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이 온다.
오늘 우리는 신약성서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을 함께 읽었습니다. 마지막 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 일을 반성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것도 힘든 마당에 먼 미래에 벌어질 일을 생각한다는 건 조금 골치 아프기도 하고 별로 실감이 나지 않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일들이 얼마나 치열합니까? 학생들은 시험을 보아야하고, 가정주부들은 가족의 먹을거리와 건강에 신경 써야하고, 선생들은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 연구해야하고, 노동자들은 정신없이 일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만 해도 현대인들은 머리가 터질 지경일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가장 잘 팔리는 약이 두통약이라고 하네요. 오늘 분문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런 우리 삶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본문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겁니다.
거꾸로 이런 일에 광신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도 없지 않습니다. 1992년에 일어났던 “다미선교회” 신도들이 바로 그런 이들입니다. 그들은 현재의 세상살이는 완전히 접어두고 1992년10월30(?)일에 일어나게 될 예수님의 재림과 자신들의 휴거에만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가르침인 종말론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태도에 동의할 수 없으며, 또한 광신적으로 매달리는 태도에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떤 태도가 가장 바람직한 신앙적인 것일까요? 이에 대한 바른 대답을 찾으려면 우선 성서텍스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게 급선무이겠지요. 오늘 우리가 선택한 본문은 세 단락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
25-28절은 “사람의 아들”이 오는 사건에 대한 묘사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21장 전체와 연관해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공생애 마지막 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헤롯당, 제사장 계급을 포함한 이스라엘의 모든 종교, 정치적 지도자들이 실제적으로, 암묵적으로 예수님을 처리하기 위해서 수순을 밟고 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의 헌금 궤 앞에서 사람들이 헌금을 드리는 것을 보고, 부자의 많은 돈보다는 가난한 과부의 푼돈이 훨씬 더 귀한 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1:1-4) 이어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3,6절)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깜짝 놀랐을 겁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모든 것이라 할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진다는 건 곧 이스라엘 민족이 멸망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그들에게 세상의 종말이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일련의 대답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마지막 때에 대해서 정확한 일시를 언급하지 않고 비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25절에 의하면 그때에 우주가 요동칩니다. 26절에 의하면 모든 나라와 민족이 불안에 떨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해, 달, 별을 비롯한 지구와 우주 전체에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27절에 의하면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내려옵니다. 예수님은 28절에서 세상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바로 이때가 구원이 가까이 임한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구절은 두 가지 현상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한쪽은 우주의 대변혁을 통한 사람들의 불안이며, 다른 한쪽은 “사람의 아들”이 오심으로 인해서 현실화하는 구원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인 29-33절 말씀은 위의 말씀에 대한 보충발언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잎을 보고 계절을 분간할 수 있듯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올 때도 역시 그런 징조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32절 말씀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없어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만약에 이 말씀을 문자의 차원에서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종말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살아있을 때 일어났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틀렸다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예측이 빗나갔다는 걸까요? 아니면 제자들이 이 말씀을 오해했다는 것일까요? 이건 아주 어려운 문제이니까 그냥 접어두고, 우리가 읽은 본문 중에서 아직 남아있는 부분을 따라가는 게 좋겠습니다.
34-36절은 “깨어 기도하여라.”는 소제목을 붙일 수 있습니다. 종말은 갑자기 닥치니까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종말은 야생동물을 잡을 때 사용하는 “덫”처럼 느닷없이 닥칩니다. 그러니 한순간도 한눈팔지 말고 “늘 깨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본문은 전체적으로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우주론적 변형인 종말에 “사람의 아들”이 온다. 둘째, 그 종말의 때는 그에 앞서 징조가 있다. 셋째, 그 순간은 우리가 예상할 수 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도대체 이런 본문이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2천 년 전의 말씀은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불원간에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걸까요?
종말과 재림
앞서 저는 오늘 본문이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으로부터 나온 말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은 곧 예루살렘이 멸망당한다는 예언(20-24)과 직결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질 것이며 포로가 되어 여러 나라에 잡혀갈 것이다. 이방인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예루살렘은 그들의 발아래 짓밟힐 것이다.” 예루살렘은 기원후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초토화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저항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30년경에 활동하신 예수님이 40년 뒤에 일어날 예루살렘 함락을 내다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세상살이를 어느 정도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미 바벨론 포로 경험도 있었으니까 예루살렘 함락을 내달 볼 수 있었겠지요. 어떤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말씀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게 아니라 예루살렘이 함락된 다음에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의해서 보충된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것이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지는 여기서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비록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일 아니라고 하더라도 가까이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에게 이 진술이 연결된다는 사실은 틀림없습니다. 바로 그 사실이 중요합니다. 왜 그런지 다시 오늘 본문말씀을 잘 들여다봅시다.
