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와 믿음
약 2:1-10, 14-17, 창조절 첫째 주일, 2015년 9월6일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오늘 우리는 세계교회에서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교회력에 따라 주어진 야고보서의 한 대목을 설교 본문으로 택했습니다. 이 내용은 겉으로는 간단해보이지만 실제로는 초기 기독교의 매우 복잡한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우선 약 2:14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을 테니 들어보십시오.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대단히 과감한 발언입니다. ‘당신들 그따위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어?’라는 의미니까요. 야고보서 기자는 혼자서 여유롭게 에세이를 쓰는 게 아니라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어떤 대상을 향해서 논쟁을 벌이는 중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신앙이 교회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어서 그걸 바로 잡으려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믿음이 있다고 자처하지만 그 믿음에 따른 행위가 없습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는 거라고, 더 나가서 그런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비판합니다. 야고보의 비판을 받은 상대방은 맞받아쳤을 겁니다. 당신처럼 행동을 강조하면 결국 믿음은 상대화되어 율법주의에 떨어진다고 말입니다. 어느 쪽이 옳을까요? 믿음과 행위가 각각 무엇이고,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연결되기에 같은 기독교인들이면서도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걸까요?
이것은 그렇게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요즘도 이와 비슷한 논란이 종종 벌어지곤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교회만 열심히 다니지 세상살이에서는 전혀 본이 되지 못한다는 비판도 많습니다. 그런 비판을 들을 정도로 한국교회의 신앙과 행태에 문제가 있는 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신앙이 윤리 도덕 자체는 아니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윤리 도덕이라는 것도 상황과 시대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 신앙이 그걸 목표로 해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초기 기독교에는 이것과 연관해서 서로 다른 세 가지 입장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좌파에 속한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들은 믿음 극단주의자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완전히 배제하자는 입장입니다. 둘째는 우파에 속한 기독교인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을 그대로 따르려는 기독교인들입니다. 셋째는 중도파입니다. 중도는 믿음과 행위에 각각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으려는 입장입니다. 이 중도파도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중도 좌파입니다. 이들은 행위를 무시하지 않지만 믿음에 무게를 둡니다. 여기에 바울이 속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바울과 비슷한 자리에 서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중도우파입니다. 믿음을 전제하면서도 행위를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믿음보다 행위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여기에 야고보가 속합니다. 그는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주장을 강하게 펼쳤습니다.
이런 야고보의 비판은 바울을 적대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을 상대화하고 믿음을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의 신앙 노선이 바울의 신앙 노선과 다르기는 하지만 바울을 비판의 주요 타깃으로 삼은 건 아닙니다. 그에게 주적은 앞에서 제가 앞에서 좌파로 칭한 기독교인들입니다. 이들은 ‘오직 믿음’이라는 바울 신학을 극단적으로 밀고나가 결국 율법 해체론에까지 떨어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사실에 집착함으로써 믿음에 따라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구원파가 여기에 가깝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원초적 사실에 절대적으로 묶임으로써 성숙한 기독교인의 삶과 행위와 책임은 부족하게 됩니다. 이런 신앙을 신학 용어로 표현하면 ‘값싼 은혜’라고 합니다.
‘값싼 은혜’라는 신학 개념은 히틀러에 대항하다가 순교당한 본회퍼에 의해서 언급된 것입니다. 본회퍼가 볼 때 20세기의 독일교회는 관념적인 신앙에 떨어져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라 살아가는 제자의 도리를 놓쳤습니다. 세상에서의 책임 있는 삶이 실종되었습니다. 이런 값싼 은혜에 떨어지면 히틀러의 광기도 자신들의 신앙생활과는 상관없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잘못되어도 예수 믿고 구원받는 데에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은 값싼 은혜에 잘 어울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죽어서 천당 가는 것쯤의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자본의 횡포 앞에서, 빈부격차의 심화 앞에서, 남북분단 체제 앞에서 한국교회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예수 천국’만 외칩니다. 겉으로 아무리 뜨거운 신앙인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공허하고 생명이 없는 값싼 은혜의 한 전형입니다. 야고보가 ‘그런 믿음으로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느냐?’고 질타한 신앙입니다.
