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막 12:38-44, 창조절 11주, 2018년 11월11일
38.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성경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건물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기원전 10세기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세운 성전은 기원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집니다. 그 뒤로 두 번에 걸쳐서 재건되었습니다만,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서 파괴된 다음에는 재건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무너진 성전 서쪽 벽의 잔해만 남아 있습니다. 그게 통곡의 벽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은 유월절 같은 절기에 성지순례자들도 붐볐습니다. 예수님 역시 몇 차례에 걸쳐서 성지순례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때 벌어진 어떤 이야기를 오늘 설교 본문이 전하고 있습니다.
두 종류의 헌금
막 12:41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헌금함을 대하여 앉아 계셨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한 공간인 보물창고에는 열세개의 헌금함이 놓여 있었습니다. 헌금함에 따라서 헌금의 종류도 다릅니다. 성전을 수리하기 위한 헌금도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이나 자연재해를 당한 사람들을 돕는 헌금, 또는 어떤 절기를 맞아서 특별 헌금을 드리거나 개인적으로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헌금도 있었을 겁니다. 성전에서 업무를 담당하는 제사장이 헌금하는 사람 이름과 액수를 기록했습니다. 기록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록해야만 헌금 관리의 잘못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헌금에 대한 동기유발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부자들이 앞 다투어 헌금하는 걸 보았습니다. 그들은 헌금함에 뭉치 돈을 넣었습니다. 여유가 있으니 헌금도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성을 담아서 헌금한 부자들도 있었고, 또는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나타내고 싶어서 헌금한 부자들도 있었을 겁니다. 헌금 동기가 어디에 있었든지 그들의 헌금은 예루살렘 성전을 운용하는데 긴요했을 겁니다. 헌금은 어떤 점에서 세금과 비슷합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은 세금을 많이 내고, 적은 사람은 적게 세금을 내는 게 마땅합니다. 교육이나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해서도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대표적인 부자들이 자신들의 세금을 깎아달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더 거둬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헌금을 낸 부자들을 칭찬하지 않으셨고, 그렇다고 무조건 비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다른 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헌금한 한 사람이 예수님의 눈에 띄었습니다. 부자와 완전히 대비되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이 과부는 푼돈에 불과한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너무 적은 액수라서 속으로 부끄러워했을지 모릅니다. 부자들의 통 큰 헌금에 대해서는 아무런 평가를 내리지 않으신 예수님이 이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적극적인 평가를 내리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부자가 넣은 헌금액수와 과부가 넣은 헌금액수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부자가 백만 원을 넣었다면 과부는 천원을 넣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그날 헌금함에 들어간 여러 헌금 중에서 액수가 가장 적었습니다. 그런데도 가장 많이 넣은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유는 44절에 나옵니다. 다른 이들은 풍족한 중에서 넣었지만 과부는 궁핍한 중에도 자신의 모든 소유를, 즉 생활비 전부를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무슨 이유로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은 것일까요?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을 벗을 수 없으니 차라리 남은 돈을 몽땅 헌금함에 넣고 굶어죽겠다고 작심한 것일까요? 그동안 헌금을 하지 않아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 아니면 평범하게나마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않게 해달라는 뜻으로 무리하게 헌금한 것일까요? 우리는 그 속사정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가난한 과부가 바친 두 렙돈은 그의 전 재산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곧 그녀가 자신의 인생, 즉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쳤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확신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빠의 손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공중부양을 할 수 있는 거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실제로 신뢰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걱정에 묶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기에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선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전 재산인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는 태도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
보통의 경우에는 이 여자처럼 행동할 수 없습니다. 대다수 가난한 사람들은 형편이 괜찮은 사람보다 더 위축돼서 살아갑니다. 생존이 실제로 위태하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최소한 생존만은 국가가 책임져주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더 큰 문제는 가난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생존에 대한 염려에 묶여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전반적인 심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신의 일상이 파괴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현대인의 무의식까지 지배합니다. 이런 두려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기원전 6세기 바벨론 포로 신세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사 51:12,13).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북한 핵에 맞서기 위해서 군사력을 더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말하듯이 배금주의(mammonism)가 한국사회와 한국교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으로 인한 증상들입니다.
실제로 가난하고 힘이 없으면 삶이 고단해지는 거 아니냐, 특별히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는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 하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갑니다. 이해는 가지만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그 말은 가난한 교회에서는 신앙생활이 행복하지 않다는 말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주 비교하는 이야기인데, 가난한 교회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실제로 가난하게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상투적인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가난은 불편할 뿐이지 행복 여부에 직결되지 않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과 가난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쪽이 많을까요? 어느 쪽이 더 소중할까요? 가난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은 부자가 되어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손에 꼽아보십시오. 좋은 집과 자동차, 해외여행, 거액 헌금, 명품 드레스, 일류 호텔 뷔페, 비싼 명화 구입 등등입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이 있겠지만,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삶의 목표로 삼는 한 그 사람은 삶에 대한 염려에서 풀려나지 못할 겁니다. 가난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가을단풍과 하늘구름 보기, 야생초 기르기, 밥 냄새 맡기, 공공 도서관에서 책읽기, 외로운 신자들에게 말 걸어주기, 찬송 부르고 기도하기, 교회의 빈자리 채우기 등등, 거의 끝이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이런 것들을 삶의 목표로 삼는 사람은 생존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집니다. 가난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데 부자가 되기 위해서 삶을 소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만이 아니라 자연인으로서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부자로 살아야만 누릴 수 있는 것과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누릴 수 있는 삶을 다 누리고 싶겠지만, 그것은 지나친 욕심이면서 불가능합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대충 양다리 걸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건 가능하겠지만 확실하게 한쪽을 선택하는 방식으로는 두 가지를 다 누릴 수 없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양다리 걸치는 식으로 삽니다. 저 역시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누릴 수 있는 삶에만 몰두하지 못합니다. 다만 삶의 중심을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어서 그쪽 방향으로 더 진도를 내도록 노력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서기관의 위선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한 이야기 바로 앞에 서기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로 대비되는 이야기입니다. 서기관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지도층에 속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로서, 오늘날 교수나 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사회적 지위와 명예가 높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뜸 그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멀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은 조목조목 대셨습니다.
