 따라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어 나가면 좋을 것입니
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기도의 본질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마 그 당시에도 기도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논란이 없지 않았겠지요.
예수님은 우선 기도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지적하셨습니다.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하
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방인들은 같은 말을 반복하더라도 오래 기도할수록 좋다고 생
각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알기 때
문에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는 그렇게 많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만약 우리 집 딸들이
매일 "옷 사주실 거예요?"라고 나에게 조른다면 그 아이들은 철이 들지 않은 아이입니
다. 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 그들이 나에게 부탁하기 전에 내가 잘 알고 있기 때문
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를 위한 기도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거나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방인들처럼 기도의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 중언부언하는 것은
참된 기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의 기도 습관을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가르쳐주신 그 유명한 '주기도'만이 우리가 드려야할 절대적인 기도 형
식은 아닙니다. 그 어떤 내용이나 형식일지라도 진정성이 담겨 있다면 본인이 생각하
는 대로 드려도 좋지만 그 모든 기도는 이 주기도 안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합니다. 이
런 점에서 우리가 주기도를 공부하는 것은 우리가 바르게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결정
적으로 중요합니다. '주기도'의 여러 항목 중에서 오늘 우리는 다른 부분은 접어두고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호칭만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는 이 호칭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아버지' 호칭은 그렇게 유별난 것은 아닙니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이런 특징들이 발견됩니다. 바벨론의 월신인 신(Sin)은 신들과 인간들의 아버
지로 불립니다. 우라기트인들도 그들의 창조신(神)인 엘을, 그리고 헬라인들은 제우스
를 아버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성서 예레미아 3:19, 31:9절에 야훼가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불리며, 이보다 훨씬 전에도(삼상 7:14) 하나님의 특징은 왕의 아버지였습
니다.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훼의 부성은 왕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인식되다가
왕조가 몰락한 이후에 직접적으로 인식된 것 같습니다(판넨베르크, 사도신경 해설, 참
조).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
르셨습니다. 다른 곳에서는(막 14:36) 훨씬 친근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아바 아버
지'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호칭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다
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정도의 심원한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 호칭을 우리는 자칫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
렇습니다. 하나는 '아버지'라는 호칭이 하나님을 인간과 비슷한 존재로 여길 수 있다는
오해입니다. 프로이트가 기독교 신앙을 집단적 노이로제라고 비판했는데, 그 비판이
이런 오해에 기인합니다. 외디푸스 콤플렉스에 빠진 사람들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죄
책감에 빠져서 살게 되는데, 기독교가 늘 그런 식으로 사람들의 죄책감을 자극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을 이런 죄책감에서 구원해줄 구원자를 모색하는데, 그가 곧
예수였다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나 그 이전의 니체 같은 학자들이 나름대로 기독교의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긴 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욕망을 대신 이뤄
줄 수 있는 대상으로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
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단지 신인동성동형론적인 시각이 아니라는 점을, 또한 하
나님을 우리와 동일한 인격자로 보는 게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
는 오해가 실려 있습니다. 물론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흡사 이 세상의
아버지와 비슷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긴 합니다만 그것은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이고 분명한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지 하나님에게 우리 인간과 똑같은 차원에서
의 인격성이 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른 오해는, 주로 여성신학자들이 제기하는 부분이기는 합니다만, '아버지' 호칭
에는 다분히 그 당시의 가부장적 흔적이 담겨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이를 제
거해야만 한다는 주장입니다. 성서가 가부장적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표현은 훨씬 본질적인 점을 해명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차용한 단어였지 그 당시에 일반적이었던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하나님을 설명하
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극단적인 여성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하나님 '아버지'를 이
제 하나님 '어머니'로 또는 하나님 '아버지와 어머니'로 고쳐야만 가부장적 질서를 극
복하고 원래의 하나님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
호칭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핵심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개인적으로 만나시고 관계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의미
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을 실제로 아버지처럼 돌보아 주신
다고 말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개인들은 어떤 정치적 세력에 휩쓸려서 별 볼일 없는 존
재로 치부되었지만 이제 예수님에 의해서 모든 개인들이 우주보다 훨씬 중요한 존재로
부각되는데, 거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분이 곧 야훼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 하
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손수 나서는 분이며, 가출했다가 돌아오는 둘째
아들을 학수고대하는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예수님은 '아버지'로 불렀습니다. 위
에서 인용한 대로 이제 하나님은 예수님에 의해서 '아빠'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할만한 능력이 있으신 창조자이십니다. 가부장적 질서
에서 사용되던 '아버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여기서의 핵심은 여성을 낮추
어 보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비록 성서가 그 당시의 가
부장적 흔적을 보이긴 하지만 그것은 비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그런 시각으로 성서
를 접근하거나 거꾸로 그런 시각으로 비판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버지로서의 그 하나
님은 창조자이고 심판자이며, 그래서 구원자이십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
님 아버지를 내가 믿는다'는 사도신경의 첫 구절도 역시 이런 의미입니다.