야고보는 행위가 없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약 2:1 이하에서 당시 교회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었습니다. ‘회당’으로 번역된 헬라어 ‘수나고게’는 회당이라는 뜻도 있지만 기독교인의 모임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교회당이라고 번역해도 됩니다. 교회당에 금반지를 끼고 멋진 옷을 입은 부자가 들어왔고, 남루하게 차려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부자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좋은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은 무시당했고, 남의 발치자리로 밀려났습니다.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끼리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야고보가 볼 때 사람 차별은 성경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다른 율법을 아무리 잘 지켜도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면 모든 율법을 범한 것이라고 했습니다(10절). 사람 차별 문제를 아주 엄격하게 적용한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람 차별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공동체성을 파괴하는 주요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오늘 본문 뒷부분에서 가난한 사람의 문제를 다시 거론했습니다. 옷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사람에게 말로만 하나님의 평화를 전할 뿐 실제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제공하지 않으면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17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차별은 야고보가 활동하던 교회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종종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바울도 고전 11:17 이하에서 그런 문제를 다뤘습니다. 당시 성만찬은 두 단계로 실행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참여하는 애찬식(아가페)이 있고, 세례 받은 사람들만 참여하는 성찬이 있었습니다. 애찬식은 집에서 각자 장만한 것을 교회에 가져와서 함께 먹는 겁니다. 실제 식사입니다. 부자들은 자기 집에서 기름지고 비싼 먹을거리와 고급 포도주를 가져와서 자기들끼리 먼저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집에서 가져올만한 게 별로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은 먹을 게 없었습니다. 한쪽을 배부르게 먹고, 다른 쪽은 배를 곯을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고전 11:22절에서 이렇게 충고합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라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가난 문제에 대해서 신약성경 기자들이 이렇게 분명한 입장을 보이는 이유는 신학적으로 명백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은 곧 그를 창조한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창조 신학의 기초입니다. 그것을 믿고 있는 교회가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가난 문제는 부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가난한 사람이 생긴다는 것은 곧 부자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부는 구원에 걸림돌이 된다는 게 신약성서 전반에 깔려 있는 사상입니다. 돈 많은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돈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기가 훨씬 어렵다는 게 문제입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구원 받기가 더 힘들다는 사실을 제가 알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부자가 되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부자 기독교인들에게 재산에 매이지 말 뿐만 아니라 더나가서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가난한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일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 안의 문제이거나 개인 기독교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에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부의 편중과 세습, 가난한 나라와 부자 나라의 종속관계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 세계에서 권력과 돈이, 정치와 경제가 서로 맞물려서 작동됩니다. 개인들은 그런 메커니즘에 길들여집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종말론적 통치를 삶의 중심에 두는 기독교인들과 교회는 이런 문제에 저항해야 합니다. 차별 금지라는 가르침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저는 두 가지의 실제 사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남북문제입니다. 남한은 부자입니다. 북한은 가난합니다. 국력의 차이가 10대1도 넘습니다. 우리도 돈 들어갈 일이 많은데 불량국가인 북한의 가난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한단 말이야, 또는 핵무기 개발로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그들과는 상종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 5.24 조치로 인해서 북한과 우리의 경제 교류는 개성 공단 외에는 다 막혔습니다. 이런 상황은 북한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현실적으로 손해인데도 여전히 5.24 조치를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북한을 차별하고 있습니다. 금반지를 낀 부자 나라에만 잘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다른 하나는 유럽의 난민 문제입니다. 굉장히 복잡한 국제 질서가 엉켜 있어서 제가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주제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미 드러난 사실만 봐도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 터키 해변에서 엎드린 채 죽어 있는 세 살짜리 아이 사진이 전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시리아 국적의 아일란 쿠르디라는 이 아이는 가족과 함께 기아와 테러를 피해 그리스로 가려다 배가 난파되어 조수에 밀려온 것입니다. 