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창조절 열셋째 주일, 2017년 11월26일
15.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요즘처럼 절실한 때도 흔치 않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금년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황의 절대권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황을 교회의 수장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교황이 바로 지상에서 하나님을 대리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교황으로부터 죄를 용서받는 거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 거와 똑같으며,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하는 거는 하나님으로부터 파문당하는 거와 똑같다는 논리입니다. 이런 논리에 근거해서 당시 교회는 면죄부(면벌부)를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루터는 교황이나 사제나 일반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다르지 않고 똑같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겁니다. 그게 만인사제설의 핵심입니다. 이런 루터의 만인사제설은 당시 로마가톨릭의 교회론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절실해진 또 하나의 다른 이유는 예장통합에 속한 명성교회가 부자세습을 지난 11월12일에 전격 실행했기 때문입니다. 예장통합은 수년 전에 세습 금지법을 제정했습니다. 담임 목사의 자녀와 그 가족이 후임으로 올 수 없다는 법입니다. 그런데 명성교회는 총회 헌법을 무시하고 부자세습을 힘으로 밀어붙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노회의 행정절차도 불법으로 진행시켰습니다. 명성교회가 작은 교회였다면 부자세습을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설령 생각했다고 해도 밀어붙일 수 없었을 겁니다. 교인 10만 명을 헤아리는 슈퍼 처치이기에 교회법을 무시한 채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킨 것입니다. 앞으로 이 문제가 어떻게 귀결될지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교회가 무엇이기에 이런 일들이 버젓이 벌어진 것일까요?
매주 예배를 드릴 때마다 모든 교회가 함께 읽는 사도신경에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holy, catholic church를 가리킵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과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교회를 슈퍼마켓처럼 운영할 수 없는 거지요. ‘카톨릭’이라는 말은 로마가톨릭교회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교회의 보편성(universality)을 가리킵니다. 개교회주의와 교회의 사유화를 극복하는 개념입니다. 사도신경은 로마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핵심 신조로 삼고 있는데 반해서 니케아 신조는 정교회까지 받아들이는 신조입니다. 우리교회에서는 성찬식이 거행되는 주일에 사도신경 대신 니케아 신조를 함께 읽습니다. 거기에는 교회의 본질이 네 가지로 나옵니다. 거룩성, 단일성, 보편성, 사도성이 그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꾸준하게 문제를 제기했고, 신학적으로 성찰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포기하면 교회는 아주 쉽게 세속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머리와 몸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삼은 구절에도 교회에 대한 정의가 나옵니다. 엡 1:22,23절을 읽겠습니다. 개역개정을 앞에서 성경 봉독자가 읽었으니 저는 공동번역을 읽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셨으며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셔서 모든 것을 지배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이 구절의 요체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몸과 머리로 규정했습니다. 머리도 전체로 보면 몸에 속하니까 그리스도와 교회가 모두 하나의 몸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이 그럴듯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부활과 승천의 예수를 가리킵니다. 지금 우리 앞에 없습니다. 우주 공간 어디에 계신 것도 아닙니다. 반면에 교회는 보이는 조직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와 보이는 교회가 하나의 몸이라는 말은 ‘교회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은유적인 대답입니다. 이 대답에 교회의 본질과 속성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교회가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의존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의존되어 있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오늘 여러분은 차를 운전하거나 지하철을 타고 교회에 왔습니다. 교회에 가야겠다는 머리의 생각과 명령이 몸에 그대로 전달된 겁니다. 만약 몸이 머리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이 갈 겁니다.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와서 차를 세워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발이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면 큰 사고가 일어납니다. 심한 치매에 걸려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심한 정신질환에 걸린 사람도 머리와 몸이 따로 놉니다. 교회에서도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경우가 있습니다. 몸끼리 작당하는 겁니다. 자기들이 만족스러운 것에 치우치는 겁니다. 교회는 그렇게 왜곡될 개연성이 높습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비합리적인 행태가 용납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조장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예로 든 루터 시대의 로마가톨릭교회나 오늘 부자세습을 하나님의 뜻으로 오도하는 한국교회가 그런 경우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알게 모르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비유적으로 그리스도는 소프트웨어이고 교회는 하드웨어입니다. 외국어 번역 앱이 있다고 합시다. 그건 소프트웨어입니다.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걸 작동시킬 수 있는 컴퓨터 본체나 스마트폰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운명을 증언하는 공동체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조직과 모임이 있지만 교회와 같은 일을 하는 모임은 없습니다. 교회에는 예수를 증언하는 성경이 있고,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세례와 성찬식이 있고, 그와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설교하고 찬양하는 예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전체 존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를 선취의 방식으로 현실화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교회가 아무리 큰 비난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만은 부정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 앞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두 가지 시각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에 대한 거룩한 자부심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몸을 대체할 기구는 없습니다.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역할이 교회에게 주어졌습니다. 세상은 돈과 도덕성과 권력을 기준으로 판단하겠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우리는 그런 일에 참여한 사람들이니 자부심을 느껴도 좋습니다. 이런 관점은 교회 공동체의 차원만이 아니라 개인 신자의 차원에서도 필요합니다. 우리 각자는 성도도 부름을 받았기에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한 자부심을 느껴야 합니다. 세상의 관점과 전혀 다른 관점에서 우리는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기에 그런 자부심을 느껴도 좋고, 당연히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합당한지, 그런 길을 잘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를 성찰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성찰이 없다면 우리는 순식간에 교회의 본질로부터 이탈하고 인간의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 시각은 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성도로서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반성하고 성찰해야합니다.
