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성령공동체다
행 2:1-21, 성령강림절, 2016년 5월15일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오늘은 세계 교회가 지키는 성령강림절입니다. 개개 기독교인들은 성탄절이나 부활절과 달리 성령강림절에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합니다. 일단 ‘성령’이라는 단어를 낯설어 합니다. 낱말 자체는 교회에서 자주 들은 탓에 익숙하기는 하지만 그걸 일상생활에서 실질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 하면 뭔가 이질적인 것으로 느낍니다. 일종의 성령 결핍증 현상이 개별 기독교인과 교회에 광범위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생활을 건강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거꾸로 성령 과잉 현상도 문제입니다. 주로 오순절 계통의 교파가 이런 경향을 보입니다. 어떤 목사는 ‘성령 받아라.’하고 외치고, 회중들은 두 손을 들고 흔들면서 성령을 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성령 결핍, 또는 성령 과잉 현상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령 경험 없이도 신앙생활이 가능할까요? 도대체 성경이 말하는 성령은 무엇일까요?
성령강림절과 가장 관련이 깊은 성경구절은 행 2장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120명 쯤 되는 이들이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오순절은 유월절 후 50일째 되는 절기를 가리킵니다. 120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라면 꽤나 넓은 다락방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평소에도 그곳에서 자주 모임을 갖곤 했습니다. 오순절에 아주 특별한 현상이 그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세 가지 현상입니다. 공동번역으로 2-4절을 읽겠습니다. 세 가지가 각각 무엇인지 찾아보십시오.
2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4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세 가지는 각각 바람, 불길, 외국어입니다. 이 세 가지 현상을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봅시다. 첫째, 바람 현상입니다. 노천이라면 모르지만 실내인데도 바람이 가득했다는 건 예사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이런 비상한 사건에 대한 글을 대할 때는 일단 고대인의 눈이 필요합니다. 그들에게 바람은 가장 신비롭고 압도적인 힘이었습니다. 바람은 부드럽게도 불고 강하게도 붑니다. 따뜻한 바람도 있고 차가운 바람도 있습니다. 바람에 따라서 나무와 풀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눈보라를 몰고 오거나 광야의 먼지를 몰고 오는 것도 바람입니다. 특히 강력한 폭풍은 고대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 호흡이 시작되고 죽을 때 호흡이 끊어집니다. 그 호흡도 바람의 한 현상입니다. 바람은 신비롭습니다. 히브리어 루아흐와 헬라어 프뉴마는 바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영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마가 다락방을 바람이 채웠다는 말은 거기 모인 사람들이 거부할 수 없는 강하고 신비로운 힘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둘째, 불길 현상입니다. 본문은 혀 모양의 불길이 각 사람 위에 내렸다고 합니다. 혀 모양의 불길이라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혀의 날름거리는 모습이 불길의 움직임처럼 보였나봅니다. 사람이 처음 불을 사용하게 된 때가 150만 년 전쯤입니다.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아니라 유인원인 호모에렉투스가 살던 시대입니다. 그때 이후로 그들의 삶은 비약적으로 달라졌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불은 있었습니다. 번갯불이나 화산폭발 등등으로 숲이 타는 걸 유인원들도 보고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을 겁니다. 불은 모든 걸 근본으로부터 변화시키고 말살시키는 힘입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불이 붙었지만 타지는 않는 가시떨기나무를 통해서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했습니다. 현상과 능력에서 비상한 물체인 불은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데 적합합니다. 마가 다락방의 현상을 실제 불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 불이라면 거기 모인 사람들은 다 불에 화상을 입거나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 위에 불길이 임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셋째,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각자 외국어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방언이라고 일컬어지는 현상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방언은 두 가지 종류입니다. 하나는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인데, 남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나오는 현상입니다. 사람이 정신적으로 엑스타시의 상태에 이르면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도의 절정에 이르면 혀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방언을 하게 됩니다. 고린도교회에서는 이런 신자들로 인해서 예배 진행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공적인 예배 모임에서는 방언을 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부득이 방언 기도를 해야 될 경우에는 반드시 통역을 붙이라고 했습니다. 고전 1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방언은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으로, 다른 나라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정확하게 어떤 현상인지는 본문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 말하기 어렵습니다. 한 사람이 실제로 다른 나라 말을 하게 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나라 말을 했는데 듣는 사람이 자기 나라 말로 들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4절에 따르면 말하는 사람이 외국어를 하는 현상이지만, 6절에 따르면 듣는 사람의 귀에 다른 언어로 들린 현상입니다.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본토인들의 언어인 아람어가 아니라 여러 다른 나라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대다수가 외국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9-11절 사이에 그런 사람들이 살던 나라의 목록이 나옵니다. 열 개 나라가 넘습니다. 그들은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벌어진 현상 앞에서 당혹스러워했습니다. 12-13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그러자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과 함께 나서서 일장 연설을 합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시간이 오전 9시인데 어떻게 술에 취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일어난 이런 현상은 이미 당신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의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영을 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우리가 바로 그 영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요엘 2:28절 이하를 인용해서 자신들에게 일어난 현상을 해명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행 2:21절까지만 읽었는데, 그 뒤로 36절까지 베드로의 설교가 이어지고,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일에 기독교인이 된 사람의 숫자가 3천명이라고 했습니다(행 2:41).
