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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혼돈 속에서… (창 1 : 1 – 5, 31)

2025년 8월 31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00Jig8CIOXs?si=786Gbzmb4doFIowr

▣ 들어가는 말

- 두 개의 창조 이야기

성서 창세기에는 두 개의 창조 이야기가 있습니다. 1장(1:1-2:4)의 창조 이야기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 기원전 6세기경 제사장 집단이 정리한 “제사장 문서(P 문서)”이고, 2장(2:4-25)의 창조 이야기는 “야훼 문서(J 문서)”로 불리는데, 남유다 왕국의 초기(기원전 10세기 무렵)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 창조 이야기는 각자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창세기 2장은 다윗이 왕 위에 올라 국가 체제가 안정돼 가던 때로 추정됩니다. 사사들의 시대를 지나, 혼란기를 거쳐 드디어 통일 왕국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사람들의 삶이 비교적 안정을 찾아갈 때,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려 했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어떤 모습으로, 어떤 방식으로 경험했을까요. 창세기 2장에 나타난 창조 이야기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농경 사회 속에서 하나님을 땅과 생명의 근원으로 보는 인식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문체가 서사적이고 인간적입니다. 하나님을 “여호와”(야훼)라 부르며, 하나님이 직접 흙을 빚고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을 지으십니다. 아울러 마치 에덴동산을 정성스럽게 가꾸는 농부의 모습처럼 친밀하게 표현하지요. 당시 사람들에게 강력한 전쟁의 신이 아니라, 안정되고 평온한, 세심히 마음을 살피고 위로하는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창조 신화를 가지고 있었던 그들은 왜 또 다른 창조 이야기가 필요했을까요. 세상의 시작을 다르게 설명해야만 하는 절박한 사정이 있었던 것 아닐까요. 신학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그 시대의 아픔과 주제를 반영하지 못하고 그저 옛이야기로 전락하게 될 때, 하나님은, 신학은 새로운 메시지가 필요했던 것 아닐까요. 말씀과 신앙은 시대정신을 담을 수 있도록 새롭게 갱신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1장의 창조 신화는 시기적으로 첫 창조 신화보다 약 400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유대는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번영하던 나라는 모든 면에서 쇠퇴하고 결국은 국가와 영토, 신앙마저 무너져버립니다. 말 그대로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는’ 상황에 빠지고 만 것이지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국가와 민족이 그렇게 생겨났다가 사라져갔던가요. 한 개인의 삶이 그러하듯, 나라도 생로병사를 겪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것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져 버릴 위기를 겪고 있었던 것이지요.

‘바벨론 포로기’라는 유대민족 최대의 고난과 혼란을 경험하며 그들은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고, 잃어버린 나라를 찾아야 하며, 무엇보다 신앙을 지켜내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영원히 사라질지, 살아남을지 결정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은 새로운 창조 이야기를 써 내려갑니다. 1장에서 “하나님을 세상의 주권자이시며, 혼돈 속에서 질서를 세우시는 분”으로 표현합니다. 문체도 매우 질서정연하지요.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표현을 반복하며 말씀의 권위를 세웁니다. 6일 동안 창조하고 제7일에 안식하는 것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근거가 마련됩니다.

 

 

▣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 태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1-2)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우주의 기원, 세계의 시작을 말하려 하는 걸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기원전 6세기 바벨론 포로기 동안 기록된 것입니다. 나라를 잃고, 고향 땅에서 직선거리로 900km, 이동 경로로 보면 1,600km, 당시 포로와 군대의 이동 속도 등으로 추정해 보면, 최소 3~4개월이 걸리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노예의 삶을 사는 이들의 고뇌에 찬 물음이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라는 철학적 질문이라는 것은 선선히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리그베다(Rigveda)는 기원전 1500년~1000년경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로 신들에게 드리는 노래와 기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찬가이자, 힌두교 사상과 인도 철학의 뿌리가 되는 문서 중 하나입니다. 종교학적으로 성경의 창세기, 그리스의 헤시오도스 신화 등과 함께 인류의 우주 기원 신화 전통을 비교할 때 자주 언급되지요. 리그베다 제10권 129절은 유명한 “나사디야 수크타”(창조 찬가)인데, 1–2행은 우주와 존재의 기원에 대한 가장 오래된 시적·철학적 성찰 중 하나입니다.

