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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환상와 현실, 2월6일

2005.2.6.        
마태 17:1-9

제목 환상과 현실

예수의 변형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고 합니다. 왜 산에 올라가셨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습니다. 예수님은 주로 평지인 갈릴리 호수 주변, 특히 가버나움, 그리고 사마리아와 유대,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셨습니다. 회당, 시장, 잔칫집 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간혹 한적한 곳에 가시어 기도하는 일은 있었어도 사람들을 일부러 피해서 혼자 수행하는 일에 몰두하지는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을 떠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3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신 것입니다. 잘 알려져 있는 대로 그때 예수님은 사탄에게 받은 세 가지 유혹을 물리치시고 본격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 뒤로 예수님은 조금의 쉴 틈도 없이 사람들과 접촉하셨습니다. 사람들을 만나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설교하셨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시던 분이 단지 기도하기 위해서 한적한 곳을 찾은 정도가 아니라 이렇게 높은 산에 오르셨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사건입니다.
마태는 산에 오르신 예수님의 모습이 변했다고 진술합니다.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는 것입니다(2절). 이런 표현이 얼마나 사실적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문학적인 수사를 단순히 사실적 묘사로 받아들일 수는 없으니까요. 다만 해처럼 빛나는 얼굴, 빛과 같이 눈부신 옷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예수의 형체가 제자들에게 특별한 현상으로 나타난 것만은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제자들은 무슨 경험을 한 것일까요?
여러분은 간혹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볼 수 있지요?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지만 그 사람들은 좀 흐릿하게 보이고 단 한 사람만 또렷하게 나타나는 그림이 있습니다. 특히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가 재회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다룰 때 그런 촬영 기법이 자주 사용됩니다. 아마 그들에게는 자신이 그리워하고 있는 사람이 빛나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평범한 모습이지만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그 특별한 대상이 빛나는 모습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도 자주 일어납니다. 늘 평범하게 보이던 이 세상이 빛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경험하는 것 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의 모습을 빛으로 경험했다는 사실은 뒤이은 사태의 변화에서 더 확실해집니다. “그리고 난데없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3절).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모세와 엘리야가 어느 시대 사람입니까? 모세는 높은 산 사건이 있기 1천2백 년 전 사람이며, 엘리야는 8백 년 전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이스라엘 역사에서 놀라운 카리스마를 보인 인물들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모세와 엘리야가 행한 기적들을 행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모세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완성시킨 인물로서 산에서 내려올 때의 모습이 너무 눈이 부셔서 사람들이 쳐다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불수레를 타고 승천했다는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모세의 빛과 엘리야의 불은 모두 일상을 초월하는 사건과 그런 경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두 사람은 모두 무덤이 없습니다. 모세는 마지막 순간에 설교를 한 다음 종적을 감추었으며, 엘리야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승천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모세와 엘리야 전승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높은 산에 오른 제자들은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자기들의 스승인 예수가 모세나 엘리야의 환생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이미 마16:13 이하에서 예수에 대한 여러 풍문이 언급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혹은 위대한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도 역시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늘 지니고 생활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오늘 높은 산에 올라와서 그들은 뜻밖의 경험을 했습니다. 예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이 빛처럼 눈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녔던 모세와 엘리야가 현현한 것 같은 경험까지 했습니다.

