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9:25-27
가족 공동체를 넘어서
예수의 십자가 근처
아들과 어머니의 사랑이 넘치는 듯한 오늘 본문의 배경은 매우 처참합니다. 한 남자가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로 죽는 그 장면보다 더 참혹한 그림이 있을까요? 더구나 예수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사고나 불치병 때문이 아니라 큰 오해가 불러온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훨씬 비극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위탁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뿐이었지만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로마 정치 권력자는 예수를 반국가사범에게 해당되는 십자가형으로 처리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큰 오해로 인해서 벌어진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미묘한 위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나치게 종교화함으로써 그 근본 의미를 축소시키는 일이 많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분명히 정치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전혀 정치적이지 않았던 예수님이 정치적인 방식으로 죽었다는 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일까요? 만약 정치인들이 그리스도교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복음 운동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자기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 신앙은 원래의 맛을 잃은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헤게모니와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런 정치와 경제의 이데올로기를 근원적으로 상대화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일종의 ‘거침돌’입니다. 일부러 세상을 귀찮게 하려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교적인 본질 안에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그리스도교를 귀찮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인류사에서 가장 이상하게 죽어가는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을 처형한 군인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예수님의 가족과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군인들은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상관의 명령에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앞부분에(23,24절) 보면 네 명의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가지를 나누어가졌으며, 심지어 속옷은 제비뽑기를 해서 한 사람이 차지했다고 합니다. 억울한 죽음을 전혀 개의치 않고 옷을 나누는 것에만 관심을 쏟는 게 아마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인지 모르겠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갖는 군인들의 행동을 뒤로하고,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어머니 마리아와 그녀의 동생과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 중의 유일한 남자인 한 제자를 가리키며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26). 그리고 이어서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부터 그 제자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요한은 진술하고 있습니다. 갈보리 산 위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에서 이 장면만은 매우 따뜻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예수는 효자인가?
많은 설교자들이 이 본문을 해석할 때마다 죽음의 순간에도 어머니를 챙기는 예수님이야말로 효자였다고 주장합니다. 약간 신학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나 ‘인간의 아들’로서 충실했다고도 설명합니다. 과연 예수님이 효자였다는 설명이,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부모에게 효도하는 게 마땅하다는 설명이 옳을까요? 이런 주장과 성서 해석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지만 옳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이 주장을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십계명에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가르침이 있듯이 자식과 부모의 관계는 신앙 이전에 자연의 본성, 혹은 인간의 본능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흡사 친구와도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처럼 부모와 자식도 역시 이런 일반적인 인간관계와 다른 건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그 어떤 관계와도 비교할 수 없는 특수성이 있습니다. 피를 직접적으로 나누었다는 것이 그 근거이고, 자식이 독립할 때까지 생명을 지켜주었다는 것도 그 근거입니다. 그러나 사실 모든 인간관계는 특수하고 소중합니다. 부부, 사제, 친구, 교우 관계가 모든 그렇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관계는 우리가 그리스도인 이전에, 혹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생명 지향적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효도는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삶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 없이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가부장시절의 충효 이데올로기에 치우친 생각입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읽은 이런 본문을 효도와 연결시킨다는 것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성서를 읽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어리석은 성서읽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전후 맥락을 좀더 자세하게 살펴볼까요?
십자가에서 죽음 일보 직전의 예수님이 제자에게 어머니 마리아의 노후를 부탁했다는 건 그렇게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그 사명에 순종하다가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도 고통이지만 자신의 운명이 실패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참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하고 절규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 있는 예수님이 어머니를 염려했다는 것은 좀 낭만적인 생각이 아닐까요? 더구나 어머니의 노후는 예수님의 동생들이 책임지는 게 당연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공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님에게는 동생들이 있었습니다. 장남인 예수님이 먼저 죽으면 당연히 그 동생들이 어머니를 봉양해야만 합니다. 혹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을 별로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노후를 부탁할 수 없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예수님의 동생이나 친척들만이 아니라 어머니인 마리아마저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보도합니다(막 3:20-35). 그러니까 신뢰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렇지만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온 것만은 분명하지 않느냐, 그래서 동정심이 든 예수님이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반역죄로 처형당하는 그 현장에 가족들이 모이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누가는 예수님의 친지들과 그를 따르던 여자들이 모두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임의 십자가 처형 순간을 지켜보았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눅 23:49). 더구나 그 어떤 공관복음서도 예수님이 마리아를 제자에게 부탁한다는 이 이야기를 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이 전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인지, 다른 하나는 요한이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입니다. 이 본문 이야기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이 이야기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일부에게만 전승된 것인지, 아니면 순전히 요한의 개인적인 창작인지 지금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다만 요한복음이 기록된 100년경의 그리스도교가, 특히 요한 공동체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라는 여자를 신학적으로 해석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요한이 예수의 어머니를 사랑받는 제자의 어머니가 되도록 묘사한 것은 메시야시대의 이브와 그 자손의 새 백성을 탄생시키는 딸 시온에 관한 구약성서의 주제들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으로 예수님의 ‘효도’를 거론한다는 것은 성서의 중심으로부터 한참이나 먼 이야기입니다.