38,39절이 묘사하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닙니다. 자신의 지위를 사람들이 단번에 알아보게 하는 겁니다. 시장에서 문안 받는 걸 좋아하고,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고 잔치의 상석에 앉고 싶어 합니다. 한 마디로 다른 이들보다 잘났다는 걸 확인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이런 방식으로 삽니다.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잘난 척하고, 어떤 사람은 세련된 방식으로 교만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바로 죄라고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어느 기도문에서 이를 가리켜 ‘사람들이 나를 두려워하고 사랑해주기를 바람으로써 어떤 즐거움을 누리려는 욕구’라고 규정했습니다. 정확한 진단입니다. 이런 욕구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혁명적인 변혁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그게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대충 그렇게 살아도 괜찮은 것 같으나 문제는 그런 방식으로는 영혼의 만족이, 생명 충만이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거지가 구걸하듯이 자기를 인정해달라고 평생 두리번거리다가 지쳐버릴 뿐입니다.
40절은 서기관의 문제점을 좀더 노골적으로 묘사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켰다고 합니다. 그들이 과부의 재산을 불법적으로 강탈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실정법을 어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과부가 필요로 할 때 율법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주고 지나치게 높은 대가를 요구했습니다. 요즘으로 하면 변호사의 고액 수임료 같은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위선으로 길게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종교적인 카리스마를 사람들에게 나타내려는 행동입니다. 당시에도 생각이 있는 서기관들은 공식적인 모임에서는 가능한 짧게 기도하고, 혼자 있을 때 길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의 위선을 짚으신 다음에 결론적으로 그들이 엄중한 판결을 받게 될 것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공동번역은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서기관처럼 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우리 자식들도 그런 자리에 올라가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이 더 엄한 벌을 받는다면 서기관이 되지 않는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게 좋은 건지 종잡기가 어렵습니다. 최선은 서기관의 자리에 올랐으나 위선적으로 살지 않는 것이겠지요. 그것은 죽을 각오로 노력하지 않는 한 어렵습니다. 죽을 각오로 살지 않으려면 서기관처럼 높은 자리에 오르지 않는 게 차라리 좋습니다. 이런 점에서 목사직도 역시 위험스럽습니다. 본문에 나온 서기관은 오늘의 목사라고 해도 좋습니다. 보통 목사라기보다는 큰 교회 목사라고 보는 게 좋습니다. 큰 교회 목사들은 어디 가도 높은 자리와 윗자리를 차지합니다. 그걸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 대우를 받지 못하면 마음이 상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목사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다른 이들보다 더 엄격한 잣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심판은 ‘이미’ 일어난 것이기도 합니다. 그걸 각오하지 않으면 목사가 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가난한 과부
다시 가난한 과부로 돌아갑시다. 이 여자는 어디서도 대접을 받지 못하던 사람입니다. 그녀는 긴 옷을 입을 수 없고 시장에서 문안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회당이나 잔치 자리에서는 언제나 말석입니다. 민폐의 대상으로 취급받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야말로 하나님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신뢰하는 사람이라고,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사람이라고 보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세상의 작동 메커니즘과 완전히 다르기에 이런 일이 가능합니다. 엄청난 반전입니다. 거지로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민심을 살피려고 분장한 임금이었다는 동화에 나올만한 반전입니다. 저는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이야기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무슨 위로일까요?
우리 중에는 지금 본문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보다 더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형편이 아무리 내려가도 가난한 과부보다 못하지 않을 겁니다. 서기관이나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과부와 같은 인생만으로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으니 지금 자기 신세를 한탄하거나 어려운 처지에 떨어지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수능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지 않아도 멋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학생의 심정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가난한 과부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하나이고, 서기관처럼 더 존경받고 싶고, 더 인기를 끌고 싶고, 더 넉넉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다른 하나입니다. 보십시오. 여기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놓인 가난한 과부가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 여러분도 똑같이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기독교적인 용어로 말하면 여러분도 구원받을 수 있고,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생명 충만, 성령 충만, 영혼 만족에 이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모든 소유, 즉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는 용기입니다. 헌금을 많이 하라는 게 아니라 생존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여러분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다 다릅니다. 목사인 저의 경우를 말씀드린다면, 교회 성장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자식 교육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고 전인교육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조금 낭만적인 경우를 말한다면 아파트 값 오르는 거 생각하지 않고 시골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이 유일한 정답은 아닙니다. 형편에 따라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방식으로 일희일비하지 말고, 여러분의 인생 전체를 두 렙돈을 다 넣은 가난한 과부처럼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는 결단과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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