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9. 롬 15:1-13
믿는 자들의 갈등 문제
아주 초기의 기독교는 예수님의 사도들과 동생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던 예루살렘 교회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 중심이 로마 교회로 옮겨갔습니다. 유대 지역에서 이방 지역으로 옮긴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가보고 싶었지만 로마서를 쓸 때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간접적으로만 그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앞으로 한번 들리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로마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2천 년 전의 로마를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말에 있듯이 로마는 유럽의 모든 군사, 정치, 경제, 문화,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세계의 수도에 산다는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지성과 교양이 풍부했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바울은 매우 논리적이고 신학적인 내용을 담은 편지를 썼습니다.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서, 유대인의 구원과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실천적인 문제도 언급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교회에도 실천적인 문제들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믿음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과의 갈등이었습니다. 바울은 14장 전체를 할애해서 이 문제를 설명합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유치한 문제인데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렇게 유치한 문제가 신앙의 본질보다 더 심각하게 교회 공동체를 흔들 때가 많습니다. 로마 교회에서 믿음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 음식에 대한 태도에 있었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아무 음식이나 먹었지만 약한 사람은 가려서 먹었습니다. 14:2절의 설명에 따르면 믿음이 약한 사람은 채소만 먹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전형적인 채식주의자들이었습니다. 14:21절에 따르면 그들은 고기도 먹지 않았고, 술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술을 마시지 않는 이유는 긴 설명이 필요 없겠지요. 로마 기독교인들 중에는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대개 신전에 바쳐진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부정한 음식으로 판단하고 거절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모두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이미 고전 8장에서 우상 앞에 놓였던 음식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상이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상 앞에 놓였던 고기라 하더라도 실제로는 우상 앞에 놓였던 게 아닙니다.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14장에서도 바울은 아무 것도 가리지 않고 먹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먹는 것이니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서를 답니다.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서 해야 하며, 또한 자신의 행동으로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14:2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를 죄짓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고기를 먹는다든가 술을 마신다든가 그 밖의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바울이 지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일까요? 음식 문제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기독교인 각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 취향에 속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성도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향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하는 게 핵심입니다. 그래서 그는 삶의 태도와 가치관이 자기와 다른 형제와 자매를 음식문제나 절기문제로 비난하거나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4:3절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은 가려서 먹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가려서 먹는 사람은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인 15:1절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권고합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하지 말고 믿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작은 차이를 극복하고 공동체의 평화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가르침대로 사람 사이의 작은 차이를 뛰어넘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에는 그 차이만 확대되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한 교회 안에도 서로 정치적인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보수적이고, 어떤 사람은 진보적입니다. 우파적이기도 하고 좌파적이기도 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그런 차이는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차이를 넘어서기는 어렵습니다.
약간 우스운 예를 들어도 이해하세요. 제가 어디서 들었는지, 읽었는지 모르지만 부부들의 다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치약을 짜는 습관이 다른 부부가 있습니다. 남편은 치약을 중간을 꽉 눌러서 짜는데, 여자는 끝에서 살짝 눌러서 보기 좋게 짭니다. 여자는 남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보기 싫으니까 뒤에서 눌러서 짜세요, 하고 아무리 말해도 남자는 한두 번은 그렇게 하다가 다시 중간을 눌러 짜고 맙니다. 그 문제로 대판 싸우고, 결국 이혼했다는 겁니다. 사소한 습관이라도 그 차이를 넘어서는 건 간단하게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술과 담배를 신앙의 근본인 것처럼 듣고 배운 사람은 그걸 하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일 겁니다. 제 딸들도 나중에 남자를 사귈 때 담배 피우는 남자를 만나면 무슨 괴물처럼 볼지 모르겠군요. 거꾸로 술 담배를 잘 하는 기독교인들은 못하는 기독교인들을 결벽증 환자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큐티를 하는 독실한 기독교인들은 그걸 하지 않는 사람을 이상하게 보겠지요. 새벽기도회도 마찬가지고요. 우리는 이런 작은 차이로 인해서 근본을 깨뜨릴 때가 많습니다. 한국교회가 백 수십 개의 교파로 분리된 것도 바로 비본질적인 것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교파분열은 아주 특이한 현상이지만, 어쨌든지 서로의 차이를 넘어선다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찬양
이런 문제는 단순히 교양을 쌓는다거나 심리 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교양과 심리안정도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임시방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고 하더라도 자기를 중심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죄의 속성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죄에서 벗어난다는 바울의 주장도 인간의 이런 본성이 얼마나 숙명적인가 하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음식문제로, 삶의 취향문제로 그렇게 서로 비난하면서 살아야한다는 말인가요? 그럴 리가 있나요. 바울은 교양과 심리치료가 아닌 근본적인 치유책을 제시합니다.