“그때에는 존재도 없었고, 비존재도 없었다. 공간도, 하늘도, 그 위의 영역도 없었다.

무엇이 그것을 덮고 있었는가? 어디에 있었는가? 깊고 깊은 심연 속에 물이 있었는가?”

‘존재도 비존재도 없었다’라는 말은 단순히 “무(無)”를 뜻한다기보다, 개념적 범주 이전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무엇이~ 있었는가’ ‘어디에 있었는가’ 등은 세상의 기원, 존재의 기원 등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며, 결국은 “알 수 없음” “인간의 한계” “무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단한 통찰입니다. 그리고 “깊고 깊은 심연 속에 물이 있었는가?”라는 표현은 창세기 1:2의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는 표현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이러한 리그베다의 우주관은 존재와 비존재를 넘어서는, 단순한 신화적 설명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인류의 근원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지요.

 

 

▣ 혼돈이란 무엇인가?

- 에누마 엘리쉬

1849년 영국의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된 고대 아시리아의 토판문서가 충격을 주었습니다. 쐐기문자로 기록된 그 토판문서의 내용은 “에누마 엘리쉬”라고 불리는 메소포타미아의 창조 신화였는데, 그것이 창세기의 내용과 비슷했던 것이지요. 그것은 기원전 12~8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첫 번째 토판 1~9행은 창조 이전의 혼돈 상태를 묘사합니다.

“위로 하늘이 아직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고 아래로 땅이 이름으로 기억되지 않았을 때,

최초의 아프수(담수/심연)와 티아마트(염수/바다)가 섞여 있었다.

그때에는 들판이 형성되지 않았고, 갈대밭도 찾을 수 없었다.

어떤 신도 나타나지 않았고, 어떤 이름으로도 불리지 않았고,

운명도 정해지지 않았을 때, 그때 신들이 창조되었다.”

여기서 하늘과 땅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세상 전체, 우주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대상의 개념을 언어로 포착해야 인식할 수 있으니, 이름이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결국,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 아프수와 티아마트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대 바빌론에서는 1년에 한 번, 춘분에(3월 21일) ‘아키투’라고 하는 축제가 열립니다. 축제일 이전은 죽음과 혼돈을 뜻하고 축제 이후는 생명과 창조를 뜻하지요. 이 축제는 12일 동안 진행되는데, 넷째 날 밤에 ‘에누마 엘리쉬’가 상연되지요.

티아마트는 혼돈의 여신으로 바닷물을 상징합니다. 아프수는 남신으로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즉 담수를 상징하지요. 메소포타미아는 이 두 강이 주는 생명력으로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대가 낮아 바닷물이 역류하게 되면 즉, 티아마트가 염수를 끌고 오면, 농사는 망쳐지고 가뭄이자 기근이며 죽음의 세계가 되는 것이지요.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 평가받는 이들은 이러한 담수와 염수가 교차하는 자연의 도전과 싸우며 도시를 만들어 조직적인 수로 공사를 시작하지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초기 왕들은 바로 이 수로 공사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번영은 바로 이 물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으니 말입니다.

“최초의 아프수(담수/심연)와 티아마트(염수/바다)가 섞여 있었다.” 이것은 아프수가 상징하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그리고 티아마트가 상징하는 바닷물이 하나로 엉킨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인 번영할 수 없었던 상태를 창조 이전 상태로 본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생각한 창조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우주의 기원이 아니라, 인간의 삶, 인간의 번영이 시작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에는 들판이 형성되지 않았고, 갈대밭도 찾을 수 없었다.” 들판은 농경을 의미하고 갈대는 문자를 상징합니다. 그러니 그들이 생각한 창조 이전, 혼돈은 물을 관리하지 못하고 문자(지혜)를 갖지 못했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창조는 문명의 시작, 지식의 시작, 생명의 시작이라고 인식한 것이지요.

