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16.(신 8:7-18)
광야와 가나안 사이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신명기 8:7-18절에는 전혀 다른 두 지역이 나옵니다. 하나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며, 다른 하나는 사람이 살기 힘든 척박한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 40년에 걸친 광야생활을 마감할 그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곧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지금 두 세계 사이에 걸쳐 있습니다. 광야라는 과거와 가나안이라는 미래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광야생활이 끝났지만 가나안에 완전히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간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했습니다. 마치 쪽방에 살던 사람이 50평 호화 주택으로 이사 갈 날을 받아놓은 형국과 비슷합니다. 이들을 향한 모세의 마지막 설교가 바로 신명기이고, 그 중의 한 대목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모세가 묘사하고 있는 가나안 땅은 풍요롭고 아름답습니다. 그곳은 골짜기나 산지나 시내와 샘이 흘렀습니다. 밀과 보리가 잘 자라며,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이 넘쳐났습니다. 가나안 땅은 아무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모세의 묘사는 물론 과장된 것입니다. 철광석과 동광석이 나온다는 표현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9b) 가나안 땅에는 그런 지하자원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광야와 비교하면 가나안 땅은 지상낙원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모세는 이 단락을 이렇게 찬송으로 맺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10절)
광야에서 늘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가난에 찌들려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순간이 왔다는 것만 생각하면 당연히 찬송을 불러야했겠지요.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모세는 걱정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과 금이 늘어나며 소유가 풍부하게 되면 이스라엘 민족이 교만해져서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이런 걱정은 기우(杞憂)에 불과할까요?
모세의 걱정은 공연한 게 아니라 역사적으로 확실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멀리 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가기 전에 이미 여러 부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제국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런 영향에는 정치와 문화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까지 포함됩니다. 이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섬기는 건 간단한 게 아니었습니다. 마치 지금 우리가 세속의 삶에서 기독교적인 삶을 올곧게 지켜내기 힘든 것처럼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신앙은 공짜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주변 사상과의 치열한 투쟁의 결과였습니다. 이런 투쟁의 선봉에 선 이들이 예언자이며, 성서기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신명기가 어떤 배경에서 기록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배경은 기원전 7세기 초에 일어난 남유다 요시아 왕의 개혁운동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모세가 미래의 일을 예측하고 충고하는 것처럼 진술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미 일어난 과거의 역사를 확인한 것입니다. 신명기 기자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렸다고 보았습니다. 앞으로 계속 그런 길을 가면 완전히 멸망당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광야로부터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행한 모세의 설교를 통해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외친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지 말라
모세의 설교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잊는 이유는 소유가 풍부하게 되어 마음이 교만해졌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게 우리로서는 조금 이해하기 힘듭니다. 일반적으로는 모든 게 잘 풀리면 하나님을 더 뜨겁게 기억하고 섬깁니다. 인생이 허물어지면 불평과 불만이 많아지고 하나님을 섬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독실한 신앙생활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겠다고 애를 씁니다. 물론 시련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깊어진다고 말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고통과 시련은 믿음이 없어서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신앙은 이중적인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고난과 시련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모든 게 잘 되는 게 하나님의 축복이고 더 나아가 선교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라고까지 주장할 정도입니다.
소유가 많아지면 교만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을 잊게 된다는 말은 하나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소유, 교만, 하나님 망각은 자기의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물질적인 복을 받은 뒤에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지 모세는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다.”(17절) 그런 생각은 믿음이 없어서 그렇지 나는 아무리 큰 축복을 받아도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길 거야,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그게 잘 되지 않을 겁니다. 자기를 통해서 일어난 눈부신 일들에 우리의 영혼이 마비됩니다. 자기신뢰, 자기확신, 자기연민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겉으로 아무리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포즈를 취한다고 하더라도 속으로는 여전히 “내가 괜찮은 사람이군!” 하고 자기를 내세웁니다. 이게 곧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왜 문제인지 사람들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이라는 세상의 강요와 유혹이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사람들을 향해서 네가 세상의 중심이야, 네가 주인공이야 하고 부추깁니다. 교회생활도 여기에 예외가 아닐 겁니다. 너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야, 세계 선교의 주인공들이야, 하는 이야기에 솔깃해 합니다. 모두가 경쟁의 대상으로 여기는 세상살이에서 지치고 외로운 사람들이니 그런 방식으로라도 위로를 얻고, 자기에게 자부심을 느끼고 살아가는 것을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심리학이나 상담학의 차원에서 보면 그런 자기 암시도 필요합니다. 신경정신과적인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라면 일시적으로 그런 말을 들어야겠지요. 그러나 모든 삶과 신앙을 자기에게 집중시키는 것은 자기를 살리는 길이 아니라 죽이는 길입니다. 성서는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죄는 사람을 죽이는 존재론적 힘입니다.
