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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거듭나지 아니하면 (요 3 : 1 ~ 15)

▣ 들어가는 말

- “고운 건 더럽고 더러운 건 고웁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극이 시작하자마자 세 마녀가 천둥과 번개, 그리고 빗속에 등장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몇 마디 말을 하고 사라지지요. “장소는 어딘데?” “황야야” “그곳에서 맥베스를 만날거야.”

‘맥’은 ‘아들’을 의미하고, ‘베스’는 ‘여인’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맥베스는 ‘여인의 아들’을 뜻하는 이름이지요. 여인에게서 난 사람, 즉 모든 인간을 일컫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마녀들이 천둥과 번개와 비가 내리는 ‘황야’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지요. 성경에서 황야, 광야는 신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황야는 인간이 겪는 고난과 고통의 자리로 볼 수도 있고, 고난과 고통이 끊이지 않는 인생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삶의 자리에서 거룩한 신을 만나거나 악한 마녀를 만나거나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이 퇴장하기 직전에 함께 이야기합니다. “고운 건 더럽고, 더러운 건 고웁다.” 이 말은 맥베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미와 추”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사랑과 증오”… 등이 혼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혼돈 속에서 어떤 것을 보고 듣고 선택할지, 또 어떤 것을 거부하고 외면하며 배제하며 살지 우리의 선택에 달린 것이지요.

 

- 그리스도인의 혼돈

오늘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혼돈 그 자체인 것 같습니다.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선과 악을 구별하고 올바름을 선택하고 따르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경계가 무너졌고 절대적 선과 절대적 악이 사라져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잘 사는 것이 마치 외줄 타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를 더욱 난감하게 하는 것은 바로 신앙에 대한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며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정작 분명한 확신과 감격과 기쁨은 점점 더 희미해져만 갑니다. 신앙과 성경에 관한 주장도 너무나 다양합니다. 저마다 각자의 논리와 합리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정말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바른 신앙인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무엇인지, 나는 정말 구원을 받은 것이 맞는지…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교회와 신앙에 대한 공격은 또 얼마나 강력한지. 거대한 쓰나미와 같은 과학과 이성과 합리성 앞에서 우리의 신앙은 얼마나 연약한지… 말 그대로 혼돈 속에 살고 있습니다.

 

 

▣ 니고데모

- 유대인 지도자

오늘 본문에 니고데모라고 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리새인 중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는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라는 인물을 찾아온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던 것이지요. 바리새인은 당시 유대인 중 6천 명 이하의 소수 엘리트 집단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생명처럼 철저하게 지키는 종교적으로 매우 치열했던 사람들이며, 성경과 전통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모든 율법을 지킨다는 도덕적 윤리적 우월감과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대단한 사람들이었지요.

또한 ‘유대인 지도자’라는 표현에서 지도자는 헬라어 ‘아르콘’이라는 단어인데, 이는 ‘통치자’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산헤드린 공회 의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 최고 통치기구로 대제사장을 포함하여 72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금으로 보자면 국회의원과 비슷하다 할 수 있으나 사법, 입법, 행정 등 모든 것을 결정하는 기구였기에 국회의원의 권력을 훨씬 더 능가하는 힘을 가졌다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니고데모라는 이름은 ‘승리한 백성’ ‘백성의 정복자’라는 뜻인데, 헬라식 이름입니다. 그는 유대 사람인데 헬라식 이름을 가졌고, 사회에서 상당한 지위와 명예를 가진 것으로 보면, 헬라교육을 받은 지성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종의 유학파인 셈이지요.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헬라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대라는 나라를 넘어 국제적인 안목을 가진 상당히 세련되고 뛰어난 지식인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는 요한복음에만 세 차례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의 3장,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문제 등으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체포하라고 사람들을 보냈는데, 그들이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7:46) 말하며 잡아 오지 않자, 바리새인들이 화를 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7:51)라고 예수를 옹호하는 장면의 7장, 그리고 19장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함께 장사를 지내주는 장면에서 등장합니다.

