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성령강림 후 셋째 주일, 2018년 6월10일
13.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6.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5:1.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오늘 제2독서 내용 중에서 고후 5:1절은 그것이 기록된 때로부터 2천년 후인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어색하게 들립니다. 제가 다시 읽을 테니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진다는 말은 죽는다는 뜻으로, 하늘의 영원한 집은 죽은 다음에 우리가 들어가야 할 천당이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일단은 이런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건 사실입니다.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이후의 삶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늙어서 죽음을 앞둔 이들이나 사랑하는 가족을 읽은 유족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나름으로 즐겁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공허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특히 지성적인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공허하다는 느낌은 뭔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단 기독교 신앙에는 그렇게 오해될만한 대목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서 지옥에 대한 오해입니다. 여러분들은 지옥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구더기와 유황불을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간혹 지옥이 두려워서 교회에 나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위협으로 사람들을 교회에 붙들어 매려는 교회 지도자들도 없지 않습니다. 심리적으로 불안하거나 정서적으로 위축된 사람들에게만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일정한 사람들을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당하게 하신다는 말은 사랑과 인자와 긍휼의 하나님이라는 성서의 하나님 표상에 배치됩니다. 구더기와 유황불 등으로 묘사된 성경의 지옥 개념은 하나님의 부재 상태를 고대인들에게 익숙한 신화적인 개념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188,189쪽에서 사도신경의 ‘음부에 내려가심’이라는 대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구약과 신약성서 안에 나오는 지옥의 상은 후대에 그렸던 상과는 어느 정도 다르다. 음부 혹은 지옥, 곧 구약 성서적 의미에서 ‘하데스’는 고통의 장소이고, 완전히 격리된 장소이며, 그곳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오직 비존재적으로 존재하며, 오직 그림자로서 존재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장소를 인간들이 오직 가물거리는 그림자로서 떠돌고 배회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 죽은 자들은 하나님을 더 이상 찬양하지 못하며, 그들은 그분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으며, 더 이상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참여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배제된 존재이며, 그것이 죽음을 그렇게도 두렵게 만들며, 지옥을 지옥으로 만든다.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되는 곳, 그곳은 고통의 장소다. “슬피 울며 이를 간다.”(마 22:13, 24:51, 25:30, 눅 13:28). ... 무신론자들은 ‘하나님 없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 지옥의 존재론적 깊이이다. ... “음부로 내려가셨다.”는 것은 그것의 확증일 뿐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다. 다시 말해 그 심판은 인간에게 바로 그가 원했던 것을 준다. 그 판결과 그것의 집행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닐 것이고, 창조주는 창조주가 아닐 것이며, 인간은 인간이 아닐 것이다.
지옥에 대한 바르트의 설명과 반대되는 것이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하늘의 영원한 집입니다. 그런 신학적인 설명보다는 좀더 직접적으로 죽은 다음에 천당이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확실하게 설명하는 게 좋다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안타깝지만 그런 분들이 만족할만한 대답은 제가 드릴 수 없습니다. 음부, 즉 지옥에 대한 바르트의 설명이 마음에 와 닿는 분들에게만 제가 어느 정도 영혼의 공명이 일어날 수 있는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바르트는 하나님 없는 상태를 지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있는 상태가 바로 천국이며, 하늘의 영원한 집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 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생명 경험이 자리합니다.
