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그리스도론적 정체성
가훈표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창조행위,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로부터 구해낸 사건, 가나안 정복을 비롯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는 사건에 관한 일련의 보도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일상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어떤 집의 소가 남의 밭에 들어가서 손해를 입혔을 때, 가난한 사람의 옷을 담보로 잡았을 때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관한 지침, 또는 먹을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에 관한 규정이 그런 것들입니다. 구약성서가 이렇게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고 해명하는 이유는 야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실제적인 삶에서 구체화하기 때문입니다. 신약성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성서는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해명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관한 구체적인 지침도 담고 있습니다. 신약성서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다른 일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먹고,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등, 일상적인 모든 삶을 살아야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다루고 있는 부모와 자녀를 중심으로 한 가족에 관한 지침도 바로 그런 것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던 가훈표(家訓表)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 가훈표는 엡 5:21-6:9에서 볼 수 있듯이 가정을 구성하고 있는 세 가지 관계입니다. 하나는 남편과 아내(5:21-33)이고, 둘째는 부모와 자녀(6:1-4)이며, 셋째는 주인과 종(6:5-9)입니다. 본문이 다루고 있는 이 세 가지 관계에 관한 가훈표는 골로새(3:18-4:1)를 원본으로 합니다. 그런데 골로새서와 에베소서가 동일하게 부부관계나 부모와 자녀 관계만이 아니라 주인과 종의 관계까지 가정 윤리로 담고 있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낯섭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회구조에서는 한 집안에 종을 두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교가 주인과 종의 관계를 가정 윤리의 한 대목으로 받아들였다는 게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다만 오늘 우리는 성서가 역사를 무조건 초월하는 말씀이 아니라 그 당시의 구체적인 삶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주어진 말씀이라는 사실만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다루고 있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영원불변하는 절대적인 규범이라기보다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 당시 상황에서 선택한 최선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을 충분히 이해한 다음에, 그것이 가리키는 근원을 오늘 우리의 삶에서 재해석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삶의 지평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베소서 기자가 오늘 본문에서 말하려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일단 밝히는 작업은 중요합니다.
자녀의 순종
부모와 자녀에 관해서 진술하고 있는 오늘 본문은 다른 두 교훈과 마찬가지로 우선 지위가 낮은 사람인 자녀에게 교훈을 줍니다. “자녀 된 사람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구약성서의 십계명을 인용합니다. 십계명에 따르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복을 받고 오래 사는 길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 거룩한 말씀으로 생각한 구약성서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에 따라서 에베소 기자는 율법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나 사회윤리, 전통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소홀하게 다루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도 역시 ‘충효’를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걸 절대적인 가치로 여겼다는 뜻이겠지요. 유대교의 십계명도 그 중의 하나인데, 에베소 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부모 공경은 약속이 붙어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이 말은 곧 부모 공경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겠지요.
십계명에서 언급하고 있는 부모공경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는 이런 가르침을 지나치게 일반화하기 때문에 근본의미를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대교적인 전통에서 보모공경은 아주 구체적인 것입니다. 그들의 문헌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비에 대한 자녀의 의무는 어떤 것인가? 아비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입을 것과 덮을 것을 주며, 아비를 들고 나게 하고, 아비의 얼굴과 손과 발을 씻어 주는 것이다. 아들이든 딸이든 그렇게 해야 한다.”(Tos, Qid 1장 11절) 이 내용은 곧 자녀가 어렸을 때 부모가 자녀에게 베푼 것입니다. 이 말은 곧 부모공경은 서로 간에 생존을 책임진다는 의미입니다. 새로 태어난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키우는 것이나 기력이 소진한 부모들을 먹이고 입히고 움직여주는 일은 한 가정이나 사회가 생존해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입니다.
우리나라의 고대시절에는 아직 죽지 않은 노인들을 무덤에 묻는 고려장 습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도 몽고의 일부 유목민들에게는 그런 전통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함께 유목생활하기 힘든 노인들을 일정한 장소에 남겨 두었다가 몇 달 후에 와서 죽었으면 장사 지내고, 살았으면 다시 먹을 걸 준다고 합니다. 우리의 눈에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런 방식이 아니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전통을 유지했을 뿐입니다.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스스로 생존이 어려운 노인들을 위한 양노원이나 요양원 시설이 많이 세워지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 노인들은 자신들이 그걸 감당하고, 능력이 없는 노인들은 자녀들이 그걸 부담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안 되는 분들을 위해서는 국가가 책임을 져야할 텐데, 우리나라의 경제사정이 그런 정도까지 미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노인들을 요양원으로 보내는 것을 옛날 분들이 본다면 아마 말세라고 생각하겠지요. 자녀의 입장에서 요양원 제도가 옳은지, 아니면 직접 함께 살면서 뒤치다꺼리를 감당하는 게 옳은지 단정적으로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도 인류는 모두의 삶을 가장 효율적으로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그런 대안들을 찾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이 말은 곧 부모공경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오늘 우리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우리가 찾아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에베소 기자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유대교적인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교적인 해석을 합니다. 그는 부모를 “주 안에서”(엔 퀴리오) “순종”하라고 가르칩니다. 에베소 기자에 따르면 이제 유대교적 부모공경이 ‘주 안에서’와 ‘순종’이라는 특징으로 변화됩니다. 공경과 순종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우리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 기자가 사용하는 ‘순종’이라는 개념은 단지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아니라 나머지 두 가지 관계, 즉 부부 사이의 관계나 주인과 종의 관계에도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고, 종들은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는 가정을 구성하는 모든 인관관계의 초석이 바로 순종에 있다고 보아겠지요.
