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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거룩한 분노 (삼상 11 : 1 - 11)

2024년 9월 1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aVekvosBd-U?si=svo1SbpMllR_qJjq

▣ 들어가는 말

- 감정은 열등한 것인가?

‘남자는 세 번만 울어야 한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태어날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라가 망했을 때. 감정을 숨기는 것이 남자다움이나 성숙함을 보여주는 척도나 되는 양 우리는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왔습니다. 이성은 옳고 감정은 잘못인 것처럼 말이지요. 마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인간에게 반기를 든 동물들의 외침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고, 네 발로 걷는 것은 친구다’처럼 들립니다. 생각해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심지어, 램지재단 알츠하이머치료연구센터에 따르면 남성이 여성보다 잘 울지 않기 때문에 평균수명이 짧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특히 이 연구를 통해 사회적 관념 때문에 남성의 우는 횟수가 여성의 1/5 정도에 그친다고 합니다. 연구센터 빌 프레이 박사는 “남자가 여자보다 평균수명이 짧은 이유의 하나가 덜 울기 때문”이라며 “어릴 때부터 ‘우는 것은 남자답지 못하다’ 생각 때문에 잘 울지 않는다.”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건강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고쳐야 한다.” 조언합니다. 그러니 남성분들은 오늘부터 열심히 울기 바랍니다.^^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은 11살 소녀 ‘라일리’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주요 감정인 ‘기쁨’, ‘슬픔’, ‘까칠’, ‘분노’, ‘소심’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주인공의 행동과 기억을 관리하며 살아갑니다. 〈인사이드 아웃 2〉에서 주인공의 마음에 새로 등장한 감정 ‘불안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 역할이 있어.”(We all have a job to do.) ‘불안’은 위험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미래를 대비할 수 있게 하고, ‘분노’는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겼을 때 지킬 수 있게 해 주며, ‘질투’는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이 실현되지 않은 상태임을 알려주고, ‘우울’은 중요한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신호이지요. 이렇듯 감정은 우리가 이 세상에 적응하고 진화하면서 만들어진 일종의 생존 시스템이자, 지금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려주는 나침반의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감정은 이성보다 열등하지도, 나약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가진 가장 강력한 도구, 무기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를 인간일 수 있게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인지도 모릅니다.

- 분노란 무엇인가?

“화를 내며 보내기에 우리 인생은 얼마나 짧은가!” 고대 로마 철학자 세네카(BC 4∼AD 65)의 말입니다. 네로 황제의 가정교사이기도 했고, 네로가 황제에 오르자 자신은 집정관이 되어 통치하기도 했습니다. 또 네로 황제에 의해 자결명령을 받아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 인물입니다. 그의 저서 『화에 대하여』는 인간이 화를 내는 일의 부질없음을 지적한 고전으로 꼽히지요. 세네카가 볼 때 분노는 악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지 말라고 합니다. 평정심을 유지할 줄 아는 현자(賢者)는 세네카의 이상형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감정은 그저 지혜를 무너뜨리는, 평정심을 깨는 쓸모없는 악일 뿐이지요.

반면, 플라톤에게 있어서 분노는 좀 다릅니다. 『국가』에 나오는 ‘튀모스’라는 덕목은 기개 혹은 기상으로 번역되는데, 불의에 대해 느끼는 공분(公憤)을 의미합니다. 튀모스는 “부정의에 대항하여 도덕적 분개를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영혼의 능력”이며 “이기적이기보다 이타적이며, 사적인 것보다 공동선을 지향한다.” 멋진 통찰이지요. 역시 플라톤입니다. 플라톤에게 정의가 실현되는 이상 국가의 성공적인 건설과 안전은 튀모스 교육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플라톤은 오히려 불의에 대한 분노야말로 그가 꿈꾸는 이상세계를 향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본 것입니다.