생명 경험
저는 가끔 내가 태아였던 순간을 생각합니다. 태아였을 때에도 나는 나였습니다. 태아에게는 어머니의 자궁이 모든 세계입니다. 거기서 태아는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듣습니다. 어머니의 피를 공급받습니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너무 엄청난 것이라서 상전벽해라는 말로도 설명이 안 됩니다. 난자와 정자의 결합으로 시작되는 배아는 조그마한 알입니다. 거기서 어느 순간에 분화가 일어납니다. 손과 발과 머리가 생깁니다. 심장과 허파와 내장이 생깁니다. 열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자궁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해야 합니다. 비유적으로 보면 자궁 밖의 세계가 그들에게는 하늘의 영원한 집에 해당됩니다. 태아는 밖의 세계를 직접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밖의 세계가 없다고 부정하면 곤란합니다. 태아에게도 생명이 있으며, 자궁에서 밖으로 나온 아이에게도 생명이 있습니다. 저는 곧 자궁 밖으로 나가야 할 태아처럼 지구에서 일시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늘의 영원한 집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걸 제가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때는 어머니의 손길로, 또는 어머니의 노래와 기도로 태아가 어머니의 메시지를 전달받는 것처럼 저도 하늘로부터 그런 메시지를 듣습니다. 그걸 통해서 하늘의 영원한 집을 희망합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런 영적인 태도로 살아갑니다. 그중에서 하늘의 소리를 더 풍부하고 예민하게 들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경험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기록들을 열린 마음으로 읽는 사람들은 영혼의 귀가 예민해져서 아주 세미한 소리도 놓치지 않습니다.
바울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영혼의 귀가 가장 예민했던 사람입니다. 하늘의 영원한 집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바울의 말은 허튼 게 아닙니다. 그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데에는 어떤 특별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생명 경험입니다. 그는 고후 4:14절에서 ‘주 예수를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신다.’고 말했습니다. 고후 4:10절에서는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났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명단을 고전 15:5-8절에 기록했습니다. 명단 끝에 바울 자신도 나옵니다. 부활의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바울은 기독교를 박해하던 입장에서 옹호자로, 즉 전도자로 변화되었습니다. 부활 경험에 근거해서 바울은 ‘하늘의 영원한 집’이 우리를 기다린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과 하늘의 영원한 집을 관통하는 개념은 종말 생명입니다. 종말 생명은 단순히 마지막 생명이라는 뜻이 아니라 생명의 완성을 가리킵니다. 그때부터 온전하고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이에 반해서 지금 우리의 생명은 미완입니다. 그래서 무상합니다. 시간과 더불어서 낡고 늙고 해체됩니다. 그걸 가리켜서 바울은 고후 4:16절에서 ‘우리의 겉사람은 날로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말했습니다. 이원적인 차원에서 겉사람은 육체이고, 속사람은 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겉사람은 이 땅에서의 생명을 가리키고, 속사람은 종말에 이루어질 생명을 가리킵니다. 겉사람은 지금 눈에 보이지만 속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겉사람에게만 매달립니다. 그것에 매달리면 그것이 낡아지는 것과 함께 그 사람의 삶 자체도 비례해서 낡습니다. 바울은 보이지 않는 속사람으로서의 생명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예수의 부활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 경험
우리는 다시 기독교 신앙의 핵심 문제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예수 부활 경험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에 관련된 성경 구절을 읽을 때마다 부활의 예수는 왜 바울에게만 나타나고 ‘나’에게는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듭니다. 구약성경에도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실들은 많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경험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성경과 하나님 경험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기분입니다. 기도가 부족한 탓인지 모른다는 생각에 기도에 매달려도 부활의 주님에 대한 경험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간혹 비슷한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하나님을 봤다거나 소리를 들었다는 겁니다. 천국을 다녀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다시 소외감을 느낍니다. 천국을 다녀왔다는 주장은 아래와 같이 두 가지의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특별한 종교 경험을 문학적으로 묘사한 것이거나, 아니면 정신과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미망에 떨어진 것입니다.
바울이 부활의 예수를 만났다는 것은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 경험이 너무 또렷하기에 부활의 주를 만났다고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은 생명의 완성이니까 바울의 이런 표현이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경험했다는 말은 구원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를 메시야, 즉 그리스도로 경험하는 것이 곧 예수를 부활한 자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무엇을 근거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즉 원초적 생명의 근원으로 경험했다고 말한 것일까요?
