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되고 무익한 것
렘 2:4-13, 창조절 첫째 주일, 9월1일
4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 모든 족속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5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6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7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 8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 9 그러므로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 이같은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라 11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12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오늘 우리는 제1독서로 렘 2:4-13절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 말씀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 즉 그의 설교입니다. 그 내용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 말씀의 배경을 따라가기는 까다롭습니다. 선지자들의 설교, 또는 신탁은 구체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나온 것이래서 그 배경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만약 저의 설교를 천년쯤 후에 접한 어떤 사람이 설교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20-21세기 대한민국이 처한 여러 가지 역사적 상황을 알아야만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레미야는 힐기야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성전의 제의를 많이 경험하면서 자랐겠지요. 제사장들은 대개 보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보수적인 종교 명문가에서 태어나서 그렇게 교육받은 엘리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고향은 베냐민 땅 아나돗입니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깝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국내외 정치 상황을 접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렘 1:2, 3절은 그가 소명을 받고 선지자로 활동하던 시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김 시대로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일 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임하니라.
여기에 세 명의 왕이 등장합니다. 요시야와 여호야김과 시드기야입니다. 요시야는 8세의 어린 나이로 기원전 640년에 유대의 왕위에 오릅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와 나이가 비슷합니다. 요시야 재위 13년, 그러니까 기원전 627년에 예레미야는 스물 한 살의 나이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습니다. 그때부터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시야 왕은 예레미야가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한 5년 뒤인 기원전 622년부터, 그러니까 그가 27세 되었을 때부터 개혁운동에 박차를 가합니다. 그게 고대 유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요시야의 개혁운동입니다.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운동이 성공했다면 유대의 역사도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을 겁니다.
요시야 왕에게 선택의 순간이 왔습니다. 유프라테스 강을 가운데 두고 남쪽의 이집트와 북쪽의 바벨론이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두 나라는 모두 당대의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제국이었습니다. 당시의 유대가 처한 상황은 마치 일본과 중국, 또는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끼어서 우왕좌왕 했던 이씨조선 말기의 형국과 비슷합니다. 요시야는 바벨론 편에 섰습니다. 유프라테스 강으로 밀고 올라오는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와 맞붙었습니다. 요시야에게 무슨 베짱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버티면 바벨론이 내려와서 구해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 전쟁에서 요시야는 전사했습니다. 그때가 개혁을 시작한지 13년 밖에 되지 않은 기원전 609년입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서른아홉 살이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는 자기 마음대로 요시아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키고 그의 동생인 여호야김을 유대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자기 말을 잘 들을 사람을 왕으로 세운 겁니다. 여호야김은 왕의 자질이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위 구절에 두 번째로 언급된 유대의 왕입니다. 그렇게 억지로 나라가 굴러가다가 결국 위 본문에서 세 번째로 거론된 시드기야 재위 11년, 그러니까 요시야가 전쟁터에서 허무하게 죽은 지 22년만인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습니다. 왕족을 비롯해서 귀족들과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모두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고 유대 땅은 바벨론 총독이 와서 다스렸습니다. 이제 나라가 없어진 겁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이 시기에 4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입니다. 그의 나이 20대 초로부터 시작해서 60대 초까지 이어졌습니다. 정서적으로 예민하고, 시대를 보는 눈이 남다르게 명민했던 예레미야는 불운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운명을 예감했습니다. 남이 눈치 채지 못한 민족의 어떤 불행을 미리 내다본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이는 마치 자기 가족이 치료 불가능한 말기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의사의 심정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눈물의 선지자라는 말이 붙어 다닙니다.
더 큰 고통은 조국의 암담한 운명을 감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주민들은 예레미야의 설교를 들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주민들은 모두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키고 축복해주신다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도 여전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며, 결국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설교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살아있을 때는 아무도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선지자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고독한 선지자였습니다. 바벨론의 간첩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는 한 평생 마음 편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가 개인적으로는 불운했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설교는 유대인들의 영혼에 살아남았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예레미야의 설교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오늘 기독교인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예레미야가 구체적으로 무슨 설교를 했는지 알아봅시다. 이미 앞의 이야기를 통해서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을 겁니다. 예레미야는 나라의 꼴이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렘 2:5절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했다는 말은 일종의 언어유희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그들은 헤벨을 따른 결과 헤벨이 되었다.” 공허한 것을 따라갔기 때문에 결국 공허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헤벨이라는 단어는 풍요의 신(神) 바알을 연상시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자신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겼다는 비판으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8절에서는 이것이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
여기에 열거되는 인물들은 모두 유대의 지도자들입니다. 제사장, 율법학자, 관리들(목자), 선지자들이 그들입니다. 주로 종교적인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바알이 제공하는 풍요에만 마음을 두었습니다. 유대 민중들도 그것만을 요구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보기에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악이었습니다.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예루살렘 주민들은 예레미야가 자신들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비판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일리가 있는 생각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의 삼대절기인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도 잘 지켰습니다. 아무리 시국이 어렵고 국제 정세가 어수선해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신다는 믿음도 여전했습니다. 그들에게 예레미야의 설교는 공연히 트집을 잡는 것처럼 들렸을 겁니다. 그러나 선지자 예레미야는 전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유대는 지금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처럼 헛된 것을 따른다고 말입니다. 누가 옳을까요?
