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3. 마태 3:13-17
예수의 세례
우리가 복음서를 읽으면서 약간 의아하게 생각하는 대목 중의 하나는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일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한다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는 게 옳은 순서일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건 분명한 사실이고, 또한 예수님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 메시아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두 사실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고난도 수학문제처럼 풀기 힘든 탓인지,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세례 사건을 조금씩 다르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세례 받는 장면을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암시적으로만 묘사합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 하늘에서 성령이 예수님에게 내려와 머물렀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요 2:33) 우리는 요한복음 기자의 이런 보도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의 세례 사건에서 세례자체보다는 성령이 임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님의 세례 사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복음서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입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 3:13-17절이 가장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여기서는 이 사건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대화하는 방식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예수님이 왜 세례를 받으셔야 했는지 세례 요한도 몰랐고, 초기 기독교에 속한 모든 이들도 정확하게는 몰랐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해야만 하느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 순간에 일어난 현상을 마태복음 기자는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시각적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청각적인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영상과 소리입니다. 전자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예수님에게 내려오는 현상이었습니다. 후자는 하늘에서 울려난 소리 현상이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바울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에 부활한 주님을 만나게 되는데, 거기서도 역시 빛과 소리가 중요한 현상으로 나타납니다.(행 9:1-19)
하늘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성서의 보도를 읽을 때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세요.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 갑자기 하늘이 열렸다고 합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늘에 문이 있어서 그게 열렸다는 뜻은 아니겠지요. 사실 하늘은 열리는 게 아닙니다. 하늘은 늘 열려 있습니다. 장마가 진다거나 폭설이 쏟아질 때 하늘이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이면 열리는 것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라 우리의 느낌일 뿐입니다. 하늘은 어느 한 순간에도 닫혀 있지 않습니다.
또한 본문은 하늘이 열린 뒤에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 위에 내려오는 게 보였다고 말합니다. 서양화가들은 이런 장면을 자주 그렸습니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니까 아마 성령을 그런 모습으로 그린 것 같습니다. 이런 표현에서 성령의 모양이 실제로 비둘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비둘기는 성령을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메타포(은유)입니다. 메타포는 실제가 아니라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뜻하는 하트 모양이 사랑 자체가 아닌 것처럼 비둘기가 성령 자체는 아닙니다. 이 두 가지를 잘 연결해서 생각해보십시오. 하늘이 열린다는 것과 비둘기 모양의 성령 말입니다. 비둘기가 성령에 대한 메타포이듯이 하늘이 열린다는 것도 그 어떤 것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성서시대의 사람들은 하늘이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성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되는 주기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신약성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면 우리가 모두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살전 4:13 이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말합니다.
고대인들이 하늘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로 생각했다는 사실은 그렇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성서를 읽을 때 그 성서가 기록되던 시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서를 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일종의 시간여행이 필요합니다. 2천 년 전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하늘은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이었습니다. 그 하늘에서 비가 내립니다. 노아 홍수 때는 사람들이 하늘에 구멍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에서는 때로 벼락도 칩니다. 화산이 폭발하면 연기가 하늘도 올라갑니다. 그 하늘에 태양이 있고, 별들도 있습니다. 태양이 동에서 떴다가 서로 떨어지면 세상이 어두워집니다. 이런 일들이 왜 벌어지는지 고대인들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들에게 하늘은 신비의 원천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하늘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생각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무식하다고 깔보면 안 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물리적 지식이 비록 우리보다 짧았지만 영적으로는 우리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못하지 않습니다. 여기 노벨물리학상을 탈만한 능력이 있는 물리학자와 시골에서 한평생 농사만 지은 늙은 농부가 있다고 합시다. 이 두 사람이 물리의 세계를 진지하게 대하기만 한다면 지식의 많고 적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비록 물리적인 지식이 없는 농부라 하더라도 마음을 열고 세상을 직면하기만 한다면 그는 궁극적인 진리와 맞닿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뭔가 다르긴 다르지 않느냐, 물리학자가 근원에 훨씬 가까이 다가간 게 아니냐, 하는 생각할 할 분들이 계시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별 개 아닙니다. 왜냐하면 농사꾼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물리학자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모두 바닷가의 모래 한 알 정도로 작기 때문입니다. 도토리 키 재기라는 말이 여기에 어울립니다.