 

- 혼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성서의 P 저자 역시 이러한 고대의 창조 신화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혼돈하고 공허하다’라는 표현은 기원전 6세기 바빌론에 끌려와 포로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심정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무참히 파괴되는 것을 목격합니다. 수많은 동족이 목숨을 잃습니다. 아이들이 버려지고, 여인들은 강간을 당하고, 노인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갑니다. 번창하던 도시와 거리에는 허물어진 건물들과 전쟁으로 죽은 시신들, 사체를 먹는 동물들… 온갖 모욕과 폭력, 굶주림 속에서 머나먼 길을 걸어 바빌론 땅으로 옵니다. 강제노역과 배고픔, 채찍질… 그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강 가에 앉아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죽임을 당한 가족이나 동료들, 두고 온 고향 땅과 집,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들, 함께 드리는 제사… 더 이상 울 힘도 남아 있지 않고, 표정을 잃어버린 얼굴과 초췌해진 몰골, 어떤 희망도 꿈도 사라진 오직 절망만 가득한 상태… 그들은 이것을 “혼돈”과 “공허”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 창조란 무엇인가?

- 에누마 엘리쉬의 창조 : 혼돈 - 폭력

창조와 질서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합니다. 이곳은 잡초가 무성하고 사나운 동물들이 득실거리며 불법과 살육이 판치는 거대한 황무지입니다. 성서의 저자는 혼돈과 공허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상태가 아니라 질서의 신과 혼돈의 신이 우주 탄생을 위해 전쟁을 치르는 곳으로 봅니다.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표준새번역) 성서가 표현하고 있는 혼돈에 대한 설명입니다. 혼돈에 대한 가장 쉬운 표현이 ‘어둠’이지요. ‘깊음’은 ‘심연’을 뜻하는데,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는 ‘테홈’입니다. 그런데 이 테홈은 ‘에누마 엘리쉬’에 나오는 ‘티아마트’와 어원적으로 같습니다. 앞서 설명하였듯, 티아마트는 혼돈의 여신입니다. 후에 질서와 창조의 신 마르둑과 싸움에서 패배하게 되지요. “어둠이 깊음 위에 있다”라는 것은 사방에 온통 어두움뿐이고 그 아래에는 혼돈의 화신이자 거대한 바다의 여신 티아마트가 있다는 것입니다.

‘에누마 엘리쉬’ 다섯째 토판에는 신들의 전쟁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조와 질서의 신 마르둑과 혼돈의 여신 티아마트가 전쟁을 벌이지요. 마르둑은 바람과 그물, 활과 화살, 번개와 같은 무기를 갖추고 티아마트와 맞섭니다. 티아마트는 괴물들을 만들어 자신을 지키지만, 마르둑의 신적 무기 앞에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르둑은 거대한 그물로 티아마트를 가두고, 바람으로 그녀의 입을 벌려 활을 쏴 티아마트의 심장을 꿰뚫어 버리지요. 전쟁은 끝나고 세계는 질서와 안정을 되찾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고대인들의 세계관에서 창조는 단순히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혼돈을 정복한 결과입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세상은 항상 혼돈의 위협 속에 있으며, 질서는 강력한 힘으로 지켜내야 한다는 정치적 종교적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창조는 평화로운 조화의 산물이 아니라 신적인 폭력과 전쟁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 말씀과 선함