초막 셋
예수님의 진지한 삶 속에 베드로는 코믹한 상황을 연출하고 했습니다. 호수 위를 직접 걷겠다고 나선 일이며, 예수님이 체포당하시든 순간에 칼을 빼어든 일이며,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일들이 그렇습니다. 오늘 사건에도 역시 베드로의 그런 기질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는 전혀 새로운 경험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불쑥 이렇게 내뱉습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제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하고 말했다고 합니다(4절).
보기에 따라서 베드로의 이런 제안은 기특한 점이 있기는 합니다. 이런 제안에는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열정만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베드로의 행동은 그렇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그곳에서 지내는 게 좋다는 생각이 예수님의 뜻과는 거리가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했다는 것은 역사 너머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세계에 매력을 느낀다는 건 부분적으로만 옳습니다. 종교는 자칫하면 비현실로 떨어질 염려가 다분합니다. 우리가 보통 ‘천당’이라고 말하는 그런 장소에 대한 열망이 현실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면, 그래서 역사 허무주의에 빠진다면 기독교 신앙을 훼손시킬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이 제안에 담긴 또 하나의 한계는 그가 예수님을 모세나 엘리야와 병치시켰다는 데에 있습니다. 초막 셋을 지어 각각 세 사람에게 나누어준다는 발상은 곧 이 세 사람을 비슷하게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마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마음에도 그런 생각이 늘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의 스승이 바로 모세였으면, 혹은 엘리야였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예수님이 제2의 모세, 제2의 엘리야만 된다고 하더라도 제자들에게는 자랑거리일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이었습니다. 정치적 영웅, 민족 해방의 영웅이었습니다. 늘 약소민족으로 서러움을 당하던 그들이 제2의 모세를 기다린다는 건 당연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이런 정치적 영웅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겠지요. 엘리야는 초자연적 능력의 대표자입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 기독교 신앙을 이런 초자연적 능력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불치병이 낫는다거나 부도 직전의 기업이 기적으로 회생하는 일들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초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발상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빛의 소리
베드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런 말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5절). 이 장면에서도 역시 ‘빛’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수, 모세, 엘리야가 말하는 장면은 곧 빛나는 구름으로 뒤덮였습니다. 빛나는 구름에 의해서 제자들의 환상이 허물어지면서 이제는 어떤 ‘소리’를 듣습니다. 시각적인 환상에서 이제 청각의 환상으로 어떤 경험들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이 소리가 오늘 사건의 근본적인 의미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표현은 난외주가 가리키고 있듯이 시편 2:7의 인용입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명제는 초기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에 토대가 됩니다. 비록 구약에서 이런 표상들을 빌려오기는 했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 때문에 기독교가 역사에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 사실 때문에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를 예수님과 동렬에 놓으려는 모든 시도는 기독교에서 제거되었습니다.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서 초막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발언이 예수님에 의해서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는 다른 절충이나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우리가 이런 사실을 어떻게 변증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는 ‘믿음’으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무조건 믿을 수는 없는 거 아닐까요? 왜 믿을 만 한지, 믿을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먼저 믿는 우리가 증명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물론 기독교가 말하는 증명한다는 게 실험실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학적 논의에서, 또는 우리 믿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에서 그런 것들이 나타나야 하겠지요.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인의 삶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늘 자기를 성취하는 것에만 머물러 있거나 자기감정에만 치우쳐서 살아갑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자기 삶에서 증명하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우리의 노력이 그런 일들을 단번에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통해서 부분적으로라도 그런 일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환상 이후
빛나는 구름과 거기서 들려오는 어떤 소리 때문에 제자들은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두려워서 땅에 엎드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손으로 어루만지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모두 일어나라.”(7절).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이런 두려움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이 말은 무섭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현상 앞에서 느끼게 되는 일종의 ‘놀라움’입니다. 우리가 금강산에 가면 그 아름다움에 놀라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에게는 제자들을 일상으로부터 끌어내는 그런 두려움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가장 결정적으로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경험으로 해석할 수 없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 앞에서 두려워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고개를 들어 예수님을 쳐다보자 “예수밖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8절).
과연 그 시간에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이 빛처럼 눈부셨다고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빛나는 구름이 제자들을 휩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을 예수님이 진정시키셨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쳐다보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제자들은 꿈을 꾼 건가요? 예수님에게 너무 심취한 탓에 환상을 본 것일까요? 아니면 실제로 그런 현상이 그곳에서 벌어진 걸까요?
여기서 우리가 실체적 진실을 찾아낸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이런 환상적인 일들이 거의 일반화했을 뿐만 아니라 성서가 말하려는 것도 역시 이런 신화적인 요소보다는 그것의 리얼리티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구절을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흡사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에나 나올만한 휘황찬란한 현상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현실의 예수만 남았다고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이들에게 꿈의 세계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더욱이 빛나는 구름 속에서 들렸던 소리는 이들에게 거룩한 기억이며, 기다림이며, 그래서 희망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아무리 역동적이고 절실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에는 오직 역사적 예수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는 곧 이 역사 안에서 예수님을 경험하고 함께 살아가는 게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렇지만 이런 환상이 없다면 우리의 현실은 삭막해집니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 너머에 있는 세계를 꿈꾸면서, 동시에, 아니 더욱더 우리는 말짱한 정신을 갖고 이 현실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의 내용을 충실하게 채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완성될 날을 기다릴 뿐입니다.
마태복음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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