도대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어떤 분들은 당시와 비슷한 일을 경험하고 싶어 합니다. 밤새도록 기도하고 찬송 부르면서 열광적으로 ‘성령을 주시옵소서.’ 하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한 달에 한번 서울에 다녀올 때마다 서울역 광장 한 구석에서 이상한 모임을 보곤 합니다. 열 명쯤 되는 사람들이 빙 둘러 앉아서 찬송가를 손뼉 치면서 열광적으로 부릅니다. 제가 어렸을 때 경험한 부흥회 풍경과 비슷합니다. 그걸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유명 가수의 라이브 현장에서 거의 무아지경에 들어가 고함을 치거나 온몸을 흔들어대는 현상, 또는 프로 스포츠 현장에서 열광적인 응원에 몰입하는 현상들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사람은 무의식의 바닥에 놓은 아픔이 치유되는 경험을 합니다. 요즘 세계 기독교의 여러 교파 중에서 부흥하고 있는 교파는 열광적인 은사를 강조하는 오순절 계통입니다. 반면에 다른 정통 교파, 즉 장로교나 감리교나 성공회 등의 세력은 전반적으로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로 인해서 영혼의 상실감에 빠져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원초적인 열광주의에 기초한 오순절 신앙이 어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는 성경을 오해하거나, 피상적으로만 대하면서 인간의 심리적 현상에 부응하는 건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람, 불, 방언 현상을 초기 기독교에서 실제 그대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이에 관해서 성서학자 헨헨(D. Ernst Hänchen)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사건보도를 기독교 선교의 출발에 대한 기록 영화로 보는 건 이 이야기를 오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보도에 함축되어 있는 신학적인 진술에 관심을 보여야 한다. 즉 기독교 공동체에 임하여 그들을 이끌어가는 성령은 그들 자신의 내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성령은 국가와 민족의 장벽을 초월한다는 사실이 이 사건보도에 함축되어 있는 신학적 진술이다.’