바울은 5b절에서 로마 교인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뜻을 따라 모두 한마음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뜻은 3절이 가리키고 있듯이 당신이 좋을 대로 하지 않고 “하느님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을 내가 대신 다 받았습니다.”(시편 68:10, 69:9)는 성서말씀대로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의 뜻과 그 삶을 따른다면 당연히 한마음이 될 것입니다. 이 대답이 너무 쉬운 거 같지요? 아니면 너무 어려운 건가요? 예수님을 잘 따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너무 쉽고, 예수님을 잘 따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렵겠지요. 원칙적으로만 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은 할 수 있지만 완전히 따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예수님의 흉내를 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극복하는 문제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셔야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라서 한마음이 되는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에 의지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미”하라고 권고합니다.(6b절)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이 바울의 표현을 눈여겨보십시오. 우리는 영혼이 즐거울 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그의 영혼이 하나님만을 향합니다. 그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불문하고 모두를 창조하시고,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자녀로 삼았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겁니다. 입으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깊은 생명인 영혼으로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찬양을 부르는 사람은 음식을 먹니 안 먹니 하는 문제가 너무나 사소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에 당연히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입니다. 그런 차이를 아예 기억하지도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유명가수의 라이브콘서트 장에 가보십시오. 그곳에서 열광하는 사람들은 평소에 가졌던 모든 차이를 뛰어넘습니다. 민주노동당원이냐 한나라당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에 심취해서 모든 사람과 하나를 이룹니다. 세상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7절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하며, 9절은 이방인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었다고 하며, 9절도 ‘주께 찬양, 주님의 이름을 찬양’, 11절은 모든 이방인의 찬양과 모든 민족들의 찬양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영혼으로 찾으며 찬양하고 기쁨으로 충만할 때 모든 작은 차이가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칫 착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뜨겁게 찬양을 부르기만 하면 모든 인간적인 장벽과 차이가 극복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인 두 손을 높이 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찬양을 부릅니다. 거기서 놀라운 만족을 얻기도 합니다. 그런 감정의 고양된 상태에서 사람들은 엑스타시(황홀경)에 빠져서 나름으로 은혜 경험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감정적인 황홀경은 무당들의 접신이나 일련정종의 주문에서도 일어납니다. 이런 감정적인 엑스타시 경험은 순전히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작용에 속합니다. 노파심으로 다시 말씀드립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깊은 감정에 휩싸여 부르는 모든 찬양이 무조건 얄팍한 심리적 작용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에 그걸 조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희망의 하나님
우리의 찬양은 단순한 감정적인 엑스타시가 아니라 훨씬 또렷한 의식에서 나오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의 찬양은 감정에 앞서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바른 이해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가 찬양을 드려야 할 그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설명합니다. 그 하나님은 바로 ‘희망의 하나님’입니다. 오늘 본문 4, 12, 13절에서 희망, 또는 ‘희망한다.’는 단어가 연속적으로 나옵니다. 특히 13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제가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아무쪼록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온갖 즐거움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가득히 안겨주시고, 성령의 힘으로 희망이 여러분에게 넘쳐흐르게 하여주시기를 빕니다.”
바울은 14장1절부터 음식문제로 인해서 로마교회 안에서 불거진 갈등을 자세하게 짚었습니다. 15:13절 말씀에 따르면 이 갈등의 해결은 희망의 하나님이 희망을 넘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대답이 과연 옳은가요? 로마교회 교우들에게 희망이 넘치면 나뉘어졌던 교회공동체가 일치를 이룬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답을 하려면 우선 여기서 말하는 희망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희망은 종말론적인 구원을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에 근거해서 말씀드린다면 이방인까지 자비를 얻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입니다. 구약 이사야 11:1,10절의 인용인 12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싹이 돋아 이방인들을 다스릴 분이 나타나리니, 이방인들은 그분에게 희망을 걸리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방인들의 희망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적대적으로 갈등하는 사람들에게서 쏟아지는 모욕을 그대로 받으시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신 분은 바로 이 예수님 한분이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이제 모든 인류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설명이 어떤 분들에게는 너무 교리적인 것으로 들릴지 모르겠군요. 제가 아무리 설명을 잘하더라도 이런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영입니다. 성령은 무슨 성령, 나는 똑똑하니까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만 하면 알아들을 수 있다고 주장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아닙니다. 똑같은 선생님의 설명을 들어도 알아듣는 학생이 있고 못 알아듣는 학생이 있듯이 진리를 깨닫는 것은 순전히 자기의 주관적인 이성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본문에서 “성령의 힘으로”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서 여러분에게 그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여러분에게 구원의 희망이 넘쳐흐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희망의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그렇게 하실 겁니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입니다. 옳고 그름을 잘 분간하여 옳은 것을 선택해서 자기의 삶을 맡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기쁨과 평화를 가득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의 희망을 흘러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이때에야 비로소 여러분은 주변 사람들이 새롭게 보일 겁니다. 그들과의 사소한 차이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이 크게 다가올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영적 경지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생각하지 못한 순간에 이렇게 새롭고 놀라운 영적인 세계를 알게 하실 겁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바로 희망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우리의 생명을 완성하실 바로 그 희망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이 지금 오고 계십니다. 이 대림절에 우리는 바로 그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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