 

- 진지하고 합리적 지성인

그런 백성의 지도자가 예수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를 향해 “랍비여”라고 부릅니다. 랍비라는 칭호는 아무에게나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백성들의 삶의 문제에 대해 성서를 올바르게 해석해 주며 삶을 인도하는 스승을 일컫는 말입니다. 한낱 목수 따위에게, 제대로 된 교육도 받아본 적이 없는 무명의 인물에게 주저하지 않고 랍비라고 부르는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는 예수를 자세히 살펴본 것 같습니다. 예수가 행하는 기적들과 가르침을 보니, 그것은 하나님께로 왔음이 틀림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표적(기적)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눈을 가졌습니다. 당시에 수많은 지도자와 지식인들이 예수의 모습을 보았으나, 그들은 시기하고 질투하고, 폄하고 두려워할 뿐. 예수의 가르침과 표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예수가 행하는 표적의 의미를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기꺼이 예수를 만나러 옵니다. 사회적 지위와 계급 따위를 생각지 않습니다. 그만큼 겸손한 인격을 소유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진정으로 진리에 대한 갈망, 목마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만족과 오만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무지를 인식합니다. 수많은 성경에 대한 지식과 헬라 교육을 통해 당대의 최고의 학문들을 알고 있었으나, 그의 진리에 대한, 진정한 구원에 대한 앎이 자신에게 없음을 압니다. 그리고 기꺼이 그 해답을 찾아 예수에게 나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은 참 훌륭하고 멋진 사람입니다. 진리 앞에 겸손할 줄 알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며, 신분과 사회적 계층 따위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며, 자신보다 나은 이에게 기꺼이 배움을 청할 줄 아는, 진정한 성장과 앎을 위해서 행동할 줄 아는 … 사람들에게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 틀림없습니다.

 

 

▣ 무엇을 찾는가?

- 왜 예수를 찾아왔을까?

그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니고데모는 왜 예수를 찾아왔을까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윤리적으로 지식적으로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 될 만한 사람이, 인격적으로도 너무 훌륭한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예수를 찾아와야 했을까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서.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에게 묻습니다. “자네한테 타락하지 않은 것이 단 한 개라도 남아 있다고 생각하나?”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자유와 사랑을 꿈꾸던 윈스턴은 체포당하고 고문을 당합니다.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동지라고 믿었던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을 고문하며 던진 질문이지요.

니고데모는 참 괜찮은 사람이었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삶을 살고 있었지만, 자기 안에 있는 깊은 어둠과 절망을 보았던 것이 아닐까요. 오래 동안 교회를 다니며 나름대로 좋은 사람으로, 좋은 신앙인으로 살기 위해 애써왔지만 우리는 여전히 깊은 불안과 어둠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타락하지 않은 것이 단 하나라도 있을까요. 그 무엇 하나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 우리를 구원해 줄 선한 것이 남아 있나요? 나를 들여다보면 추악한 욕망과 자잘한 욕심들과 비겁함이 가득 차 있는데…

그러니 우리는 여전히 혼돈과 불안 속에서 살 수밖에 없지요. 구원을 찾아 예수께 나아올 수밖에요.

 

- 밤에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그는 왜 굳이 밤에 찾아왔을까요? 대단한 권력자가 밤중에 예수를 찾아온 것이 요한에게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굳이 시점을 밤으로 밝힌 것을 보면 말이지요.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르지요. 성경에 대한 최고의 지식인이 예수를 찾아가 질문을 한다는 것이 부끄럽고, 다른 바리새인들이나 권력자들에게 알려질 경우, 입장이 곤란할 수 있었을 테지요. 만약 그가 공개적으로 예수를 랍비로 부르며 예수를 하늘로부터 온 자로 인정하게 된다면 자신이 지금까지 누리고 있는 종교적 기득권과 직책 등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남기게 될 것은 불을 보듯 한 일이었습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다른 복음서들이 주로 예수의 역사적 특성들을 강조한 것과는 달리 요한은 주로 헬라 세계를 향한 복음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명백하게 지식인들을 위한 변증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지요. 그래서 매우 치밀하고 철학적입니다. 따라서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왔다고 기록한 것은 단순한 시간의 시점을 말한다기보다는 니고데모의 실존적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니고데모는 지식인이며, 신앙인이지만 그의 상태는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요.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사람, 신실한 신앙인, 합리적이고 지적으로 우수해, 미신 같은 비이성적 신앙에 빠지지 않는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의 진정한 상황, 실존은 어둠과 혼돈, 절망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 니고데모의 진짜 문제