성경의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질서 있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표현이 창조의 순간마다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굉장한 무기와 강력한 폭력으로 혼돈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언어, 말씀이 창조의 힘입니다. 그 어떤 물리적인 힘보다 강력한 것은 선함과 사랑의 언어입니다. 인간은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지음 받은 존재이지요. 신의 형상을 지닌 존귀하고 고귀한 존재입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에서 혼돈과 폭력은 세계의 근원적인 힘이며, 인간은 그 속에서 신을 섬기는 종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론적 위치는 매우 낮습니다. 인간은 신의 노예지요. 그래서 노동은 신에게 바치는 강제노역과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에서 창조는 다신론적 투쟁의 결과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자유롭고 선한 의지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창조의 모든 과정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로 평가됩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신의 선한 창조물이라 선언합니다. 그중에서 특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단순한 노예가 아니라 세상의 대표자이자 돌봄의 책임자로 세워졌습니다. 노동은 신의 짐을 대신하는 노예적 굴레가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세상을 돌보는 청지기적 소명입니다. 아울러 창조의 완성은 제7일 안식으로, 인간 존재가 단순히 노동이나 기능에 묶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안식을 누림으로 충만해진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 나가는 말

- 창조의 의미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단순한 기원 신화가 아니라, 하나님과 세계,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혼돈과 맞서 싸우는 분이 아니라,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절대 주권자입니다. 세계는 폭력적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뜻에 따라 창조된 것입니다. 또한, 인간은 신의 노예가 아니라, 신의 형상을 지닌 존엄한 동반자이자 청지기이지요. 창조의 목적은 노동의 굴레가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분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바빌로니아 제국에서 끔찍한 고통과 강제노역, 어떤 것도 바랄 수 없는 그저 견디며 사는 당시 유대인에게 이러한 메시지는 얼마나 큰 위로와 희망이 되었을까요. 이방 제국의 노예가 아니라 신의 형상을 지닌 신의 동반자라는 정체성. 이 지옥과 같은 세상이 실은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답고 귀한 세상이라는 것. 비록 지금은 우리의 잘못으로 이런 모습이 되었지만, 그분을 믿고 신뢰하면 결국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준 것이지요.

 

- 혼돈 앞에서

혼돈을 마주하는 시선들을 봅니다. 리그베다의 “존재도 비존재도 없었다” “누가 알겠는가?” 등의 구절을 통해 우리는 알지 못함의 겸허. 신비 앞에서 서두르지 않고, 함부로 이름 붙이지 않는 태도를 배웁니다. 우리 앞에 펼쳐진 혼돈과 고난과 고통 앞에서 우리는 종종 함부로 이유와 원인을 규정하고 낙인찍으려 합니다. 자신과 타인을 더욱더 고통스럽게 하지요. 그러나 고대인들의 지혜를 통해서 우리는 신비 앞에서 겸허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창세기는 “빛이 있으라” 하나님은 말씀으로 혼돈을 질서로, 공허를 풍성으로 바꾸십니다. 무/혼돈은 단순한 공허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배경입니다. 혼돈 속에서 창조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해서 혼돈에 질서를, 어둠에 빛을 창조하시는 힘이라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부여합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모든 것이 아름답다, 선하다는 확정으로 이어집니다. 성경은 혼돈 앞에서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하는지 말합니다. 겉보기에 아무리 초라하고 절망스러운 상황, 모습일지라도 ‘너의 존재가 얼마나 존귀하고 아름다운 존재인지 믿으라.’라는 것입니다. 절망과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라는 것이지요.

현대 철학자 샤르트르는 “인간은 세계 속에 ‘무(없음, 결여)’를 끼워 넣는 존재이며, 자유를 떠맡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 “무-없음-결여”로 인해 인간은 방황하고 고뇌하고 혼돈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기에 자유를 누리는 놀라운 존재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그 자유를 혼돈의 세계에 질서를 만드는 방식, 어둠에 빛을 비추는 방식, 폭력이 아닌 사랑의 방식으로 드러내야 하는 책임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것이 세계의 혼돈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닐까요.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 세계를 꿈꿉니다.

주님,

신비 앞에 서두르지 않는 겸허를 주시고,

말씀으로 우리의 혼돈을 형상으로 빚어 주소서.

우리의 자유가 변명이 되지 않게 하시고,

타자를 살리는 사랑과 책임으로 쓰이게 하소서.

오늘도 “빛이 있으라” 하신 그 음성에

아멘으로 응답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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