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5일 성탄절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xdvviyXn5CU?si=guw5qbySiqFKk5G8
▣ 들어가는 말
- 신이 오시다!
신이 이 땅에 오셨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영원한 하나님이 시간이라는 한계, 제한 속으로 오신다는 것이 가능할까. 언젠가 광고(애니메이션)에서 거대한 고래가 하늘 위를 나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신기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여겼던 기억이 납니다. 저런 고래가 있으면 좋겠다. 고래가 진짜 하늘을 나는 모습은 정말 근사하겠다. 도시의 빌딩 숲 사이로 거대한 고래가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고래가 너무 근사하지만, 그 고래를 품으려고 하면, 담으려면 거대한 물의 세계, 바다라고 하는 그릇이 필요합니다.
하물며 영원과 무한을 의미하는 신이 시간과 공간에 갇힌 이 세계 속으로 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아닐까요. 거대한 고래가 우리 아이의 작은 어항 속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어처구니없는 생각 아닐까요.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 영원과 무한을 담는 그릇이 있을까요. 있다면 무엇일까요. 뒤집어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것도 그 거룩한 신께서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오셨다고 고백하게 된 걸까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상도 안 되는, “화투를 거의 아트의 경지로 끌어올려서, 내가 화투고 화투가 나인 물아일체의 경지. 혼이 담긴 구라!”(영화 『타짜』 중, 평경장의 대사) 구라도 그런 구라가 없을 정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도 안 되는 고백을 혼을 담아서 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것을 위해 기꺼이 살고 또 죽을 수 있는 그런 이념…”(키르케고르, 『기록과 일지』 중)을 찾은 것이지요.
▣ 역사 속에 오신 하나님
- 여전히 희망하는가!
시간 속에 영원을 담을 수 있다는 고백, 추한 인간 속에 거룩한 신을 품을 수 있다는 고백, 이 땅에 메시아가 오셨다는 고백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 경이 중의 경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믿으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역사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이 이 역사 안에 육체로 오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역사가 그저 반복한다고 보지 않고 목적을 향해 진행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신이 직접 역사 속으로 뚫고 들어온 성육신 사건 이래로, 우리 역사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겉보기에는 너무나 불합리하고 고통과 죄악으로 가득 차 보일지라도 바로 이 역사가 놀라운 생명을 잉태했기 때문입니다. 신의 생명,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자신을 이 역사가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부터 이 역사에서 이루어지는 삶은 이 거룩한 생명을 가꾸고 지키려는 것과 그것을 파괴하고 짓밟는 것으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역사 속에서 성탄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면 다음의 자세는 자명하게 그 삶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첫째, 말씀이 육을 이루어 역사 속에 우리와 동거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절망이나 체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절망과 체념은 노예의 삶의 태도입니다. 사회가, 형편이, 환경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것은 주인의 삶의 태도가 아닙니다. 진정한 삶의 주인은 자기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존재입니다. 세계 안에, 내 안에 신의 거룩한 오심을 믿기에 결코 감히 포기하거나 실망하거나 절망할 수 없습니다.
둘째, 이 역사에, 우리의 삶 속에 투쟁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거룩의 씨앗이 내 안에 들어왔으니 그것을 지키고 길러서 꽃을 피우게 해야 합니다. 어둠을 보고 경험하는 것은 빛을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흔들리고 방황하는 것은 길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그만큼 진심으로 투쟁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싸움도, 고통도, 흔들림도, 방황도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뭔가 잘못된 것 아닐까요.
성탄은 동화적 낭만주의를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마태는 헤롯의 증오와 질투 그리고 살기 등등한 현장이 성육신의 장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인간사회에서 거부된 마구간을 성육신의 장으로 서술하고 있지요. 이것은 처음부터 거부와 투쟁을 예시한 것 아닐까요.
▣ 나가는 말
-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은 십자가에 달려 힘없이 죽어가는 예수가 “다 이루었다”고 기록합니다. 그 희망의 길, 그것은 투쟁의 길입니다. 그 온전한 주인의 삶을 끝까지 다 걸은 이의 고백이지요. 그 고백이야말로 우리의 삶이 온전히 승리했음을, 아름다웠음을, 눈부셨음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거룩한 신께서 내 안에 오셔서 그가 바라던 삶을 마침내 이루어 냈을 때의 고백인 것이지요.
“호랑이는 아무 생각 안하고 제 동족을 구하러 뛰어들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깊은 숲속으로 달아나버리기도 하지.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게 아니야. 문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뭘 해야 하는가를 따져보는 거란 말이다. 우린 다행히도 그걸 알고 있거든.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아니면 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다.”(『고도를 기다리며』 중)
호랑이는 모든 행동을 생각 없이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훌륭한 것이든, 비겁한 것이든 말이지요.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늘 자신에게 묻는 존재인 거지요. 혼란과 혼돈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묻곤 하는 인간은 근원적으로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기다림’이 없다면, ‘지향’이 없다면, 물음은 어떤 의미도 없고 물음을 가질 이유도 없지요. 중요한 것은 무엇을 기다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고도’인지, 그저 깊은 어둠인 밤인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긴 시간 동안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그 기다림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오심이, 내 이루이긴다는 것은 내가 이긴다는 뜻이기 전에 다 이룬다는 뜻이다. 다 이룬다는 원어의 뜻은 끝까지 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목적한 바, 시작한 것을 끝까지 관철했다는 뜻이다.
내가 이겨도, 네가 이겨도 안된다. 그가 이겨야 한다. 우리의 역사의 방향이 결코 어떤 이데올로기, 어떤 집단, 어떤 권력에 의해서 좌우되거나 좌절되지 않는다. 까닭은 역사의 목적이 이미 역사에 화육된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를 위해 박해받고 모욕당하고, 비난받는 자들이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까닭은 하나님 나라가 바로 그들의 것이기에, 그 나라에서 받을 것이 많겠기에, 먼저 간 모든 의로운 자들(예언자)의 반열에 설 것이기에.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희망은 막연한 미래에의 동경 따위가 아니며 우리 속성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역사 밖에, 이 역사 안에, 그리고 내 안에 이미 돌입해서 현존하고 있기에 단순히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안에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판도라는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상자를 열고 맙니다. 그 상자 안에는 인간 세계에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모든 고난과 불행(질병, 고통, 죽음, 질투 등)이 담겨 있었지요. 그 무서운 것들이 상자에서 빠져나가자 깜짝 놀란 판도라가 상자를 닫습니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희망’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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