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
마태복음 5:1-12, 주현절후 다섯째 주일, 2011년 2월6일
마태복음 5-7장은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예수님이 산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뜻으로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이유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보편적으로 가치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마 7:12절은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오늘 설교의 본문인 마 5:1-12절은 산상수훈의 전문에 해당됩니다. 소위 팔복이라고 합니다. 3절부터 10절까지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여덟 개 항목이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이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그들입니다.
여덟 가지 항목에 나열된 분들이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전체적으로 볼 때 세상에서 힘겹게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세상에서 권위가 있고, 존경을 받고, 즐겁게 사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열거되는 사람들의 상황을 낭만적으로 보면 안 됩니다. 실제로 삶이 고단한 이들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기를 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팔복의 병행구인 누가복음 6:20-26절은 이 사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마태와 달리 네 개의 복과 네 개의 화를 전합니다. 복이 있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미움을 당하고 욕을 먹는 자입니다. 네 가지가 다 통하는 이야깁니다. 가난하니까 굶주리고, 울 수밖에 없고, 경멸을 당합니다. 이 모든 처지를 가난이라는 말로 집중해도 됩니다. 누가는 직접 가난한 자들이라고 했지만 마태복음은 이를 약간 돌려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도 기본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네 번째 나오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나 여덟 번째 나오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를 보십시오. 빈익빈부익부의 사회구조에서 누가 경제정의를 갈망할까요? 당연히 가난한 사람입니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은 똑같은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 말씀이 과연 옳은가요? 이런 말은 가난이라는 정치 경제적인 문제를 종교적인 문제로 해체시켜서 인간 해방의 투쟁을 방해하는, 마르크스가 비판했듯이 ‘민중의 아편’일까요? 우리가 실제로 이런 말씀을 주님의 약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말씀이 옳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요? 그것을 우리가 실제로 깨닫고 경험하고 있나요? 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아니면 우리의 실제 삶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니까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대하는 건 아닐까요.
단도직입적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보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면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 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교회가 이런 메시지를 선포한다면 교회가 텅 빌 겁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부자 되는 걸 삶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장관들의 청문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기회만 되면 불법으로라도 돈을 벌려고 애를 씁니다. 농사를 지을 자격이 없으면서도 편법으로 농토를 사들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이유도 마치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예배 시간에 매월 1천만 원 십일조 하는 교인들이 나오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도와 헌금과 예배 등, 모든 신앙 행태가 기복주의에 완전히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양심적이거나 인격적인 분들은 청부론을 주창합니다. 깨끗한 부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솔깃한 이야기입니다. 깨끗한 부자가 가능할까요? 새롭게 시작한 벤처 기업이 대박이 날 수도 있습니다. 공부 잘해서 의사나 변호사가 되어 수입을 많이 올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고, 부자 되고, 나가서 교회에 헌금 많이 내서 복음 사업에 앞장서고, 자선을 크게 베풀고,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지금은 옛날과 달리 한 나라의 경제 메커니즘이 서로 얽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아무리 양심적으로 살아도 자신의 부에는 부도덕한 요소가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얼마 전에 홍익 대학교 청소원들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겁니다. 그곳에서 청소원으로 일하던 170명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다가 해고당했습니다. 청소원들을 직접 고용한 측은 물론 대학교가 아니라 다른 용역회사입니다. 대학교는 이들 회사에 청소 업무를 맡겼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임금도 대학교 자금으로 나가기 때문에 대학교가 고용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공공건물의 청소를 맡고 있는 분들은 74%가 여성들이고, 평균 나이는 56.6세로 월 79만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화장실 비품을 넣어두는 공간에서 점심을 먹는 곳도 비일비재하다고 합니다. 대학교와 병원의 구성원들이 누리는 부는 이런 분들의 희생을 밑바탕으로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청부론이 가당키나 할까요? 저는 이런 사회과학적인 문제를 더 길게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가난한 교회, 가난한 대학교, 가난한 나라가 복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는 걸까요?