그러한 깊은 혼돈과 어둠 가운데서 니고데모는 예수를 찾아옵니다. 먼발치에서 예수의 행적을 살펴보았는데, 당신의 말과 행동, 표적 등은 틀림없이 하나님께로 온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구원과 안식을 얻기 위해, 길을 찾기 위해 예수께로 온 것이지요. 틀림없이 예수는 답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니까요.

 

예수는 니고데모를 보자마자 그가 가진 본질적인 문제를 꿰뚫어 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너는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다고 하지만, 구원을 얻겠다고 하지만, 진정으로 성숙해지기를 바란다고 생각하지만, 틀렸다. 무엇보다 먼저 “거듭나야 한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입니다.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는 니고데모의 허위와 허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맙니다. 너는 너의 결핍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너는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 될 것이라 착각하고 있다. 너의 그 우아한 삶의 태도와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지적인 노력, 세상의 불의에 대한 적당한 적개심과 민족에 대한 애국심과, 적절히 그들을 도우며 사는 자신의 노력과, 신에 대한 감사와 기도와 경건 생활… 그 속에 숨어서 진짜 너가 누구인지 외면하고 있다. 도망치고 있다. 그렇게 숨고 도망치고, 감추고 가면을 쓰면서, 적절하게 사람들의 존경과 우러름을 받으며 살다 보니, 정작 너 안에 도사리고 있는 깊은 어둠은 외면하고 있다. 너 안에 생명이 없음을 너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애써 외면하고 있다.

 

- 거듭나지 아니하면

거듭나지 아니하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다시 진정한 생명을 잉태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다.” 이미 태어나 나이가 들어 늙어버렸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니고데모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입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뛰어난 랍비이자 성경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자가 예수의 말이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습니다. 주님은 다시 한 번 선포합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사람이 물로, 육체로 태어나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듯이,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존재할 수 없다. 살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이제 그의 질문은 진심이다. 간절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니고데모의 질문은 그가 이 세계의 정신과 논리에 사로잡혀 있는 자임을 드러내 줍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 외에 어떤 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도 신실하고 치열하게 좋은 사람, 좋은 신앙인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정작 그는 하나님의 신비, 절대적인 은혜를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인정할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은 당연히 자신의 노력과 땀의 결실로 성취해야만 하는 것이지, 공짜로 값없이 주어질 수는 없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 나가는 말

- 거듭남이 먼저다.

니고데모의 진짜 문제는 성화를 추구하지만 칭의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교회의 다양한 활동을 하지만 무서운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거듭나지 않았다면, 아무리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하려고 노력해 보아도, 우리는 여전히 어둠에 속한,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좋은 사람일 수는 있지만, 그리스인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루터가 벼락을 치는 순간에 엄청난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 합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좋은 수도사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결국 “탑의 경험”을 통해 비로소 그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의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출생하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만이 영입니다. 중생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거듭날 수 있습니다. 바람처럼 성령 또한 사람의 의지로 조종할 수 없습니다. 그 기원과 방향을 알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신비입니다. 은혜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 이후 성장

니고데모가 등장하는 이후의 기사를 보면, 그의 삶이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밤에 속한 사람, 죄와 어둠과 영적인 무지의 사람이 예수를 만나 빛으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밤에 은밀히 예수에게 왔던 그가, 적극적으로 예수를 변호하고(7장) 모두가 두려워서 외면할 때, 제자들마저 흩어져버렸을 때, 예수의 시신을 장례를 치룹니다.(19장) 예수를 경험한 자, 거듭난 자들은 하나같이 삶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육체적으로 유대인으로 태어나는 것, 선민으로 태어나는 것,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는 것이 구원의 결정적인 것이라 믿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육체가 아니라 영적으로 다시 출생해야 한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우리가 아무리 치열하게 노력할지라도 결코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그 은혜를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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