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
사 49:1-7, 주현 후 둘째 주일, 2017년 1월15일
1 섬들아 내게 들으라 먼 곳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2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드사 그의 화살통에 감추시고 3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4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5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6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7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왕들이 보고 일어서며 고관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신실하신 여호와 그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가장 절실하게 만나보고 싶습니까? 유명 배우나 가수인가요? 대통령이나 노벨상 수상자, 또는 외국으로 떠난 친구인가요? 돌아가신 어머님이나 아버님을 보고 싶은 분들이 있을 겁니다.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자식이 있다면, 그 자식이 가장 보고 싶겠지요. 다 좋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제가 만나보고 싶은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 사람처럼 세상과 하나님을, 그리고 자신의 삶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살아 있다면 찾아가서 그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가 누군지를 알면 여러분도 저와 똑같은 생각이 들 겁니다.
제2 이사야
이 사람은 지금부터 2천5백 년 전인 기원전 6세기 중반에 활동한 유대의 선지자입니다. 6세기 중반은 유대의 바벨론 포로 시기입니다. 유대는 당시 대제국이었던 바벨론과 전쟁을 벌이다가 기원전 587년에 나라를 잃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완전하게 파괴되었습니다. 바벨론 총독이 유대 지역을 다스렸고, 많은 수의 귀족들과 지식인들이 바벨론에 잡혀갔습니다. 그런 와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신탁을 받아 말씀을 선포한 한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사 40-55장이 바로 그의 작품입니다. 신학자들은 이 사람을 가리켜 제2 이사야로 부릅니다. 우리는 편의상 이사야로 부르겠습니다. 그는 당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예민한 영혼의 소유자였습니다.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통찰해내는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사 49:1(b)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태’에서부터 여호와가 자기를 부르셨다는 말은 물론 문학적인 수사입니다. 그렇다고 없는 걸 그럴 듯하게 말한 건 아닙니다. 이사야가 여호와와의 관계를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도대체 무슨 경험을 했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우선 일상에서 비슷한 경험을 찾아보면 이렇습니다. 숙명적인 만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녀 관계에서도 그렇고,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도 그런 만남이 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빛을 내는 경우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이건 운명이야, 하고 말합니다. 어떤 절대자의 섭리로 이미 오래 전에 만남이 결정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운명을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받아들였습니다. 거룩한 경험입니다. 이런 거룩한 경험이 사람을 살립니다. 생명 충만감을 허락합니다.
현대인들에게 이사야의 이런 경험은 낯섭니다. 삶을 물량적으로만, 계량적으로만, 기계적으로만 대하는 삶에 길들여진 탓입니다. 돈이 많아야만 행복하게 살 수 있다거나 가난하면 불행하다는 고정관념에 묶여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부와 건강과 권력과 명예는 선이고, 가난과 병과 고난은 악입니다. 우리가 이런 조건에 영향을 받는 건 분명합니다. 그걸 부정하고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거룩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더 깊은 차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차원이 느껴지지 않으면 이사야의 경험은 딴 나라 이야기가 됩니다. 기독교 교리 중에서 한 가지만 예를 들면,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칭의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에 의해서 옳다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믿는 사람은 세상이 제공하는 기준에 묶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깊은 생명을 경험합니다. 이런 신앙이 깊어진 사람은 이사야처럼 여호와가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다.’고,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이 시원적인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이런 고백과 비교할 때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이사야는 위대한 사람이니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지만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불가능한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사야의 이런 고백은 위대한 사람이라거나 평범한 사람이라는 말로 지나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을 시원적인 차원에서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은, 또는 그런 소명의식이 미미하다는 것은 삶의 가장 깊은 차원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목사나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호와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목사나 선교사가 된다 해서 여호와와의 관계가 숙명적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깊어지는 건 아닙니다. 이 소명은 전업 목사로 사느냐 일반 직업인으로 사느냐와 상관없이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필수적이고, 필연적인 사건입니다. 그런 경험이 없다면 여러분은 겉으로 아무리 열정적으로 산다고 해도 피상적인 데에 머무는 것입니다.
좀더 직접적으로 말씀드릴까요? 최소한 자기 삶을 성찰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살이에 끊임없이 쫓긴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삶의 허무를 늘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버텨내려면 쫓기지 않을 수 없고,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으니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세상살이에 쫓기면 허무에 떨어질 수밖에 없고, 삶의 허무에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세상살이에 더 쫓기게 됩니다. 악순환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이런 악순환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길을 알지도 못하고 찾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대충 교회 생활을 하면서 편안하고 즐겁게 사는 길을 선택합니다. 거기서 생명 충만감을 누리지 못하지만 어쩔 수 없이 거기에 안주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장 거기서 벗어날 묘수는 없습니다. 꾸준히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 게 최선입니다. 제가 오늘 2천5백 년 전에 살았던 이사야를 소개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을 이해하고, 그런 삶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도 어느 사이에 이사야와 비슷한 고백을 할 수 있는 순간이 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태에서부터 부르셨다.’고 말입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소명을 ‘종’으로 규정했습니다. 3절에서 ‘내게 이르시되 나의 종이요.’라고 했습니다. 5절에서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오.’라고 했고, 6절에서도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라고 했습니다. 구약학자들은 오늘 설교 본문인 사 49:1-6절, 그리고 42:1-4절, 50:4-9절, 52:13-53:12절을 ‘종의 노래’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종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으로 들립니다. 개인의 주권과 자유가 보장된 현대 사회에서는 더욱 더 그렇게 들립니다. 종은 세 가지 성격이 있습니다. 주인을 향한 절대 순종, 절대 의존, 절대 신뢰입니다. 이게 없으면 종이라는 개념은 성립되지 못합니다. 이런 성격이 겉으로는 부정적으로 들리겠지만 이사야에게는 절대적인 긍정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지금 공기를 대하는 태도가 이와 비슷합니다. 사람은 공기에게 절대 순종하고 절대 의존하고, 그리고 공기를 절대 신뢰합니다. 이사야는 여호와를 그런 대상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절대적인 대상을 경험한 사람은 다른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현대인들이 좌고우면 하고, 매 순간 흔들리는 이유는 절대적인 대상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절대적인 않은 대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절대적인 대상으로 경험했기에 자신을 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저도 그런 종으로 살고 싶습니다.