저는 성경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오해할 때 위험한 책이 됩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신의 축복으로 말하고,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공격하고, 성 소수자들을 비난하며, 교회 안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자기를 정당화하는 일에 성경이 이용당할 수 있습니다. 성경 문자주의에 떨어진 사람들에게 이런 일들이 흔하게 일어납니다. 지식이 모자라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지식인들도 교회에만 들어오면 지성을 포기한 듯한 태도를 취합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 ‘자화상’에 이런 시구가 나옵니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이 구절을 읽고 실제로 바람이 서정주를 키웠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시를 읽듯이 해야 합니다. 그 단어와 문장은 어떤 궁극적인 경험을 안에 담고 있으니, 성경을 읽는 사람은 단어와 문장에 머물지 말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은 오해되기 쉽고, 오해되면 결국 삶을 파괴합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이 경험했다는 성령은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은 지금 성령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본문에서 바람과 불, 그리고 방언현상으로 성령을 묘사하고 있는데, 실제로 성령은 보이지 않습니다. 손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돈을 주고 살 수도 없습니다.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성령이 마가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에게 임했다고 말합니다. 우선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한 가지를 말씀드리는 게 성령강림 사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사물을 손으로 만진다는 사실이 새롭고 황홀하게 경험되기 시작했습니다. 설거지를 할 때 그릇을 씻는 행위만이 아니라 먼저 물을 만지고 그릇을 만진다는 사실에 집중합니다. 물과의 접촉이 신비로운 겁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천부적으로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흙을 만지고, 나무에 기어 올라가고, 서로 몸을 부대낍니다. 사물과의 소통을 통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겁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런 능력을 상실합니다. 이전투구와 같은 세상살이에 익숙해지면서 사물과의 접촉이라는 차원에서는 미개인이 되고 맙니다. 며칠 전에 아내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 EBS에서 본 다큐였다고 합니다.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와 나무 칼럼니스트가 나옵니다. 두 사람이 나무를 어떻게 경험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피아니스트는 볼 수 없기 때문에 나무를 손으로 만지고, 얼굴로 접촉하고, 나무 냄새를 맡으면서 나무와 일체가 되고, 그런 느낌을 바탕으로 연주한다고 합니다. 자기 밖에 있는 사물과의 일체감을 느끼는 것이 성령 경험의 한 부분입니다. 그런 경험은 신앙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은 기본적으로 ‘생명의 영’입니다. 나무를 살리는 영이 성령이고, 사람을 살리는 영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물을 손으로 만지면서 생명의 깊이, 의미 충만한 생명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보이지 않지만 가장 확실한 생명의 리얼리티인 성령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20명이 모였던 마가 다락방으로 다시 가봅시다. 그들이 따르던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예수를 전혀 새로운 생명인 부활체로 경험했지만 승천으로 인해서 예수는 곧 그들의 삶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예수 없는 일상을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바람 앞의 등잔불과 같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근근이 모임을 이어갔지만 그 미래는 불확실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예수가 자신들과 함께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느낌이 들자 더 열심히, 그리고 더 자주 모이게 되었고, 자신들의 예수에 대한 경험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데 주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 역동성으로 인해서 곧 허물어질 것 같이 존재 자체가 위태로워보였던 교회의 기초가 탄탄해졌습니다. 그들은 교회공동체에 참여하면서 생명 충만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성령 경험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초기 기독교의 이런 경험을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고 한 시인처럼 독자들이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바람과 불과 방언 현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부시대부터 교회를 성령의 피조물, 즉 성령공동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의 기독교 역시 성령공동체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생명 충만 공동체입니다. 이런 말이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생명이라는 말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통 우리는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삶, 즉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먹고 잘 살아야 더 풍요로운 삶이라고 단정합니다. 모든 삶의 기준을 연봉으로만 다룹니다. 대통령부터 모든 정치인들이 다 경제 문제에, 즉 민생 문제에 전념하는 듯이 말합니다. 말은 민생 경제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이름을 내는 게 목적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저는 그런 말을 듣는 게 지긋지긋합니다. 돈이 없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거나, 가난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제가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경제 문제에만 몰두하면 실제 삶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이건 교회 문제에도 비슷하게 적용됩니다. 교회 성장에만 몰두하면 교회의 본질은 훼손됩니다. 십자가에 달렸으나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의롭다고 인정한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경험이 시들해지고 맙니다. 생명의 영인 성령 충만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 결핍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오늘 이 시대를 지배하는 영(Geist)은, 즉 시대정신(Zeitgeist)은 무엇일까요? 성령이 아니라 악령은 아닐까요? 생명의 영이 아니라 죽음의 영은 아닐까요?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를 통한 생명 충만, 성령 충만을 경험하고 있을까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분들은 없으시겠지요. ‘성령, 그런 거와 나는 상관없어. 그런 거 몰라도 세상에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어. 돈과 건강만 있으면 돼.’ 저는 성령을 바람과 불과 방언으로 묘사한 누가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성령은 우리를 죄와 죽음의 악순환으로부터 부활 생명의 길로 이끌어주는 가장 강력한 생명의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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