결국 이 두 속성을 지닌 의미로서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실만한 분
이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관심을 기울이시고 세상을 창조하고 심판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를 완전히 맡길만한 분이십니다. 그런 분 이외에 우리
가 기도를 드릴 대상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그런 분에게 우리가 기도를 드리지 않으
면서도 이 세상에서 참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주의 물방울 하나로도 손쉽게 해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인 주제에 말입니다.  

우리 아버지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 그 분은 바로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은 왜 '나'의 아
버지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라고 가르치셨을까요? 예수님 당신이 기도하실 때나 자
신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설명할 때는 '내' 아버지라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늘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으며, '내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반면에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여기에 드러나는 차이는 무엇일
까요? 예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명실상부하게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셨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그 이전의 아버지 호칭과 그 개념은 추상적이었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그
아버지는 구체적으로 우리와 연관을 맺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
내신 그 분이 곧 예수님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십니
다. 우리는 그 예수님 덕분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고 그런 관계를 맺게 되었습
니다. 따라서 '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하나님과 부자관계인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현실성' 안에서 인식하게 되
었다는 사실은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없었다
면 우리 인류는 유대인의 하나님 인식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영원성과
전능성과 창조성을 가진 분으로서만 인식하지 우리의 아버지로서 인식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단지 초월적으로 자존하는 분으로서만 인식되었지 역사에 내재하고 의존적
인 분으로서는 도저히 인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초월의 하나님
이 역사 내재의 하나님으로 인식되었듯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초월과 역사가 일치되었
습니다. 초월이 역사 안에 드러나게 되고 역사가 초월적인 의미를 담게 되었습니다.
초월과 내재의 일치가 무엇인지 좀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초월이
라는 말은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자기 존재의 근거로 삼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시간과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 역사의 밖에 계시는 분
이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으로 모두 담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하나님을 형상
화하거나 규정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주문합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인식 안에 제한시키
려는 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이렇게 초월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분이
지만 역사 안에 개입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십니다. 물론 하나님이 직접적으
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은 죽습니다. 태양을 직접
바라보면 눈을 잃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보면 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은 곧
이 땅에서 유지되는 이런 형식의 삶을 끝내고 다른 방식의 생명을 얻어야만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지 않고도 초월적 존재인 하
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 길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
수님은 철저하게 우리와 똑같은 역사적 존재입니다만 동시에 철저하게 하나님이십니
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기독교 전체 신학과 연결되기 때문에 이 자
리에서 충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곧 초월과 역사가 만나는 아르키메
데스 점이라는 사실만 우리가 인정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신 예수
님이 이제 우리에게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바
로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그런 근거로 우리는 기도를 드립니다.

