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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환상을 보는 사람들 (행 16:6-15)


환상을 보는 사람들

사도행전 16:6-15, 부활절 제6주, 5월5일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1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2천 년 전에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그 복음이 2천 년 후에 극동의 한반도에까지 전파되리라는 걸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복음이 제자들에게서 끝나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유대교와 로마제국 사이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중입니다. 마치 눈바람이 세차게 부는 밭에 심겨진 모종과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어떤 힘에 끌렸는지 정력적으로 복음을 세상에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역사에서 계속되었습니다. 그 선교 역사의 결과가 오늘의 세계 기독교입니다. 여기에 헌신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울입니다. 그의 선교 사역 중에서 의미심장한 대목이 오늘 설교 본문으로 선택한 행 16:6-15절에 나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시리아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3차에 걸쳐서 선교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1차에서는 바나바와 사이좋게 선교 사역을 마쳤습니다. 다시 선교 사역을 떠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마가 요한의 처리 문제였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동행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바울은 반대했습니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갈라섰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떠났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것이 2차 선교사역의 시작입니다.


바울은 소아시아 지역에서 나름으로 성실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어려워졌습니다. 그게 바나바와의 갈등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행 16:6a절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래서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역으로 갔습니다. 무시아 앞에서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지만 또 일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7) 뭔가 어려운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것을 본문은 성령이 전하지 못하게 했다거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바울의 선교 사역을 방해한 사건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몇 가지의 추론이 가능합니다. 첫째, 바울의 건강일지 모릅니다. 바울은 병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지병도 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치의인 누가가 수행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둘째,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원래 자비량 선교를 원칙으로 했습니다. 전업이 아니라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다보면 재정적인 문제로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셋째, 유대교나 로마 정권으로부터의 박해가 어려움의 이유인지 모릅니다. 넷째, 내부의 알력이 결정적인 문제였을지 모릅니다. 유대 기독교와의 충돌이 그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다른 문제들은 마음만 단단히 먹으면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유대 기독교와 이방 기독교는 로마가톨릭과 개신교처럼 모두 똑같이 초기 기독교였습니다. 양쪽 모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유대 기독교는 유대교의 토라와 할례를 여전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방 기독교는 그것을 거부합니다. 그런 차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심해졌습니다. 일종의 힘겨루기 양상으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유대 기독교의 주장을 ‘다른 복음’으로 부르면서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저주가 임하기를 바란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과격한 발언입니다. 빌립보 3장에서는 그들을 가리켜 육체를 신뢰하는 개와 같다고 비난했습니다. 수사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바울이 바울답지 않게 거친 발언을 한 이유는 나름으로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한 곳에 유대 기독교가 대표자들을 보내서 바울의 복음이 충분하지 않다고 훼방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터키 지역인 소아시아 지역에서 같은 기독교 세력끼리 충돌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인간적인 약점까지 물고 늘어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볼품없이 생겼다거나, 말을 잘 할 줄 모른다거나, 사도권이 없다고 말입니다. 신학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감정적인 문제까지 얽혀든 겁니다. 그 사이에서 일반 기독교인들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바울의 속이 터졌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게 최선일까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대처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싸울 겁니다. 자신이 먼저 복음을 뿌린 지역이니까 자신에게 기득권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적당하게 타협합니다. 자신의 신학적 소신을 굽히든지 아니면 일부의 영역에서만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 겁니다. 바울은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에 머물러서 이전투구 식으로 싸우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이 신학적으로 옳은 것은 분명하지만 더 이상 다투지 않고 자리를 피했습니다. 유대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는 소아시아를 포기하고 이제 바다를 건너 마게도냐 지역으로 가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가리켜 사도행전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환상 이야기로 전하고 있습니다. 9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마게도냐는 고대 그리스의 북쪽 지역을 가리킵니다. 지금은 그 일부 지역이 마케도냐라는 나라로 독립해 있습니다. 고대 마게도냐는 지중해의 에게해(海)에 접해 있었지만 지금은 내륙으로만 되어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 마게도냐 사람이 바로 바울의 주치의인 누가라고 봅니다. 지금 우리는 그 장면을 정확하게 재현해낼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바울(일행)이 이제 갈라디아와 소아시아를 포함한 지중해 동편 지역을 포기하고 이제 바다를 건너 마게도냐로 선교지역을 바꾸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그들은 심각하게 고민하고, 수십 번 회의하고, 기도했을 겁니다.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은 바울이 자기 인생을 쏟아 부으면서 순전한 복음으로 세운 교회들입니다. 그 지역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 지역의 신자들을 모두 유대 기독교의 세력권에 맡긴다는 뜻입니다. 바울 일행을 계속 붙들어두고 싶어 하는 신자들도 많았겠지요. 그들은 바울에게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하는 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일까요?