우리의 분노는 어떤지요. 언제 분노하나요. 나의 자존심이 상할 때, 내 마음을 몰라 줄 때, 하는 일이 잘되지 않을 때, 배우자가 말을 듣지 않을 때…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익어가고 깊어져 가야 할 터인데, 더 완고해지고 더 고집불통이 되고 사소한 것에도 화를 참지 못하는 못난이 사촌이 되어가는 것 같아 부끄러워집니다. 그것도 아니면 감정이 메말라 화도, 웃음도 잃어가고 있을까요.

 

▣ 거룩한 분노

- 길르앗 야베스

오늘 본문에는 야베스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길르앗 야베스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베스는 요단강 동쪽 위치의 므낫세 지파의 땅입니다(민32:39-40). 그런데 사사기에 보면(삿21:8-12), 야베스 사람들은 미스바에서 있었던 하나님의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엄청난 징벌을 받게 됩니다. 주민들 대부분이 죽임을 당합니다. 그래서 아주 소수만이 살아남아 겨우 지파의 명맥만 이어가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왕이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듯이, 암몬 왕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를 침공합니다. 그들은 이미 요단강 오른편의 부족들을 기습해서, 그들의 오른쪽 눈을 빼버렸습니다. 그들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부족들을 하나씩 정복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야베스를 공격하기 전에 그 주변의 몇몇 부족들을 공격해서 초토화했고, 피정복민들의 오른쪽 눈을 빼버립니다. 한쪽 눈을 빼는 것은 전쟁 수행능력을 떨어뜨리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상대에게 엄청난 치욕을 안겨주는 행위였습니다. 암몬과 나하스가 얼마나 잔인했는지를 알 수 있지요.

그리고 그러한 전쟁에서 주변에 흩어져 있던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도 야베스로 도망쳐왔겠지요. 그리고 마침내 암몬이 야베스에 당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야베스 역시 암몬과 대적할 능력이 없습니다. 엄청난 암몬의 군대와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였습니다. 야베스 사람들은 무조건 항복하겠다고, 그러니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암몬을 섬기겠다고, 조약을 맺을 것을 요청합니다. 사실상 백기 투항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자비한 나하스는 야베스 사람들에게 치욕적인 조건을 제시합니다. 협정은 협정이고 너희들 모두의 오른쪽 눈을 빼겠다고, 그렇게 하면 항복을 받아주겠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잔인하기 짝이 없는 놈들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전역에 사람을 보내서 구원자를 찾아보도록 허용해 줍니다. 이런 태도는 얼마나 오만방자한지, 그리고 그들의 군사력이 이스라엘 보다 얼마나 월등한지를 보여줍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치욕과 두려움에 몸서리칩니다. “모든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더니…” 이런 모욕이 또 있을까요? 그러나 그들에겐 힘이 없습니다. 강 건너 동족 야베스 사람들을 구해줄 힘도 없고, 야베스 다음은 그들의 차례가 될 것입니다. 아직 제대로 된 국가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이곳저곳에서 지파별로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는 형편입니다.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 사울의 분노

밭에서 돌아오던 사울이 이 소식을 듣습니다. 왕으로 선출되긴 했으나 제대로 된 군대도, 궁궐도, 국가 조직도 없는 명목뿐인 왕입니다. 사실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이 됩니다. 그리고 엄청난 분노로 치를 떱니다.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신기하게도 그의 엄청난 분노가 성령에 사로잡혔다는 표식이 됩니다. 그 자리에서 사울은 소를 잡아 각을 뜨고 그 각 부위를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 보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 분노에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이 소와 같은 꼴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사울의 분노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고, 결국 그 분노는 암몬 군대를 철저하게 격파해내고 맙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다시금 평화를 되찾았고, 불안했던 사울의 왕권도 더불어 확고해지게 됩니다.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신기하지 않습니까? 분노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표시였다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하나님의 사람들은 온유하고, 사랑이 많고, 평화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와는 전혀 다른 반응, “분노”야말로 하나님 사람의 표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사자가 부르짖은즉

