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말
- 우리 삶의 방식, 생명인가?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은 중년 세일즈맨 윌리의 이야기입니다. ‘아메리칸 드림’의 환상과 비극, 가족의 사랑과 갈등, 자아 정체성의 문제 등의 문제를 다루는 현대비극이지요. 아서 밀러는 이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받았습니다. 함께 읽고 싶은 책입니다. 작품 속에서 윌리가 친구 찰리에게 하는 대사입니다. “우습지 않아? 고속도로 여행, 기차 여행, 수많은 약속, 오랜 세월, 그런 것들 다 거쳐서 결국엔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가치 있는 인생이 되었으니 말이야.” 꿈을 찾아 전국을 누비며 세일즈하던 윌리는 나이가 들고 직장을 잃었습니다. 아내와 아들들과 관계도, 아들에게 걸었던 기대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어쩌다 인생이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는지… 성공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결국,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나은 인생이 되고 말았다고 스스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끝내 그는 가족에게 보험금을 남겨주기 위해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지요. 극의 마지막 대사, 아내 린다의 대사입니다. “미안해요, 여보. 울 수가 없어요. 알 수가 없네요. 왜 그런 짓을 했어요? 도와줘요, 여보. 난 울 수가 없어. … 여보, 오늘 주택 할부금을 다 갚았어요. 오늘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 집에는 아무도 없어요. 이제 우리는 빚진 것도 없이 자유로운데. 자유롭다고요. 자유롭다고요. 자유….”
현대인들의 비극적 삶을 너무나 잘 드러내 주는 작품입니다. 꿈을 위해, 좋은 삶을 위해, 성공을 위해, 가족의 안락한 삶을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 같은데. 정작 우리는 어디에 도착한 걸까요. 삶을 위해 죽음을 살아온 것일까요? 죽음 같은 삶의 강을 건너면 마침내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생의 기쁨으로 가득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오히려 더 죽음 같은 삶. 행복을 위해 집을 샀는데 집 안에는 고독과 슬픔만이 가득한.
우리 현대인의 삶의 방식은 뭔가 잘못된 것 아닐까요? 성공과 출세와 부를 향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달려가게 만드는 삶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낳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만 보더라도 말이지요. 가장 잘 달려왔다고, 가장 앞서 달리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니.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나,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섬김이나 헌신, 앞서 달리는 자로서 가져야 할 책임과 의무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로지 추하디추한 사적 이익과 욕망만을 드러내고 있지요. 대체 삶을 사는 것인지, 죽음을 사는 것인지.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방식에 대한 구원과 회복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경멸스러운 인간의 시대
- 이야기의 시작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나아만 장군의 이름의 뜻은 “즐거움”입니다. 이 세계적 가치를 대변합니다. 즐거움과 안락을 좇는 삶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운행 법칙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즐거움과 안락함, 편안함, 행복을 좇아 살아갑니다. 이를 위해 돈과 명예, 학벌, 건강… 소위 출세와 성공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리고 나아만은 그 정점에 선 사람입니다. 그러나 “큰 용사이나 나병 환자더라” 모든 것을 이루었으니, 이름처럼 즐거움과 행복이 가득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라는 단서가 달려 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군사력 아니었을까요. “아람을 구원하게 하였음이라” 나아만이 가진 군사력으로 아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당시 세계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크고 강력한 가치를 가진 사람. 그 강력한 힘으로 국가와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준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를 나병 환자라고 기록해서 성경은 이 세계의 어떠한 가치로도 이룰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 이 세계의 가치로 인간의 구원을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려 한 것 아닐까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침대에서 흉측한 모습의 한 마리 갑충으로 변한 것을 알아차렸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그의 바뀐 벌레의 모습은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점점 자신을 고립시키고 소외되게 만들지요. 20세기 문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카프카의 대표작이라 하기에 읽어보았는데, 처음 드는 생각은 솔직히 ‘이건 뭐지??’였어요. 어느 날 아침 한 사람이 잠에서 깨어났더니 바퀴벌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설정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어이가 없고, 대체 무엇을 말하려는지 감도 오지 않았지요. ‘이따위 책이 왜 유명한 거지?’
그러다가 언젠가 우리도 어느 날 아침 일어났을 때, 문득 거울을 볼 때, ‘내가 벌레가 된 것 아닐까’라는 자각을 할 때가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꿈꾸고 바라던 내 모습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하고, 너무나 비겁하고 초라하고 추한 자기 모습을 보게 되는 것 아닐까.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카프카는 바로 그런 순간을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닐까 깨닫게 되었지요. 그 벌레가 된 인간은 서서히 세상과 멀어지게 되고, 가족과 심지어 자기 자신과도 소외됩니다. 윤석열 집단 같습니다. 아~ 차이가 있네요. 그는 자신이 벌레가 된 것을 모른다는.
나아만의 나병은 단순한 육체적 질병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과 존재의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나병은 자신과 타인, 세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권력의 정점, 세계적 가치의 최고점에 다다랐으나,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병 환자가 되어있었던 것 아닐까요. 그레고르가 하루아침 벌레로 변신한 것처럼 말입니다. 매일의 일상을 성실히 살아가고 있던 그레고르는 어느 날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걸 자각하게 된 것이지요. 그레고르의 모습 역시 인간 존재의 소외와 무의미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아만 장군이나 그레고르처럼 어느 날 구토를 경험하지 않을까요. 자신의 삶이 징그러운 벌레나 일그러진 괴물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을까요. 그런 때가 없다면, 행운일까요. 오히려 그런 경험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슬프다! 장차 인간이 아무런 별도 탄생시키지 못하는 때가 오리라!