그러나 이 순종은 단지 수직적인 의미만 담고 있는 게 아닙니다.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고, 종들도 역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이 주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녀들도 역시 “엔 퀴리오”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에베소 기자는 자녀가 부모에 대해서 지녀야할 태도를 단지 헬라철학적인 차원의 휴머니즘이나 유대교적 차원의 율법에 머물지 않고 전혀 새로운 차원인 그리스도론에서 제시한 것입니다. 자녀들은 주님 안에서, 또는 주를 따르듯이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말입니다. 이 말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는 다음에 나오는 부모를 향한 에베소 기자의 가르침과 함께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부모의 책임
에베소 기자는 부모들에게도 단단히 그 책임을 묻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소극적인 것과 적극적인, 두 가지입니다. 소극적인 것은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입니다. 개역성서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번역했습니다. 에베소 기자는 부모들이 범하기 쉬운 실수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했습니다. 자녀들은 어렸을 때 부모 앞에서 거의 무방비의 상태이기 때문에 부모에 의해서 좋은 영향을 받을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심리적으로 큰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부모에 의한 상처는 일반적으로 말이나 신체적인 폭력에 의해서 일어나지만, 어떤 점에서는 부모의 지나친 집착에 의해서 일어날 때도 많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에는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키우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부모들이 자녀들을 어떻게 키워야할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자녀들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떤 기준으로 대하는 게 최선인지 우리에게 판단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입니다. 모른 척 하고 지나가야 할는지, 말로 잘 타일러야 하는지, 또는 눈물이 나도록 따끔하게 훈계해야 하는지, 또는 매를 들어야 할는지 누가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물론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기만 하면 이런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그 사랑 자체가 주관적인 감정에 치우칠 뿐이지 참된 생명의 능력으로 드러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에베소 기자가 충고하듯이 우리는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않겠다는 소극적인 자세가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런 소극적인 것만으로 부모로서의 할 일을 다 한 것은 아닙니다. 성서 기자는 이제 적극적인 부분을 언급합니다. 공동번역은 “주님의 정신으로 교육하고 훈계하며 잘 기르십시오.”로 번역했고, 개역개정판은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번역했으며, 루터는 “주님을 향한 교훈과 훈계로 키우라.”고 번역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 가장 가까운 번역은 개역개정판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주의 교훈(파이데이아)과 훈계(누테시아)로 키우라는 것입니다. 파이데이아는 discipline, training(훈련)이라는 뜻이며, 누테시아는 instruction, warning(지시, 경고)라는 뜻인데, 어떤 학자들은 전자는 매를 드는 교육이고, 후자는 말로 하는 교육이라고 구분하지만 여기서의 핵심은 ‘주’에 있습니다. 주의 가르침으로 자녀들을 키우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곧 부모가 자녀들에 대해서 지녀야 할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저는 에베소 기자가 인간의 한계를 정확하게 진단했다고 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판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이렇게 소극적인 데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적극성은 오직 주님 앞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에 근거해서만 자녀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가르치려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주님의 교훈과 훈계가 무엇인지 아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교훈과 훈계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훨씬 근원적인 생명의 세계에 맞닿아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 본문이 부모공경이라는 십계명을 인용하면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치지만, 예수님은 가족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원수가 자기 식구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일반적 윤리와 규범을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부모공경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 삶의 근거를 이런 가정의 위계질서나 친구관계에 놓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놓았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참된 평화와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 가정의 정체성은 매우 혼란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 가정은 명분으로만 그리스도인들이었지 실제로는 완전히 세속적인 가치관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그들은 신앙과 상관없이 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만을 최고의 목표로 삼습니다. 또 어떤 가정은 일종의 종교적 열광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이들은 모든 삶의 의미를 교회에 나가는 것에만 묶어두기 때문에 실제적인 삶의 리얼리티를 잃어버립니다. 이러한 양 극단적인 현상이 서로 구분되기도 하고, 뒤섞이기도 하는데, 양자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훈계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는 데에서는 동일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들이, 남편과 아내가, 형제와 자매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사건과 그의 운명을 그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그럴 때만 그리스도인 가족의 정체성이 확보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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