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성령강림후 둘째 주일, 2015년 6월7일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신구약성경은 2천년에서 2천5백 년 전에 기록된 문서이기 때문에 이해하는 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고후 5:1절을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을 테니까, 무슨 뜻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들어 있는 지상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워 주시는 집입니다.
이 구절에서 지상의 집과 하늘의 집이 대비됩니다. 지상의 장막집이 무너진다는 것은 물론 죽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운명이 끝장나는 게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들게 된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천당(天堂)에 간다는 말로 들릴 겁니다. 천당은 한자로 ‘하늘 천’과 ‘집 당’를 쓰는 단어로서, 하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영원한 집과 비슷한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바실레이아, 또는 우라노스라고 합니다. 그 헬라어는 천국, 하나님 나라, 하늘나라로 번역됩니다. 어떤 단어로 번역되든지 이런 단어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의 삶과는 구별되는 어떤 곳을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하늘의 집이라는 개념은 우주 물리학에 대한 식견이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받아들여지기 힘듭니다. 우주에는 태양과 같은 별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 사이는 흑암물질에 채우고 있습니다. 먼 미래에 우리 후손들이 우주 어느 한 곳에 지구와 비슷한 생태 조건을 갖춘 행성을 발견해서, 광속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우주 비행선을 타고 그 행성으로 이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고 해도 그곳을 성경이 말하는 하늘나라, 또는 천당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주 어느 공간의 장소는 영원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주의 수많은 별들이 생기고 사라집니다. 태양의 나이는 46억 살 정도 됐습니다.
하늘의 영원한 집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려면 우선 성경이 말하는 하늘이 무엇인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고대인들은 우주 물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이 못했습니다. 신화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조상들은 달에 토끼가 산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신화에는 세상이 거북이 등에 놓여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구약의 노아홍수 전승에 따르면 하늘에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물이 땅에 쏟아졌다고 합니다. 하늘은 인간의 힘이 닿지 못하는 절대 영역입니다. 거기서 비와 눈이 내리고, 빛도 옵니다. 간혹 벼락도 칩니다. 고대인들에게 하늘은 신비 가득한 생명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바로 생명의 원천이라는 뜻입니다. 그 생명의 원천은 다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은폐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은폐되어 있는 생명의 원천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표현에 실감이 가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 이유는 보이는 것만을 확실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건강, 가족, 연봉, 취미생활 등, 지금 우리가 확실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다 보이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만 현실로 실감하는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라 성서가 늘 주장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보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명백한 현실로 경험할 수 있어야 기독교 신앙이 가능합니다. 바울은 고후 4:18절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바울은 이 말을 한 뒤에 이어서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 나오는 ‘하늘의 영원한 집’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하늘의 영원한 집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에 반해서 보이는 것들은 모두 잠깐입니다. 여러분들의 지나간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잠깐입니다. 우리의 소유는 모두 잠깐입니다. 보이는 것 중에서 잠깐이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젊음과 건강과 사회적 지위도 잠깐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세상이 허무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 기독교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허무주의에 빠질 수 없습니다. 바울은 지금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영원하고 참된 생명을 강조하기 위해서 보이는 세상이 잠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영원하고 참된 생명은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참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는 씨앗입니다. 씨앗은 지금 눈에 보이지만 씨앗 안에 꽃은 보이지 않습니다. 씨가 땅에 심겨서 싹이 트고 순이 나고 줄기가 자라면 언젠가 꽃이 피게 됩니다. 씨앗 속에 아직 꽃은 보이지 않지만 꽃이야말로 참된 생명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 교회입니다. 지금 교회의 모습은 보입니다. 이런 교회는 잠깐입니다. 이런 교회는 상처를 받을 수 있고, 부패할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문을 닫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 불가시적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이미 승리한 교회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구체적으로 부활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집은 몸입니다. 무너질 장막집이 지금의 몸인 것처럼 영원한 집은 변화된 몸입니다. 무너질 장막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활의 생명이 되면 우리의 몸은 영원합니다.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절대적인 생명이자 영원한 생명입니다. 더 이상 죄와 죽음이 개입할 수 없는 원초적 생명입니다. 그 부활이 실현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일치될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모든 희망을 걸고 살았습니다. 이런 희망으로 모든 시련과 고난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온갖 어려움과 고독과 부조리와 낙심을 이런 희망에 근거해서 뚫고 나갑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영성의 핵심입니다. 이런 사태를 바울은 고후 4:1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여기서 겉사람은 앞에서 말씀드린 땅의 장막입니다. 겉사람이 낡아진다는 것은 단순히 늙어 죽어야 한다는 사실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고난당하는 기독교인의 삶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평생 고난당했습니다. 고후 11:23절 이하에 따르면 그는 투옥되고, 태장을 맞았고, 죽을 뻔한 적이 여러 번이었고, 온갖 위험과 미움을 다 받았습니다. 