하늘
바로 위에서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초월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 초월을 성서적 언
어로 번역하면 '하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의
문을 여셨으며, 초기 기독교인들도 예수님이 부활 이후 하늘로 올라갔다고 생각했습니
다. 구약이나 신약 모두 하나님을 하늘과 연관해서 생각했습니다. 빌립보서에서 사도
바울도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한민족이 신을 '하나님'이
라고 부르는 이유도 역시 '하늘' 표상이 그 안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간혹 천주교인
들이 말하는 '하느님'이 옳으냐, 우리 개신교인들이 부르는 '하나님'이 옳으냐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국문학자도 아닌 제가 이 문제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닙니
다만 언젠가 읽은 어느 전문가의 칼럼에 기대서 한 마디 하면 이렇습니다. 개신교에서
주장하는 하나님은 '하나'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원래 우리의 고어에서 '하나'의
'나'자는 아래 아를 써서 ' '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하 '라고 한다면 '하날
님'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하느님'은 원래 '하늘' 표상과 연결되
기 때문에 '하느님'으로 읽는 게 옳다고 합니다. 이 학자의 주장은 하나님이 '하 '에서
왔는지, 아니면 '하늘'에서 왔는지에 따라 달라지는데 하늘에서 왔다면 '하느님'이, '하
 '에서 왔다면 '하날님'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읽은 기억이라 제가 정확하게
전달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대충 그런 뜻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어쨌든지 성서가 말하는 '하늘'은 무엇일까요? 물론 초월의 세계라고 말하면 되지
만 그런 정도로만 말하면 너무 관념적이니까 좀더 풀어보자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공간적인 의미에서의 하늘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구름을
타고 올라가는 예수님의 승천 장면을 보면 흡사 이런 공간을 하늘로 생각할 만합니다.
2천년 전 사람들은 우주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런 공간적인 차원에서 하
늘을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우주관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
면 그런 차원에서의 하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주 공간 어디쯤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서가 말하고 있는 하늘이 비록 그 당시의 우주관으로부터 완전
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는 다른 신학적 현실성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폐성입니다. 은폐의 방식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성서는 '하
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폐성
아마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는 하나님이 '있다'는 생각만 했지 그 하나님이 '은
폐'의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말을 처음 들은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생각
을 혼란스럽게 만들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공연히 기독교 신앙을 지성화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아니라 훨씬 심
연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입에 담는 영성은 무조건
적인 믿음이거나 주술적인 현상이 아니라 그 어떤 학문이나 종교보다 훨씬 깊은 직관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의 인식론을 약간 심
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은 단지 '있다'와 '없다'의 이분법적 구조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이 두 개념의 역학적 관계를 인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기 성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서는 1백 년 전에는 없었습니다. 앞으로 1백 년 후에도 아마 없을 것입니
다. 왜 없다가 있으며, 또 있다가 없습니까? 그거야 성서를 만드는 출판업자가 만드니
까 있는 거고, 불에 타거나 낡아버리니까 없는 거 아닌가, 하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물
론 현상적으로는 그렇게 간단하기는 합니다만 왜 출판업자가 그 성서를 만들게 되었는
지, 혹시 만들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우연하게 만든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여
러분은 마음속으로 '당신 말장난하고 있어'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어떤 사물이 있다거나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명확한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그것에 생명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숨어 있다가 이
세상에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물은 바로 하나님에게 그 존재의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사물 자
체도 은폐되어 있다가 이 세상에 드러나는데, 하물며 그 모든 것을 규정하는 리얼리티
인 하나님이야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어떤 인식과 논리
를 근거로 해서 파악해보려고 해도 늘 그런 시도를 뛰어넘습니다. 우리가 피조물이라
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그런 인식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정
교한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인간을 인식할 수 없는 것과 같습
니다.
하나님의 은폐성을 가리키는 이 하늘은 곧 생명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
니까 하나님은 궁극적인 생명의 능력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이 무엇이 아직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생명도 역시 은폐의 성격이 있습니다. 다른 생명체는 접어
두고 인간만 본다고 하더라도 300만년 전의 '호모 에렉투스'로부터 점차 인간적 특성을
갖게된 우리 인간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변화해나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의 경우
에도 생명은 여전히 은폐되어 있습니다.

기다림으로서의 기도
이런 점에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궁극적인 의미는 은폐의 하나님이, 즉 아직 숨
겨진 생명의 능력이 우리에게 드러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는 생명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의학 기술이 발전하거나 정치와 경제가
정의로워짐으로써 약간이나마 생명의 모습을 바꿔나갈 여지는 있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는 거의 무능력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그 생명의 영에게 순종하겠다는 뜻의 고백
이 곧 기도입니다. 이 대강절에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정직하고 진실하게 드린다는 것
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2003.12.7. 영언교회  
마태복음 6:7-13

설교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