25-28절 말씀에서 우리는 우주론적인 종말은 바로 “사람의 아들”이 오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해, 달, 별을 비롯한 우주 전체가 해체되고 새롭게 구성될 것입니다. 이런 장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부모의 이혼으로 한 가정이 해체되기만 해도 자녀들이 충격을 받기 마련인데, 우주 전체가 달라진다고 해보십시오. 그것이 어떤 충격을 가져오겠는가를 말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릴까요? 우리가 공중에 떠다닐 수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나무와 새가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건넨다고 생각해보세요. 호수물이 공중에 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만화 같은 말장난 그만 둬라,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요. 결코 농담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에도 그런 일들은 흔히 일어난답니다. 씨앗을 보세요. 씨앗을 땅에 심으면 얼마 후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합니다. 싹이 나오고 꽃이 핍니다. 씨앗이 꽃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곧 오늘 우리 앞의 우주인 해, 달, 별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만약 씨앗이 원래 자기에게 익숙했던 모습에만 집착한 채 꽃으로 변화되는 걸 두려워한다면 그 미래가 어떻게 될까요?
오늘 본문은 그런 우주론적 변혁의 때가 곧 사람의 아들, 즉 예수님이 재림하는 때이고, 그때에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시는 사건입니다. 기껏해야 10억 원짜리 복권이 당첨되거나 장관, 국회의원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 형식 자체가 바뀌는 사건이야말로 권능이며 영광입니다. 그런데 27절에 언급된 “사람의 아들”은 곧 다니엘이 본 환상에 근거합니다. “나는 밤에 또 이상한 광경을 보았는데 사람 모습을 한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와서 태곳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인도되어 나아갔다.”(단 7:13)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다니엘의 이 환상에 등장하는 “사람 모습을 한 이”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었고, 오늘 우리도 우주가 변하고 완성될 때 오실 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종말의 때에 대한 질문
과연 그 때가 언제일까요? 29-33절에서는 그 때를 우리가 분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서 그 세대가 끝나기 전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언급도 있습니다. 저는 앞에서 종말의 때에 대한 예수님의 예측이 잘못된 것이냐, 하고 질문했습니다. 누가복음은 이에 대해서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지만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다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막 13:32) 아들도 모른다는 것은 곧 예수님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완성하시기 때문에 그 시간은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이런 대답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특히 우주의 전체 시간을 생각하는 물리학자들은 훨씬 더 불만스러울 겁니다.
스티븐 호킹이 얼마 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인류는 앞으로 지구 이외의 행성을 찾아서 이민을 떠나야 한다고 말입니다. 지구의 남은 시간은 원래의 시간표대로 계산한다고 하더라도 45억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파괴될 가능성은 아주 높습니다. 파괴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생명체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행성으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은 높습니다. 갑작스럽게 빙하기가 찾아온다거나 혜성과 충동하거나 또는 핵전쟁이 일어나면 그것으로 지구의 생명계는 끝장이 나겠지요. 다른 행성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호킹이 처음은 아닙니다. 칼 세이건은 이미 오래 전에 이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미래의 인류는 먼 행성에 이민 가서 푸른별 지구를 바라보면서 옛날에 자신들의 선조들이 살던 별이라고 회상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칼 세이건과 호킹의 논리대로라고 한다면 인류의 종말은 오지 않을지 모르겠군요.
어떤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물리학이나 생물학과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이 경쟁이라는 게 반드시 대립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역사와 종말, 그리고 생명과 우주에 대해서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창조주인 하나님의 개입을 믿고 있지만 과학자들은 자연원리에만 충실할 뿐입니다. 이 세상이 과학자들의 예측대로만 흘러온 게 아니기 때문에 자연과학이 모든 것을 완전하게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뉴턴이 오늘의 양자역학을 알지 못했듯이 오늘의 과학자들도 역시 아직 드러나지 않은 궁극적 세계는 모른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노력을 무시하거나 부정할 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성서와 2천년 신앙이 해명하고 있는 구원과 종말을 바르게 해석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중에서 자연과학자들의 설명과 맞는 부분이 있기도 하고, 틀린 부분이 있겠지요. 서로가 선의의 경쟁을 통해서 우리 인간을 포함한 세계 전체를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방향을 제시하면 됩니다.
말이 조금 옆으로 흘렀군요. 우리에게 너무 어렵고 미묘한 문제인 종말과 재림을 설명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이 우주가 새롭게 구성될 종말은 우리에게 오지만 정확한 시기는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이 오기 전인 이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종말은 아예 생각하지 말고 현실에만 묶여서 살아야 하나요? 아니면 현실을 무시하고 종말 문제에만 집착하면서 살아가야 하나요? 제가 처음에 제시한 문제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34절입니다.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왜? 그 날이 갑자기 닥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36b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 씨앗이 자기 형체를 잃을까 걱정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걱정하는 것과 전혀 다른 생명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에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곧 깨어 있는 것이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고, 기도하는 사람은 깨어 있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또는 신부를 기다리는 신랑처럼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 시대를 분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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