고대 유대인들이 바알을 섬겼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유대 역사에서 수많은 선지자들이 바알을 섬기지 말라고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그 말은 곧 유대인들이 반복적으로 바알을 섬겼다는 뜻입니다. 그게 이상하게 보일 겁니다. 하나님이 출애굽을 비롯해서 40년 동안 광야생활 중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지켜주셨다는 사실을 그들이 잘 아는데도 불구하고 왜 가나안의 토착신인 바알을 섬기느냐고 말입니다. 이상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광야생활에서 큰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가나안에 정착하면서부터는 그런 경험이 시시해졌습니다. 광야에서 생존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의 심리입니다. 변소 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는 속담과 비슷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광야의 유랑생활을 거쳐서 이제 가나안으로 들어가 보니 세상이 완전히 달라보였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농사를 통해서 부가 축적되었습니다. 각종 문화와 축제 등도 발전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눈에 가나안 사람들의 삶은 부러워할만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60,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 간 분들의 기분이 어땠는지를 보면 됩니다. 재래식 변소를 사용하던 사람이 수세식변소를 사용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가나안 사람들처럼 넉넉하게 살고 싶어졌습니다. 가나안에서 잘 살려면 가나안사람의 삶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들의 문화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거기에는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도 포함됩니다. 풍요를 약속하는 바알이 바로 그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이런 바알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때는 예루살렘 성전 안의 한 곳에 바알 신상을 세워놓을 정도였습니다.
바알숭배가 왜 문제일까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좀 잘 살면 안 될까요? 잘 살고 싶은 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 욕구를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풍요의 유혹에 빠져들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나님을 잘 믿어서 물질적으로 복을 받아서 잘 사는 사람들도 많더라, 청교도들이 세운 미국을 봐라, 대통령이 성경에 손을 얹고 대통령 서약을 하는 나라답게 믿음도 좋고 잘 살기도 하지 않느냐, 하고 반문하고 싶으신가요?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하나에만 둘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보십시오. 물질적인 풍요에 영혼이 기울어지면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말할지는 몰라도 영혼으로 하나님을 찾지는 못합니다. 예레미야가 앞에서 인용한 8절에서 제사장, 율법학자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고 지적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가난뱅이로 살아야 한다거나 물질에서 완전히 초연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재물 없이 세상을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거기에 영혼을 걸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게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연스럽게 물질에 영혼을 거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오늘의 시대가 이런 삶의 한 전형이라는 사실을 제가 더 이상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것을 가리켜 헛된 것이며 무익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근거가 있는 말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을 잘 믿으라는, 교회에 잘 나오라는 종교적 충고일까요? 더 나가서 풍요의 신인 바알을 섬기는 것이 바로 유대 멸망의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이 모든 질문에 제가 일일이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헛되고 무익한 것이라는 사실만 설명하면 다른 것에 대한 대답도 거기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핵심은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과 현대인들은 똑같이 물질적인 풍요가 바로 생명을 얻는데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속된 표현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래서 문화적으로 세련되게 사는 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많은 걸 생산하고 많이 소비하고, 유통산업을 발전시키고, 경쟁력으로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실컷 먹고 쓰다가, 그리고 죽을 겁니다. 죽기 이전에 이미 그런 생산과 소비 중심의 삶 자체에서도 참된 삶의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삶을 가리켜 헛된 것, 무익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사람이 생산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유일한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만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만 순종하라고 외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 하나님의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분에게서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은 생명의 유일한 길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그 어떤 풍요로운 삶을 통해서도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이 거기서 극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허투루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인식하고 경험했다면 무엇이 헛되고 무익한 것인지가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헛되고 무익한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것들은 그런 정도의 수준에서 좀 쉽게 처리하십시오. 거기에 영혼을 걸어두지 마십시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참된 생명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그 놀라운 사건에 참여함으로써 선물로 받습니다. 아멘.
* 설교듣기는 서울샘터교회, 설교보기는 대구샘터교회의 예배입니다.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