슬프다! 더 이상 자기 자신을 경멸할 줄 모르는 가장 경멸스러운 인간의 시대가 오리라!”
니체의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경멸할 줄도 모른다면,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자기를 경멸하지 못하는데, 자기 안에 별을 탄생시킬 수가 있을까요? 가장 끔찍한 것은 자신을 경멸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는 니체의 말이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나아만 장군과 그레고르는 바로 그런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지요.
- 희망할 것인가? 절망할 것인가?
그는 ‘말들과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에게 찾아옵니다. 세계의 가치, 군사력을 가지고 옵니다. 자신의 방식, 세계의 작동 방식으로 구원을 찾고 있는 것이지요. 자신의 깊은 절망과 소외를 인식하고 있지만, 진정한 안식과 구원을 찾는 방식은 모릅니다. 그러니 자신이 가진 방식으로 그 길을 추구할 수밖에 없지요. 구원을 찾는 길에서조차 자신의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지독스러운 오만이 보입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조차 사회의 지위나 부 등을 드러내는 한국교회의 천박함이 오버랩되어 보이기도 합니다.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정말 충격적입니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나병 환자에게 ‘좀 씻으라’ 말은 엄청난 모욕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이 말은 그저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려는 말이나, 성직자로서의 오만함을 드러내는 말이 아닙니다. 마치 불교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제시하는 과제 같은 말인 ‘화두’ 같습니다. 자신의 부하들 앞에서 나병 환자가 강물에 들어가 몸을 씻는 모습을 보여주는 행위는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창피한 일이었을까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가치와 사고 체계를 전부 뒤집어엎는 명령입니다.
처음에는 분노하고 거부했으나 결국 자신의 무능력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의 추함과 연약함을 직면하는 선택을 하지요. 자신의 가치체계를 완전히 포기합니다. 비로소 신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지요. 죽음과도 같은 모욕을 받아들입니다. 다시 태어남은 결국 죽음을 전제하는 것이지요. 죽음 없는 부활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변해버린 자기 모습에 대해 숙고합니다. “침대에 그냥 죽치고 있을 수는 없어.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침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러는 편이 최고 상책이야.” 그러나 아무리 버둥거려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벌레가 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스스로는 도저히 그 깊은 수렁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레고르는 자신의 변신에 대하여 초월적 도움을 찾거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점점 더 내면적으로 자신을 고립시키고, 결국 죽음을 맞이합니다. 결국, 그의 절망은 구원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지요.
- 존재의 회복
나아만 장군은 요단강이라고 하는 죽음을 통과합니다. “일곱 번 몸을 잠그니” 완전한 죽음이지요. 불완전한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깨닫습니다. 그의 순종(신의 말씀에 대한 받아들임)은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됩니다. 한계성 속에 있는 인간 실존을 온전히 인식합니다.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그의 육체와 영혼은 회복되고 구원을 얻습니다.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고백합니다. 신을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새로운 믿음과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습니다.
“그가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벼락같이 문이 닫히더니 빗장이 걸리며 꽁꽁잠기고 말았다. 뒤에서 난 급작스러운 소음에 깜짝 놀라는 바람에 그레고르는 가느다란 다리들이 구부러지며 꺾이고 말았다.” 그레고르는 점점 더 가족과 타인에게 단절되고, 결국 존재 자체가 소멸하고 말지요. 그의 죽음은 단순히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모든 관계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의 소멸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의미와 희망을 잃은 채 절망 속에서 삶의 끝을 맞이합니다. 그레고르의 이야기는 초월적 구원의 가능성이 차단된 세상에서의 인간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 나가는 말
- 거부할 것인가? 받아들일 것인가?
짐짓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우리의 우아한 모습은 실상은 나병 환자와 같은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매일 매일 생존을 위해 열심히 성실히 일하고 있는 우리의 평범한 삶은 벌레의 모습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죽어도 인정할 수 없는 사실 아닌가요. 내가 이리도 열심히 성실히 잘 살아왔는데, 내가 나병 환자라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고 직장에서, 가정에서 충실하게 제 역할을 하는 내가 벌레 같은 존재라고?
무엇보다 자신의 추함과 한계를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자신에 대한 경멸을 놓지 않기를. 내 삶의 모든 것이 거부되는 것 같은 고통과 분노가 일어나지만, 그것을 피하지 않고 바라볼 용기를 가질 때야 비로소 우리는 ‘지음 받은 존재’라는 의미를 깨달을 것 같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 좋은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오늘 성경은 온전히 회복되고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얻는 길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회복하라고, 그래서 깨끗하여지라고 말입니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통해 거룩한 하나님 안에서 회복과 치유의 가능성을 열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레고르의 이야기는 소외와 절망을 벗어나기 위해 무엇보다 초월적 도움과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입니까? 나아만 장군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입니까? 아니면 그레고르처럼 소외와 절망 속에서 머물며 고립을 선택할 것입니까?
“홀로 있는 자여, 그대는 사랑하는 자의 길을 가고 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사랑하며,
그 때문에 그대는 사랑하는 자들만이 그렇게 할 수 있듯이,
자신을 경멸한다.
사랑하는 자는 자신이 경멸하기 때문에 창조하려고 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바로 그것을, 경멸할 줄 모르는 자가 사랑에 대해 무엇을 알 것인가!
그대의 사랑과 더불어, 그리고 그대의 창조와 더불어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나의 형제여.”
주님,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하여,
진정한 주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먼저 자신을 경멸하고 미워할 수 있게 하소서.
진정으로 사랑의 길을 걷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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