네 가족 중에 아빠만 살았다고 합니다. 이 사진이 알려지자 유럽은 난민 수용 정책을 전향적으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단호한 입장을 취하던 영국도 난민들을 가능한 많이 받아들이겠다고 합니다.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입니다. 난민들이야말로 야고보서가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말로만 평화를 전한다면 죽은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야고보의 이런 충고를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교회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생각했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의 목회 철학도 그런 방향에 분명히 서 있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또는 사회적인 지위가 낮기 때문에 우리교회에서 차별받는 일은 없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헌금을 익명으로 드리는 제도입니다. 어느 누구도 헌금으로 인해서 특별대우를 받거나 무시당하는 일이 없습니다. 다만 교회 일을 할 때는 각자의 은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지적인 은사가 필요한 일을 아무나 맡을 수는 없습니다. 교회 밖으로 지출되는 구제비와 선교비도 전체 예산에 비해서 적은 건 아닙니다. 앞으로 가능하면 이런 항목을 늘려가는 게 좋습니다. 교회가 구제 단체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지만 구제를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에 떨어지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노력입니다.
그러나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이런 행위와 실천이 마치 구원의 도구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적인 업적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지금 야고보는 행위가 없는 믿음을 죽은 것이라고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행위가 믿음보다 상위라거나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야고보가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는 기독교의 복음을 왜곡시킨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간혹 그런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오해한 대표적인 인물은 루터입니다. 그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와 같다고 혹평했습니다. 야고보서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의 핵심 개념인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가르침에 반대되는 뉘앙스가 풍기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당시에 믿음과 행위를 동시에 강조하던 로마가톨릭교회와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야고보서를 오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앞에서 짚은 것처럼 야고보는 바울과 루터가 강조하는 믿음을 부정했다기보다는 값싼 은혜에 떨어져 있는 기독교인들을 비판한 것입니다. 그런 비판은 받아 마땅합니다. 이런 비판을 통해서 교회는 건강한 신앙을 유지하고, 회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의 설교를 통해서 야고보가 강조한 행위와 바울이 강조한 믿음이 동시에 중요하는 사실을 확인했을 겁니다. 믿음과 행위는 상호보완적인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도 깊어지고, 실제 행위도 바람직스러워야겠다고 다짐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살아도 기독교인으로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다음의 사실입니다. 행위와 믿음은 각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상호보완적인 것도 아닙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하나의 사실이 두 가지로 표현된 것뿐입니다. 그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 하나님은 절대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절대생명을 얻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 구원이 한편으로는 믿음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전자는 존재의 차원이고, 후자는 인식의 차원입니다.
이에 관해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 7:15-20절에 나오는 나무와 열매의 관계입니다. 18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여기서 좋은 나무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존재론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인간)이 된 것을 가리키고, 열매는 새로운 피조물에게서 나타나는 바람직한 삶을 가리킵니다. 이어서 나오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20절)는 말씀에 의하면 결국 행위를 강조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믿음에 대한 강조입니다.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옳게 믿는다고 생각하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향해서 당신들의 확신은 분명하게 아니라고 돌직구를 날린 말씀입니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당연하다는, 자신들이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는 그들의 확신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과연 하나님과의 관계에 충실한 것일까요? 믿는다는 말과 믿는 시늉에만 머물고 있다면 야고보의 표현대로 ‘죽은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에서는 좋은 열매가 나올 수 없습니다.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이는 행위라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좋은 열매가 아닙니다.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에서만 좋은 열매가 나옵니다.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나쁜 열매를 맺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일서 4:18절이 가리키고 있듯이 사랑 안에는, 즉 절대생명인 하나님 안에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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