평소에 여러분은 이런 문제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기보다는 어느 회사에 속한 사람으로, 어느 가족과 친지에 속한 사람, 어느 동아리에 회원으로 자리매김 될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서 그들과 어울려 지낼 때는 그들의 상식에 따르면 됩니다. 바울도 유대인들 앞에서는 자기가 유대인처럼 처신하고 율법 없는 자들 앞에서는 자기가 율법 없는 자처럼 처신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지혜롭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고전 9:20-23). 기독교인들은 세상 안에서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지만 결국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충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오늘 성경본문은 다른 방식으로 묘사했습니다. 아주 특별한 표현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이라고 했습니다. 충만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플레로마입니다. 플레로마에는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영어로 fullness, completeness(주로 신적인 존재나 자연의 완전함으로), fulfilling, fulfillment입니다. 가득함, 완전함, 가득 채움 등의 뜻입니다. 우리말 번역인 ‘충만’도 괜찮아 보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충만하게, 완전하게, 온전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에베소서 기자는 먼저 그리스도가 만물을 충만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충만하다는 말을 주로 양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통에 물이 가득하다거나 교실에 학생들이 가득하다거나 저금통에 동전이 가득한 것을 연상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성령 충만이라는 말도 자주 사용합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을 충만하게 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채운다는 뜻이 아니라 만물에게 생명을 준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걸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돈이 생명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일리가 있는 생각입니다. 돈이 있어야 공부도 하고 병원에도 가고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교회도 재정이 확보되어야 교회 살림살이가 가능하고 하나님의 복음 전파에 일익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충만은 그런 것과 차원이 전적으로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창조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셨습니다. 무(無)로부터 유(有)가 나왔다는 것은 세상이 충만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창조 사건 자체가 바로 세상의 충만입니다. 요한복음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로고스로서 하나님의 창조 때에 이미 존재했습니다. ‘태초에 로고스가 존재했다. 이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로고스가 곧 하나님이시다.’(요 1:1)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생명으로 높임을 받으셨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그가 바로 창조의 로고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참여함으로써 창조와 창조의 완성을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충만입니다.
이런 설명이 교회 안에서는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실제 세상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들다고 여기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당연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전혀 다르게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통은 구약 시대에도 그랬고, 신약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만 해도 그렇습니다. 고전 1:23절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막론하고 수치스러운 사건이자 지혜롭지 못한 사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로마 정권에서 출세를 하거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자녀 많이 낳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장수하는 것을 최선의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 시대정신에 따르면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의 운명은 당연히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당시 사람들은 거부했습니다. 서로의 생각이 충돌한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 완성자라고 믿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고 확실성이 없는데 공연히 고집을 피우는 게 아니라 성경과 2천년 기독교 영성에 근거해서, 그리고 지금 옳고 그름에 대한 바른 인식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충만하게 한다고 믿습니다.
세상의 결핍
그리스도의 플레로마는 세상의 결핍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충만하게 하는 반면에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세상을 충만하게 하지 못합니다. 결핍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개인 실존에서 우리는 결핍을 부둥켜안고 삽니다. 돈이 많거나 적거나, 건강하거나 약하거나, 다복하거나 외롭거나를 막론하고 늘 영혼의 한 구석이 비어 있습니다. 대구샘터교회의 지난 수요일 모임에서 부른 찬송가는 406장입니다. 2절 ‘세상 친구들 나를 버려도...’를 제가 간단히 설명했습니다. 친구들이 실제로 배신한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친구를 통해서, 그리고 친구로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참된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친구가 옆에 있어도 궁극적인 결핍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이것은 똑같습니다. 결핍이 없는 나라와 세상을 보셨나요? 부자 나라인 미국은 미국대로, 독일은 독일대로, 스웨덴은 스웨덴대로, 가난한 나라인 부탄은 부탄대로, 에티오피아는 에티오피아대로 다 결핍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 적폐청산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는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사람이지만, 그것으로 우리나라에 결핍이 없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이 정의로워지고 순전해져도 여전히 다른 방식으로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과 교회를 충만하게 합니다.
실제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충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상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더 깊고 넓게 기독교 신앙을 아는 사람들은 충만을 느끼겠지만 그렇지 않는 분들은 그게 눈에 보이지 않을 겁니다. 이것은 퍼즐과 비슷합니다. 퍼줄 조각에만 매달리면 전체 그림을 볼 수 없습니다. 전체 그림을 본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깊이와 넓이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게 잘 알 될 경우에는 일단 퍼즐 한 조각으로서의 자리만이라도 분명하게 지키고 있으면 자기가 알지 못하는 중에 전체 퍼줄 그림에 참여하게 됩니다. 전체 그림, 즉 충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조각의 퍼즐 역할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한 개가 삐딱하게 놓이면 충만이 훼손당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에클레시아(교회)는 에베소서가 기록될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완전하지 않습니다. 종말론적으로 ‘이미’ 승리한 게 아니라 ‘아직’ 전투 중에 있는 교회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 크고 작은 상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충만하게 하는 그리스도가 비밀한 방식으로 교회에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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