기원전 780년경 남부 왕국 유다의 테코아(드고아) 출신의 한 목자가 갑자기 여호와의 힘에 압도당합니다. 아모스는 신을 자신에게 익숙한 모든 것을 낚아채 가는 파괴적인 힘으로 경험합니다.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느낍니다. “사자가 으르렁거리는데 겁내지 않을 자 있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 전하지 않을 자 있겠느냐?” 헤브라이 예언자들은 신비주의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시작한 규율 잡힌 오랜 탐구 끝에 내부로부터 깨달음을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아모스의 경험은 인도나 중국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깨달음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그는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힘에 사로잡힌 느낌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힘은 그의 의식적인 삶의 정상적인 질서를 헝클어놓았고, 이제 자기 삶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에고의 자리를 차지하여, 아모스를 완전히 다른 세계에 던져버린 것입니다.

아모스는 북부에 도착했을 때 이스라엘의 왕립 성전 가운데 하나인 베델 성전에서 여호와의 모습을 봅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하나님입니다.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인자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너무나 두렵고 무서워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내가 지진을 일으켜 저들을 모두 멸하리라. 살아남은 자들은 칼로 쳐 죽이리니, 아무도 도망하지 못하리라.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아모스는 위로의 메시지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한 여로보암은 죽임을 당하고, 이스라엘은 파괴를 당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제가 살던 땅에서 떠날 것이다.”

이 시대의 영성은 우상 파괴적입니다. 종교는 소중하게 간직해 온 관행이나 믿음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외려 사람들에게 전통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신의 행동을 비판할 것을 요구합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자존감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습니다. 민족의 에고에 구멍을 내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교를 이용하여 자존감을 강화하는 대신 정의와 공평을 앞세워 개인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야 했습니다. 아모스는 스스로 분노를 경험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분노를 느낀 것입니다. 아모스에게 종교는 공동체의 자부심이나 자존감을 부풀리는데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주의를 버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 나가는 말

- 무엇에 분노하십니까?

무엇에 분노하고 계십니까? 자신의 입지나, 이익이 손상당할 때, 내 자존심이 무너질 때 우리는 분노합니다. 그 중심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 무엇 하나라도 나에게 손해가 되는 것에 우리는 견디지 못합니다. 우리는 진정 누구입니까? 어떤 존재입니까?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분명 감정은 특히 분노는 내가 누구인지 드러내는 도구가 분명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보는 일은, 나의 진정한 존재를 직면하는 일은 언제나 너무나 두렵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분노는 어떤 모습인가요. 우리는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분노하고 있을까요.

- 『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나치 독일의 점령기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던, 몇 년 전 94세의 나이로 사망한, 스테판 에셀이라는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인의 작은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 책은 『분노하라』 입니다. 그는 이 시대를 향해서, 특히 젊은 세대를 향해 “분노하라” 메시지를 보냅니다. 에셀은 나치로부터 레지스탕스가 프랑스를 해방했던 그때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레지스탕스를 움직이게 했던 동기, 즉 분노를 되찾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찾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무엇 때문에 분노하는지 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분노해야 하는 것에 분노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러한 분노야말로 “폭력을 멈추게 하는 확실한 수단”이라 말합니다. 잘못된 부당한 폭력에 맞서지 않으면, 절대로 그러한 폭력을 막을 수 없고, 그러한 불의에 분노하는 것이야말로 불의를 막는 확실한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제발 좀 찾아보시오, 그러면 찾아질 것이오.”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입니다. 진정한 분노의 대상을 찾아야 합니다. 불의에 대해, 부정의에 대해, 부당한 강자들에 대해, 정권을 향해, 추악한 교회를 향해, 온갖 비리들을 향해…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향해서 말입니다.

- 거룩한 분노

성경은 이와 같은 분노를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원수들을 향한 삼손의 분노, 골리앗을 향한 다윗의 분노, 심지어 성전에서 채찍을 들었던 예수의 분노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한 분노’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분노로 표출된 것입니다. 정의와 사랑, 진리가 훼손당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할 때 일어나는 분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었을 때” 일어나는 분노입니다. 우리의 분노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영혼을 지키는 분노마저 사라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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