성서가 왜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가르치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에게서만 생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듯이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살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창조자이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 하나님 이외에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너무 초보적인 거라서 시시하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생각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인식하고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서가 그것을 반복해서 전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솔직하게 질문해보세요. 여러분은 하나님만이 생명의 주인이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실제로 알고 있으며, 실제로 믿고 있으며, 그런 영성의 세계로 들어갔나요? 아니면 들은풍월에 머물러 있는지요.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를 본다면 대다수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로 그 지역의 부족들이 섬기던 풍요의 신을 따라갔습니다. 그게 옳은지 그른지도 모른 채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풍요를 절대화하는 이 시대정신을 무조건 추종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신명기학파에 속한 이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영적인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대구성서아카데미가 이 시대의 신명기학파가 될 수 있을까요?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구가하는 풍요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뚫어보았습니다. 복의 근원은 곧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곧 복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복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구원이라는 사실을, 그가 곧 우리 생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신명기 기자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광야의 만나 사건으로 설명했습니다.
낮춤과 시험
출애굽 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물과 일용할 양식의 위협은 이집트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시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불 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날 수 있도록 도왔으며, 반석에서 물을 내셨고, 만나를 먹게 했습니다. 신명기 기자는 그것의 신앙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16절)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낮춤과 시험입니다.
광야생활이 낮춤이라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먹고 마실 것이 없으니 낮아지는 게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겸손할 수 있긴 하지만 무조건 그런 것도 아닙니다. 거꾸로 가난하기 때문에 물질적인 탐욕에 더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민족이 낮추어졌다는 말은 더 근본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광야에서는 모든 것들이 시행착오의 연속입니다. 마실 물 한 모금, 한 끼 먹을 양식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졌습니다. 생존 자체가 오직 하나님에게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런 깨달음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낮춤의 영성입니다. 시험이라는 단어도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자신들의 생존을,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에게만 맡길 수 있느냐 하는 시험입니다. 그들은 광야의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낮춤의 영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생명의 가장 낮은 차원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교만해지고 말았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그들은 “내 능력으로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고 자기의 업적에 감동받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긍정의 힘’이라는 이데올로기와 비슷합니다. “아이 켄 두 잇!”이라는 처세술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말은 하지만 그것은 허울뿐이고 자기의 능력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것은 풍요로움이 가져다준 저주였습니다. 그 결과는 멸망입니다. 잘 사는 게 왜 멸망이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시겠지요. 부 자체를 부정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의 마성을 알아차리라는 말씀입니다. 재물과 자기 확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생명에 대한 불안을 떨치지 못합니다. 자신이 생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순간도 평화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경쟁에 처질지 모른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의 삶에서 낮추었습니다. 그것은 풍요롭지 못한 자기 운명에 대한 자기합리화가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통찰이며 신뢰입니다. 그런 눈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가장 명백한 영성입니다. 생명의 비밀에 눈을 뜨는 사건입니다.
며칠 전에 저는 아내와 감과 사과를 먹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색깔이 왜 이렇게 아름다운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감나무는 지난여름 한철 햇빛과 탄소와 물을 이용해서 저렇게 멋진 감을 생산했습니다. 오늘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햇빛과 탄소와 물만 이용해서 감이나 사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어디 감과 사과만이겠습니까. 우리가 직면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한 생명의 보화들입니다. 그 보화를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철저하게 무기력했던 것처럼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걸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사건을,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16b,절 말씀에 따르면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십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하나님의 생명사건과 구원사건에 일치하는 것이야말로 복입니다. 그것 말고, 그것 없이 복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은 이미 엄청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생명구원 사건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광야의 한계상황입니다. 김현승 시인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고독의 끝입니다. 부활은 생명의 극치입니다. 인간이 생산해낼 수 없는 생명의 충만이며, 창조의 종말론적 완성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그 구원의 사건들을 믿음으로 희망하는 우리는 더 이상 요구할 게 없을 정도로 크고 놀라운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표현이 추상적으로 들리시나요? 그렇다면 가나안 땅의 풍요에서만 생명이 보장되리라고 생각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이게 아주 실질적으로 들리시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서가 말하는 생명의 세계를 맛본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한 지구에서 나는 것을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우리가 졸고 있을 때도, 우리가 남을 비난하고 있을 때도 지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먹을거리를 준비했습니다. 우리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아무런 한 일도 없이 특별 손님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찬양하기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서 먹고 마시면서 대접받는 것은 참된 생명의 반사에 불과합니다. 광야의 만나입니다. 때가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직접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날을 위해서 지금부터 찬양을 연습합시다. 그런 찬양을 부를 줄 아는 사람은 비록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살지만 이미 영광되고 복된 삶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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