그렇습니다. 성서기자들은 영적으로 아주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리적 지식은 부족했지만 근본에 대한 생각은 아주 깊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생각한 근본은 무엇일까요? 하늘이라는 말로 그들이 전하고 싶었던 핵심은 무엇일까요? 이걸 놓치면 우리는 성서를 아무리 읽어도 그 중심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서기자들이 말하는 하늘은 생명의 비밀장소입니다. 이 말은 곧 생명이 비밀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공부한다고 해도 생명이 무엇인지를 완전하게 알아낼 도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비밀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생명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이렇게 생명 안으로 들어왔는지, 이 생명 밖으로 나간다는 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지난 시간들을 조금만 돌아보세요. 20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40대, 50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이 시간, 이 세월이 무엇인지 우리는 여전히 잘 모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난다는 것 자체도 신비롭습니다. 부부도 그렇고, 친구도 그렇고, 교우도 그렇습니다. 얼마나 많은 우연성이 겹쳐야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참으로 신기합니다. 이런 비밀, 이런 신비를 땅의 경험만으로 우리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성서기자들이 말하는 하늘은 바로 이런 모든 비밀이 놓여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궁극적 생명이 은폐되어 있는 곳이 곧 하늘입니다.
예수는 하늘의 문이다.
오늘 본문을 다시 잘 보세요.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그 순간에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숨겨졌던 생명의 비밀이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하늘은 바로 위해서 말한대로 궁극적 생명이 은폐된 곳입니다. 아무도 하늘로 올라갈 수 없듯이 아무도 그 생명이 은폐된 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하늘이 열려야만 우리는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을 여는 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제 우리는 생명을 알게 되었고, 그 생명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마태는 그 증거를 성령의 임재와 하늘의 소리로 제시합니다.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 위에 임했습니다. 성령은 바로 생명의 영이십니다. 하늘에서 들린 소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 3:17) 이 구절은 시편 2:7절의 인용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잘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사람처럼 아들을 둔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른 말로는 그 관계를 설명할 수 없어서 아들이라고 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을 그대로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듯이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속성, 또는 하나님의 유업은 생명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참된 생명의 아들이십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 사건은 완성될 수 있습니다.
이 창조 사건의 완성은 곧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사건에, 그 창조의 완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엄청난 일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을까요? 생명의 완성보다 더 신나는 일이 어디 있을까요? 모든 것이 죽어야 할 운명 가운데서 이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으니, 우리가 어찌 소리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되고 궁극적인 생명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이 열렸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그 사건을 더 이상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방법이 그들에게는 없었기에 그렇게 시(詩)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초기 기독교인들의 이런 신앙 경험과 이런 신앙 고백을 따라가고 있을까요? 하늘이 열린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예수님이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깨닫고 있나요? 이런 건 무조건 깨달아지는 게 아닙니다. 무조건 믿습니다, 하고 외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알지 못하는 데 어찌 깨달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천박한 생명 이해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결코 하늘이 열린다는 복음서 기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천박한 생명 이해라는 말이 조금 불편하게 들리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천민자본주의라는 말이 있듯이 생명에 관해서도 그런 말이 가능합니다. 생명을 수단으로 다루는 삶의 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은 그 나무를 비싸게 팔아서 돈 벌 생각만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그 나무의 생명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저는 어떤 분에게서 곶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오늘 예배 후에 하나씩 맛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곶감을 보고 돈이나 맛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그 곶감의 생명의 깊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난여름에 햇빛과 물, 탄소가 결합해서 감이 만들어졌고, 그 껍질을 깎아 몇 달 동안 말리는 과정에서 귀한 곶감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생명의 깊이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에게 생명은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다가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차원으로 생명을 생각합니다. 그냥 돈 잘 벌고, 건강하게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걸 목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만이 목적이라고 한다면 굳이 예수님을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돈 잘 벌 사람은 잘 벌고, 건강할 사람은 건강합니다. 거꾸로 예수님을 아무리 잘 믿어도 망하기도 하고, 병도 듭니다. 이런 문제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생명, 삶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여기서 영원하다는 것은 참되다는 뜻입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생명, 이런 삶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조건과 환경이 좋다고 해서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이걸 여러분은 알고 계시나요? 그런 경험이 있나요? 이런 인식과 경험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우리 삶에서 생명의 깊이인 하늘이 열리는 걸 경험할 수 있을까요?
이건 제가 말로 설명하기 힘듭니다. 기독교 교리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감정적인 뜨거운 신앙으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바울의 가르침처럼, 이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일치로만 주어지는 경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겁먹지 마세요. 반대로 너무 자신만만하게 생각하지도 마세요.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준비는 선물을 받을 준비 이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준비도 어느 한 가지로만 정답을 말씀드리기는 힘듭니다. 여러분의 삶이 제각각이듯이 여러분의 하나님 경험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준비가 되기만 한다면 우리의 중심을 헤아리시는 성령이 여러분의 형편에 맞추어 찾아가실 겁니다. 그 성령은 여러분을 이 세상에서 유일한 방식으로 찾아가시어 영혼의 문을 두드릴 겁니다. 그때 여러분은 문을 열기만 하면 됩니다. 시인이 언어의 영감을 얻듯이, 작곡가가 소리의 영감을 얻듯이 말입니다. 그 과정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의 깊이인 하늘이 열리는 걸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안개 낀 숲속 길에 햇살이 비쳐 안개가 걷히듯 금년에도 여러분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문이 활짝 열릴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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