암살당할 위기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도 그런 일화가 많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고난을 전제한 것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고후 4:8-10절이 이를 지적합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짓눌리고 찌부러진다는 표현을 사실적인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는 유대교의 기세가 등등했고, 로마 제국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도 결국 종교 권력인 유대교와 정치권력인 로마제국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초기 기독교도들은 모두 그들로부터 크고 작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중에 바울은 유달리 박해를 심하게 받았습니다. 그런데다가 바울은 몸이 원래 약한 사람입니다. 지병을 앓고 있어서 가끔 전담 의사가 선교 여행에 동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나 힘든 여행길, 그리고 수배당해 쫓길 때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래도 복음 사역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영적 에너지는 바로 보이지 않는 하늘의 영원한 집, 즉 부활에 대한 희망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희망으로 겉사람은 낡아졌으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졌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전혀 다른 상황에서 살기 때문에 똑같은 시련을 당하지 않습니다만,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것만은 그와 똑같이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새로워지지는 않습니다. 젊었을 때는 피트니스 운동을 통해서 몸을 튼튼하게 단련시킬 수 있지만 일정한 나이가 들면 무슨 수를 통해서도 그게 안 됩니다. 나이 50대만 들어서면 아침저녁으로 몸이 달라지는 걸 느낄 겁니다. 60대가 되면 그 속도가 더 빨라집니다. 그런데 속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새로워지고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신앙은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나이를 먹는 게 즐겁습니다. 신앙이 점점 더 깊어지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점점 깊어진다는 것은 곧 생명의 근본에 점점 더 가까이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앙이 나날이 새로워지는 게 저절로 되지는 않습니다. 육체의 건강에 운동이 필요한 것처럼 신앙의 건강에도 영적인 피트니스가 필요합니다. 그런 노력을 꾸준히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차이가 더 심해집니다. 교회는 영적인 피트니스를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 피트니스에서 전문적인 도움을 받는 경우와 그렇지 않는 경우에 차이가 있습니다. 러닝머신에 올라가서 무조건 걷고 뛰거나 역기를 무조건 들기만 하는 경우와 전문가가 옆에서 운동방법을 가르쳐주고, 결과를 체크해주는 경우는 그 효율성에서 크게 다릅니다. 매일 똑같이 예배만 드리고 열심을 낸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정확하게 배우고 성실하게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걸 제 삼자가 구별하기는 힘듭니다. 그리고 이건 영적인 차원이기 때문에 구별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을 설교자가 나서서 제시하기도 어렵습니다. 단순히 교회에 잘 나온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저는 바울의 신앙을 여러분에게 설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그걸 참고해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에 이어지는 고후 5:2절 이하에서 아주 독특한 사상을 전합니다. 지금 우리는 여기서 탄식하면서 하늘의 집으로 덧입기를 갈망한다는 겁니다. 그는 지금 옷을 덧입듯이 죽을 몸이 영원한 생명으로 덧입혀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의 몸과 영원한 몸을 영지주의자들처럼 이원론적으로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것이 생명에 삼킴을 당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절대적인 생명에 화염처럼 휩싸이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장막이 무너진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바울은 고후 5:8,9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죽든지 살든지 복음을 위해서 살겠다고 합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신앙입니다. 놀라온 고백입니다. 우리 수준에서 보면 까마득한 경지입니다. 삐쩍 마르거나 포동포동 살찐 사람이 피트니스 장에 가서 몸이 완전 근육질로 단련된 운동선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욕망도 생깁니다. 저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바울처럼 높은 경지의 신앙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마추어 선수와 프로 선수가 다르듯이 신앙의 세계에도 아마추어는 프로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추어라고 해도 ‘나날이 새로워’지기만 하면 프로나 마찬가지입니다. 낮은 단계나 높은 단계나 신앙의 진보는 모두 똑같이 성령의 활동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놀라운 신앙고백에 놀라기만 하면 곤란합니다. 그 신앙이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 중심에는 우리가 처음에 읽은 구절이 자리합니다. 하늘의 영원한 집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나날이 새로워지면서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쓴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늘의 영원한 집에 대한 확신이 부럽지요? 이것이 처음부터 분명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겁니다. 처음부터 무조건 확신한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광신도들입니다. 바울은 광신자가 아닙니다. 아무 근거 없이 무조건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기독교도들을 박해했습니다. 그가 볼 때 기독교인들의 주장은 괴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활의 주님을 경험한 뒤에 지난날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만 자신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시련과 고난을 수없이 당했지만 주를 기쁘게 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하늘의 영원한 집이 현실(reality)로 경험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바울이 말하는 하늘의 영원한 집이 나날이 어 가깝고 더 새롭게 느껴집니까? 대다수는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막연하다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제가 그분들을 어떻게 설득시켜야 할까요. 우리는 8,848미터 높이의 에베레스트의 정상에는 서지 못한 등반가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올라갔던 사람들의 글과 사진을 통해서 에베레스트 정상에서의 경험이 어떻다는 걸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 하늘의 영원한 집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건 신앙의 정상이고 절정입니다. 우리가 아직 그곳에 오르지는 못했어도 그곳에 올랐던 사람들의 말을 전해 듣습니다. 물론 직접 가보지 못했으면서도 가본 것처럼 떠드는 사기꾼들도 없지 않습니다. 바울은 종교 사기꾼이 아닙니다.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의 정상인 하늘의 영원한 집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즉 우리의 총체적 인격인 우리의 몸이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된다는 사실을 나날이 더 또렷하게 이해하고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것 외에 더 필요한 것이,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다시 한번 더 여러분들에게 간곡하게 말씀드립니다. 하늘의 영원한 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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