예수에게 마리아는 누구인가?
그렇지만 예수님에게 어머니 마리아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복음서가 별로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뿐이지 예수님은 분명히 마리아를 어머니로 둔 아들로서의 삶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아버지 요셉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요셉이 일찍 죽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긴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혼자 살게 된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했을 거라는 주장입니다. 어쨌든지 아버지인 요셉과는 달리 어머니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삶에 깊숙하게 연관됩니다. 과연 예수님에게 마리아는 어떤 존재일까요? 좀더 본질적으로 이 질문은 곧 예수님에게 가족은 무슨 의미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족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 하는 사실을 정확하게 재구성하기는 힘들지만, 복음서가 우리에게 보도하는 정보와 복음서 전체가 말하는 영적인 가르침을 함께 연결해서 해석한다면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예수님이 효자였다고 설교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교적인 가족관계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종합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 중에서 확실한 것부터 검토해야합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출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 30세에 집을 떠났습니다. 그가 출가하면서 어머니인 마리아와 의논했을까요? 마리아는 아들 예수님에게 무슨 반응을 보였을까요? 예수님은 동생들에게 어머니를 잘 모시라고 타일렀을까요? 아버지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면 어머니와 동생들만 남겨놓고 출가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이 훨씬 무거웠을 텐데, 그래도 예수님은 가족을 결국 떠났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좀더 진전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왜 가족을 떠나야만 했을까요? 가족들과 함께 지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수는 없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생각이 어디에 있었는지 잘 모르지만, 예수님의 출가로 인해서 가족들과 친지들이 매우 당황했다는 사실은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에 관한 나쁜 소문들이, 즉 예수님이 귀신들렸다는 소문이 나사렛 동네에 알려지면서 친지들과 가족들은 예수님의 활동을 막아보려고 나선 일이 있습니다.(막 3:20-22).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까지 예수님을 붙들러 나왔습니다(막 3:31 이하).
저는 예수님의 출가가 필연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족이 싫다거나 혼자서 자유롭고 편하게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영성을 가족들이 이해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자신들의 식구 이상으로 인식할 수 없었던 어머니나 형제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신성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본질과 정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고향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인간의 선입관이 모든 거룩한 힘들을 파괴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그가 만약 성숙한 정신세계로 들어가려고 한다면 거의 혈연적인 관계만 요구하는 가족으로부터 하루빨리 독립해야만 합니다. 특히 부모로부터의 독립은 절대적입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자식들은 하루라도 빨리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모들은 자식의 정신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있는 어린아이로 머물러 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으러왔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막 3:33-35). 마가복음의 설명이 예수님의 입장을 가장 정확하게 서술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또 어떤 때에는 원수는 네 식구라고 말씀하셨다는 걸 보면 예수님이 단지 혈연이라는 사실로 인해서 벌어지는 반생명적 현상을 정확하게 뚫어보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모든 인간관계, 가족관계를 파괴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처럼 가족 해체의 위기에서는 가족관계를 강조할 필요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요즘의 반인륜적인 행태는 가족의 위기라기보다는 전반적인 인간성 상실의 위기입니다. 생명지향적인 삶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공동체도 없고 자기만 있을 뿐입니다. 인간성 상실의 한 표본이라 할 가족 이기주의는 보편적인 생명 지향성을 상실하게 만들고, 그것은 결국 가족 공동체까지 해체시킵니다. 이런 점에서 진정한 효도는 자기와 이웃과 공동체 전체에 생명의 영이 작동한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그런 운동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훨씬 근본적인 차원에서, 가정은 그 구성원들이 이런 생명의 영에 순종하며 살도록 도울 때만 의미 있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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