어떤 이들은 자발적 가난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도 원칙적으로 옳을지 몰라도 현실성은 떨어집니다. <오래된 미래>라는 책이 소개하고 있는 촌락 중심의 소규모 공동체라면 몰라도 오늘과 같은 사회구조에서는 아예 그런 삶은 불가능합니다. 승용차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개인에 따라서 생태적 마인드를 실천하겠다는 의미로 승용차를 구입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모든 이들에게 일괄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모두 자급자족하는 사회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런 사회에서 프란체스코처럼 탁발승으로 살아가라거나 법정이 말하는 무소유를 실천하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가난은 어느 정도 정신적인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지금만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가난은 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습니다. 그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은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 나라
우선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해야 한다거나,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부에 대한 경고이긴 합니다. 마 19:24절에 따르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 바로 부에 대한 집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복음은 부와 가난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 늘 가난한 사람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천국, 즉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항목도 모두 그것과 연결됩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가난은 그야말로 저주입니다. 인간을 파괴하는 악입니다. 중요한 건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삶의 한계를 경험하고 죽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미래의 나라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은 이 미래의 차원에서 타당합니다. 이런 말이 공허한가요? 지금 당장 뭔가 달라지는 게 있어야지 나중에 주어진다니 기분이 좋지 않겠지요. 이런 미래의 차원을 무시하는 방식으로만 세상을 본다면 여러분은 아직 그리스도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미래와 연관됩니다.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그것은 기다림의 영성입니다.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듯이 생명이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립니다. 만약 이 기다림이 우리의 영혼을 불처럼 사로잡는다면 가난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복이 있다는 말씀이 옳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배가 고프고, 다른 한 사람은 배가 부릅니다. 이 두 사람이 근사한 프랑스 식당에 저녁을 초대받았습니다. 누가 복이 있는 사람일지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미래에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는 복이라고 한다면 지금은 가난해도 참아야 한다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이 되나요? 배고픈 거 참지 못하는 성질이라서 잔칫날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불만스럽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미래의 궁극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역동적인 사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까이 왔다는 것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운명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바로 여기에 은폐의 방식으로 개입되어 있습니다. 종말의 힘은 현재의 힘입니다. 바로 위에서 예로 든 프랑스 식당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프랑스 요리가 어떤 건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지금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불행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지금 프랑스 식당 안에 들어가 있는 것과 다른 게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이 자유를 확보한 사람은 이미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이 드나요? 심심하다고 생각이 드나요? 다른 재미도 없이 어떻게 사는지 한심한 인생이라고 생각이 드나요? 그렇게 생각하면 여러분은 삶을 크게 착각한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다는 말에 실감이 나지 않는 거겠지요. 쉽게 말하면 죽음을 기다린다고 보면 됩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걸 외면하면서 세상 재미에 빠질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우리를 피해가지는 않습니다. 죽을 준비를 하는 것이 최선의 삶입니다. 죽음을 의식할 때만 삶에도 충실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넘어선 궁극적인 생명의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기울여야 할 삶의 본질입니다. 그것이 우리 삶을 실제로 풍요롭게 만듭니다. 왜 그런지를 아는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된다는, 그래서 지금 이미 풍요로운 삶으로 들어간다는 이 말씀을 종교적 교훈이나 덕담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가난하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는 일반적 충고나 처세술이 아닙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사실이 놓여 있습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의 운명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것이 복음입니다. 인류 역사에는 예수님보다 더 가난하게, 청빈하게, 금욕적으로 산 사람들은 많습니다. 좋은 스승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가르침은 그야말로 윤리와 도덕 그 이상이 아닙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이 세상을 약간 계몽시켰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것과 차원이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운명으로 자신의 말씀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의 말씀을 진리로 증명했습니다. 가난의 극치는 십자가 처형입니다. 그것으로 끝났다면 그의 가르침도 일반 스승의 것들과 똑같습니다. 부활은 우리의 운명이 질적으로 새로운 차원으로 바뀐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 고상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믿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가난합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에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풍족합니까? 불편을 면케 되었으니 다행으로 아십시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의 영혼으로 사십시오.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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