바울은 원래 유대교인 중에서도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빌 3:5,6절에서 자기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율법 종교의 대표자였다는 뜻입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율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빌 3:9) 말미암은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율법은 그걸 실천하는 사람에게 해방과 평화를 주는 게 아니라 율법 실천에 실패한다는 사실만 깨닫게 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생활에 열심을 내면낼수록 영혼의 자유와는 거리가 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를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에 생명을 얻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의로우심에 자신을 완전히 맡김으로써 자신을 억압하던 모든 죄와 죽음의 힘으로부터 해방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 해방이 곧 생명 경험이며, 그 생명 경험이 부활 경험입니다.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의 눈에는 하늘의 영원한 집이 보입니다.
생명의 원초적 깊이
이런 설명이 멀게,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이것은 인간 실존에 자리한 것으로서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략 알지만 별로 절실하게 느끼지 못해서 성경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겉돌게 됩니다. 하나는 우리의 삶이 한 순간이라는 사실이고, 다른 한 가지는 우리가 매달릴 수밖에 없는 현재의 삶도 명백하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두 가지로 나눴지만 실제로는 한 가지입니다. 삶이 너무 짧기에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기에 너무 짧게 느껴집니다. 여기서 벗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벗어나기 위해서 온갖 수고를 다합니다만 큰 효과가 없습니다. 약간의 효과는 있습니다. 사업을 시작했는데, 예상 외로 번창하면 사는 맛이 납니다. 그런 즐거움도 잠시입니다. 그래봤자 별 것 없습니다.
요즘 한반도에서 세계사적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남북 정상이 금년 들어서 두 번이나 만났고, 오는 6월12일에는 북미 정상이 싱가포르에서 만납니다. 6월13일은 남한의 지방선거일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정치 이벤트가 다음 주간에 연달아서 열립니다. 이 결과에 따라서 대한민국의 운명도 크게 달라질 겁니다. 특히 북미 정상 회담이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면 합니다. 한반도가 정전에서 종전으로,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평화체제로 진입했으면 합니다. 그렇게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것에 목을 매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결과를 맺는다고 하더라도 다 지나가는 이벤트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들이 다 지나갑니다. 호기심을 끌던 일들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집니다. 저의 지난 65년 인생살이를 돌아보면 공연히 집착했던 것들이 기억납니다. 우리 인생의 업적이 아무리 화려하더라도 그것으로 삶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무엇이 인생살이이며, 무엇이 생명이며, 무엇이 구원이며, 무엇이 참된 행복인지 잘 알지도 못한 채 다른 사람들처럼 폼 나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에 묶여 있습니다.
이런 인간 실존을 바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확실한 것이 손에 잡히지 않는 인생살이에서 그는 유대교의 율법에 천착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인 뒤로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생명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확신으로 오늘 본문에서도 그는 하늘의 영원한 집이, 즉 종말에 주어지는 부활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과감하게 선포했습니다. 저도 바울의 그 선포를 옳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것만이 진리라고 믿습니다. 다른 것들은 아무리 선한 것이라도 다 지나가지만, 부활의 예수를 통해서 주어진 생명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것을 ‘영원한 집’이라고, 즉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집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설교에 귀를 기울인 분들 중에서 당신이 말한 것을 몰라도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고 속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요? 하늘의 영원한 집보다는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어려운 일들이 더 많은 터라 하늘의 영원한 집을 생각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요? 그런 어려운 일과 고난 가득한 인생살이일수록 ‘하늘의 영원한 집’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바울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바울은 지금 실제로 상당히 곤란한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고후 4:8,9절은 그런 어려움을 욱여쌈과 답답한 일과 박해를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의 설명이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적나라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만약 고난과 시련이 가득한 인생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그것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거꾸로 하늘의 영원한 집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지금 여기 땅에 있는 장막 집에 거하는 동안 호화롭게 살든 힘들게 살든 그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자기 인생을 숙명으로 알고 조용히 지내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생명의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깊이로 들어가는 삶의 태도가 바로 ‘하늘의 영원한 집’을 기다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의 진술에 기대서 말씀드립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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