그들의 결정이 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마게도냐로 사역지를 옮기겠다고 결정난 뒤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들은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로 가서 다음날 네압볼리에 닿았습니다. 네압볼리는 빌립보로 가는 길목의 항구도시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육로를 통해 그 유명한 빌립보에 들어갔습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고, 로마의 직할 식민지였습니다. 빌립보에서 첫 여성 세례 신자가 배출되었습니다. 자색 옷감 장사를 하는 루디아였습니다. 그녀는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유숙할 수 있도록 편의를 베풀었습니다. 재정적으로 후원했다는 뜻입니다. 이후로도 빌립보 교회는 꾸준하게 바울의 든든한 후원 교회가 되었습니다. 훗날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가 신약성경으로 선택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설립은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빌립보 교회 자체가 유럽의 첫 교회이고, 빌립보 교회의 설립으로 인해서 이제 복음이 유럽으로 전파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이 사소해보일지 몰라도 역사의 터닝 포인트, 즉 변곡점입니다. 그 순간을 계기로 역사에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역사도 그렇고 개인의 인생도 물 흐름과 비슷합니다. 물 흐름에 삽질 하나로 방향을 조금만 바꿔주면 그 물길이 큰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작은 사건이 흐름 전체를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인생살이에서 늘 경험할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오늘 이렇게 함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이 여기에 모인 그 전환점이 어디 있었는지 돌아보십시오. 대개는 아주 사소한 사건일 겁니다. 우연하게 신문, 잡지, 책, 인터넷을 보았다거나, 지인과의 전화 통화를 했다거나, 이런 작은 일들이 계기가 되어 샘터교회를 알게 되었고, 새로운 신앙 세계로 들어섰습니다.


바울이 선교 지역을 마게도냐로 변경하게 된 계기는 환상입니다. 본문은 밤에 바울이 환상을 보았다고 합니다. 바울이 본 환상은 헬라어로 호라마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vision, sight, 또는 something seen이라고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호라마는 스데반의 순교 설교인 행 7:31절에도 나옵니다. 스데반은 모세가 본 광경, 즉 시내(또는 호렙)산 가시나무 떨기 불꽃 현상을 호라마라는 헬라어로 설명했습니다. 호라마를 반드시 초자연적인 것으로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세가 본 불붙은 가시떨기 불꽃은 ‘엘모의 불’이라는 자연현상입니다. 일종의 정전기와 비슷한 현상입니다. 모세는 그 현상에서 거룩한 체험을 한 것입니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인데, 어느 순간에 신적인 경험의 대상이 된 겁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어떤 사람이 갑자기 빛처럼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으로 인해서 주변 세상이 빛나기 시작합니다. 어떤 시인은 하루살이의 몸짓에서 존재의 빛을 경험합니다. “바퀴 꺾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차에 오르려는 손등에/ 가벼움 하나가 내려 앉았다./ 인간의 입김을 타보려는 씨도 다 있네./ 후 부니 의외로 위로 날았다./ 아 하루살이, 자신을 우습게 보며 즐길 내일마저 우습게 보는!”(황동규, 사는 기쁨, ‘하루살이’ 마지막 문장). 바울에게서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은 신적인 빛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사역지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아무 것도 손에 쥔 것은 없었지만 미래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용감하게 방향을 튼 것입니다. 환상을 본 사람에게 나타나는 삶의 용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환상을 볼 수 있을까요?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그런 것이 보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환상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보입니다. 그 준비는 성령과의 공명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이 세상을 신적인 빛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깨어서 기도하라고, 성령을 받으라고,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을 사모하라고 권면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성령에 관계된 것들입니다. 이런 성경의 권면이 멀게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 것은 너무 종교적인 차원이어서 살벌한 돈벌이나 싸이의 ‘젠틀맨’이나 조용필의 ‘바운스’처럼 매력적인 여흥으로 이뤄진 세속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삶과 신앙에 대해서 뭔가 착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세상의 삶에 길들여진 것입니다. 그렇게 길들여진 것을 현실성(reality)으로 착각합니다. 이 문제는 제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설명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색안경을 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는 다양한 색깔이 있다고 아무리 설명해봐야 소용없는 것과 같습니다. 색안경을 벗어야 합니다. 그게 잘 안 되는 이유는 그걸 벗으면 죽을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설교자로서 성령이 무엇인지, 성령과의 공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성령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성령은 실체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바람과 같아서 어떤 힘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의 모습으로만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방언을 한다거나, 신유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은 아주 많은 현상 중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에는 마음을 두지 않는 게 건강한 신앙을 유지하는데 오히려 도움이 됩니다.


잘 들으십시오. 오늘 본문이 말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바울은 갈라디아와 소아시아에서 더 이상 말씀을 전할 수 없게 되었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신 이는 바로 성령이었습니다. 그 성령은 또한 예수의 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예수의 영입니다. 성령이 무엇인지 알기 원한다면, 성령과의 공명을 원한다면 예수가 누군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의 영이라는 말은 예수라는 인격체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성령의 일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 예수와 하나님과 성령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호모 우시오스) 선포했습니다.


저의 대답이 너무 도식적이라거나, 또는 너무 교리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여러분 스스로 예수를 알지만 성령 경험은 없다고 여기시나요? 예수를 안다는 게 무슨 말인지, 성령 경험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인지를 더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그것을 자세하게 설명할만한 시간이 없습니다. 아주 짧게 보충하면 이렇습니다. 예수와 그에게 일어난 사건을 알게 되면 자기집착으로부터, 자기중심으로부터, 성서는 그것을 죄라고 하는데, 벗어납니다. 그럴 때 세상은 여러분 앞에서 새롭게 빛을 냅니다. 사물과 사건의 새로운 차원이 열립니다. 종말이 이미 여기에 와 있다는 환상이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2천 기독교 역사의 마지막 자락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이 역사는 그냥 된 게 아닙니다. 세상을 빛으로 경험하는 환상을 본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역사에 남을까요? 굳이 거창한 역사를 들먹일 필요까지도 없습니다. 환상이 없다면 생명도 없습니다. 거룩한 환상이 없으면 영적인 색맹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의 영인 성령이 여러분을 오늘 본문의 바울처럼 거룩한 환상을 보는 사람이 되게 해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


<이번 녹음 파일은 서울샘터교회 설교입니다.>
사도행전 16:6-15
mms://61.111.3.15/pwkvod/dawp/dawp_0505.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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