고난 받는 종
지금까지의 설명만 들으면 이사야는 어떤 열광적인 종교 경험에 들어간 것처럼 보입니다. 돈키호테처럼 비현실적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이사야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자신의 소명이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4a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이사야는 바벨론 포로 시절에 하나님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유대가 멸망했지만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걸 회복시키신다고 동족에게 설교했습니다. 그런 설교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모든 게 헛된 일이었습니다. 그럴만합니다. 지금 이사야의 말을 거부하는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이 살아있으며 능력이 크신 분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바벨론의 힘이 현실이었습니다. 바벨론의 법과 정치와 군사와 예술과 문화가 위대해보였습니다. 그들에게 이사야의 말은 공허한 헛소리였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는 목회에 실패한 목회자입니다. 그의 설교에 아무도 귀를 기울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 떨어지면 대개는 소명을 거두어들입니다. 나름으로 최선을 다 했지만, 이게 아닌가보다 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사야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4b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의 영적인 초점이 어디에 맞춰져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이사야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판단에 완전히 일임했습니다. 이게 쉽지 않습니다. 대개는 주변 사람들의 판단에 일희일비 합니다. 자식 키우는 일도 그렇습니다. 자식의 출세를 자랑으로 여깁니다. 자식이 시원치 않으면 사람들의 눈치가 보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다를까요? 욥 이야기를 잘 아실 겁니다. 욥은 졸지에 재산을 잃고 자식도 잃고, 아내도 떠나고 악성 피부병에 걸렸습니다. 당시에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일을 당했습니다. 자기가 당한 재난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말이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가까운 친구들이 죄를 회개하라고 충고했습니다. 욥은 그 말에 주눅 들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을 직접 받아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사야와 같은 심정입니다. 이런 태도가 어떤 이들에게는 고집불통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믿음을 핑계로 실제로는 자기 고집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있지만, 이사야의 경우는 그게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판단에 자신을 맡긴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변 사람들의 말이나, 자기가 세상에서 이룬 업적으로 부화뇌동하지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길을 잃으면 안 됩니다. 큰 줄기에서 옳지만 작은 부분에서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오류에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게 힘들어도 억지로 참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 봉사만 해도 그렇습니다. 정말 하기 싫고 힘든데도 억지로 꾹 참으면서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일단 귀한 태도이며, 그런 사람들로 인해서 교회가 힘을 얻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태도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평불만이 속에서 나오게 됩니다. ‘다른 사람은 요령을 피우는데 나만 이렇게 고생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은근히 억울한 느낌이 드는 겁니다. 또는 지금 고생이 많지만 하나님이 다른 방식으로 갚아주실 거라는 자기 합리화에 떨어집니다. 이사야는 그런 차원으로 하나님의 판단과 보응을 말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삶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고 그 사실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5b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라는 표현을 상투적인 것으로 보면 안 됩니다. 아주 실질적인 고백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창조주이며 생명의 근원이고, 세계의 참된 통치자로 믿었기 때문에 바벨론 제국을 비롯해서 그 어떤 세력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이 헛수고였고 무익하게 힘을 쏟은 것이었다는 사실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만을 절대 의지하는 종이 됨으로써 오히려 삶의 능력을 얻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아주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종’이라는 가장 낮은 자리에 들어감으로써, 즉 절대자와의 존재론적 관계에 들어감으로써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삶의 능력을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와 종의 노래
지금까지 저는 2천5백 년 전 바벨론 포로 시대를 살았던 한 선지자인 이사야를 여러분에게 소개했습니다. 그의 짧은 진술을 통해서 그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지향했던 방향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삶을 이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태’에서 부르고, 어머니의 ‘복중’에서 자기 이름을 기억하셨다는 확신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만이 삶의 능력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잘 안 될 겁니다. 이사야도 실제로 그렇게 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인물이 나타나기를 희망한 것입니다. 6b절을 보면 이게 더 확실합니다.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의 종은 ‘이방의 빛’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할 ‘존재’입니다. 이런 인물이 이사야 당대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설교는 그런 이가 오기를 갈망하는 염원이자, 희망이고, 기다림입니다. 그런 간절한 마음을 ‘종의 노래’에 담은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사야의 ‘종의 노래’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앞에서 종의 노래가 네 군데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중의 하나인 사 53:4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 뒤로 비슷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방식으로 십자가에서 죽었으나 하나님에 의해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습니다.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기에 예수님을 이방의 빛으로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종은 예수님이 유일합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그만이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 받은 종의 길을 갔고, 부활로 인해서 이방의 빛이 되었습니다. 그를 믿고 그와 함께 하는 것보다 우리의 삶에서 더 큰 위로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2017년 한 해, 예수님에게 더 가까이 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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