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성령 충만
행 2:1-13, 성령강림(교회 설립 14주년) 주일, 2017년 6월4일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오늘 우리가 제2 독서로 읽은 본문인 행 2:1-13절에는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까다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흥미진진합니다. 그 이야기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 봅시다.
오순절에 일어난 일
행 2:1절은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렀다’는 말로부터 시작됩니다. 오순절은 유월절, 장막절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중요한 3대 절기 중의 하나입니다. 오순(五旬)절이라는 단어는 50일째의 절기라는 뜻인데, 유월절 이후 50일을 가리킵니다. 기독교 절기로 말하면 유월절은 부활절과 일치하고, 오순절은 성령강림절과 일치합니다.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한 초기 기독교의 구성원들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행 1:15절에 따르면 그들은 대략 120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 요한의 어머니 집에서 정기 모임을 열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들이 처한 상황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던 예수님이 로마법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우리교회 교우들은 큰 충격으로 다 흩어질 겁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직후에 각각 고향으로 흩어졌다가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다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이따금 나타나시다가 이후로 사라지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를 직접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설립되고 유지되기는 불가능합니다. 어떤 특별한 사건이 없었으면 교회는 시작도 못했고, 유지되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 날이 바로 오순절입니다.
행 2:2,3절은 각각 특별한 현상을 보도합니다. 먼저 2절은 이렇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여러분, 이런 장면이 상상이 갑니까? 그들이 모인 곳은 외부와는 단절된 다락방이라는 실내 공간입니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유리로 된 창문도 없었습니다. 거기서는 하늘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실제 하늘이 아니라 하늘이라는 단어가 가리키고 있는 특별한 사건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늘은 궁극적인 생명이 은폐되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본문이 더 이상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아서 그게 무슨 현상인지를 우리가 정확하게 알아낼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바람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어떤 것을 경험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바람이라는 뜻의 헬라어는 ‘프노에’입니다. 프노에는 영을 가리키는 프뉴마와 어근이 같습니다. 프노에는 단순히 바람이라는 뜻인데 반해서 프뉴마에는 영, 힘, 숨, 그리고 바람이라는 포괄적인 뜻이 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바람은 지구에서 가장 신비한 현상이었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구체적인 힘으로 존재하는 현상입니다. 어떤 때는 부드럽게, 어떤 때는 강력하게 경험됩니다. 따뜻하기도 하고 차갑기도 합니다.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지기도 합니다. 사람은 어머니 자궁에서 나오면서 숨을 쉬기 시작해서 죽으면 숨을 그칩니다. 봄기운에 따뜻한 바람이 불면 들판과 숲에 온갖 식물이 돋아납니다. 생명을 만들어내는 신기한 능력입니다. 고대인들만이 아니라 현대인들에게도 바람은 신비롭습니다. 지구에 바람 현상이 시작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습니다. 공기가 없는 곳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처럼 공기가 희박한 높은 산에는 바람도 약합니다. 저의 서재는 우리 마을에서 전망이 가장 좋습니다. 마을 모양이 광주리처럼 생겨서 아늑한 기분이 듭니다. 마을 위로 날아다니는 새들을 자주 봅니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모습도 제 각각입니다. 저는 새가 되는 착각을 일으키곤 합니다. 새가 날아다닌다는 것은 바람과 하나 될 때 가능합니다. 바람이 지구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라면 바람을 하나님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시인이라면 그렇게 불러도 됩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기에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라고 하는 게 낫습니다. 성서가 영과 바람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는 사실에서 이런 말은 틀린 게 아닙니다. 행 2:2절의 바람에 대한 이야기는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모였던 그들에게 생명의 가장 원천적인 힘이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3절에는 불이 나옵니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불 자체라고 말하지는 않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2절에서도 바람 자체라고 말하지 않고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다고 표현한 것과 비슷한 표현입니다. 실제로 불이 나타났다면 마가 다락방은 화재가 났겠지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불은 바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능력을, 곧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는 메타포입니다. 모세도 호렙산에서 불붙는 가시떨기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불은 모든 사물을 변형시키는 능력입니다. 존재하는 것들을 말살하기도 합니다. 산불은 산의 모든 것을 초토화시킵니다. 그러나 불이 없다면 지구의 생명 현상은 불가능합니다. 태양이 곧 불입니다. 마가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의 사람들에게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능력인 불이 임했다는 말은 2절에 묘사된 바람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생명의 가장 큰 능력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성령 충만
바람과 불이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사도행전 저자인 누가가 말하려는 핵심이 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역사에 등장하고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토대입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 구절은 두 가지 사실을 보도합니다. 하나는 거기 모인 120명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하지 않은 영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생명을 고착화하거나 훼손하거나 파괴하는 영은 악한 영입니다. 겉으로 아무리 세련된 것처럼 보여도 악한 영은 생명을 파괴합니다. 악한 영과 거룩한 영이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게 아니라 판단하기가 어렵긴 합니다. 꾸준히 공부하고 자기를 성찰하고, 세상과 역사를 선지자의 눈으로 통찰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성경과 신학이 말하는 성령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일입니다. 진짜 보석을 알고 있어야만 가짜 보석을 구분할 수 있는 거와 같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가 다락방의 120명이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생명의 영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영은 말 그대로 살리는 영입니다. 살린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에 대립됩니다. 죽었다는 말과 살았다는 말이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일단 사람만 보면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분명히 구분됩니다. 숨이 멈추고 심장이 정지되고 뇌파가 나오지 않으면 죽은 겁니다. 죽음에 가까이 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의사들의 일은 분명히 성령의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고 하더라도 죽음을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합니다. 그 시간을 조금 늦출 뿐입니다. 죽은 사람을 실제로 다시 살리는 일은 현재와 같은 시간과 공간의 결합으로 진행되는 세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궁극적인 생명으로 변화하는 부활 신앙을 받아들입니다. 이게 진정한 의미에서 죽음으로부터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으라고, 그러면 생명을 얻는다고 용감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단지 생물학적인 차원에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문명을 보십시오. 만약 돈이 지배하는 문명이라고 한다면 겉으로는 살아있으나 실제로는 죽은 거와 같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전쟁과 테러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한 국가 지도자의 잘못된 선택으로 강과 산을 비롯한 자연이 파괴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현대 문명은 생명을 활성화하는 것처럼 보여도 죽음을 반복해서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세속 사회만이 아니라 교회도 역시 겉으로 살아있으나 실제로는 죽을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의 로마가톨릭교회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짜르 시대의 러시아 정교회도 이에 해당됩니다. 오늘 대한민국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세상을 살리는 공동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성령에 충만하게 되었다는 말은 모든 죽음의 세력에 저항하겠다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령 충만을 개인의 열광적 신비 체험정도로 그 의미를 축소시킵니다. 그런 부분도 없진 않지만 성령이 가리키는 신구약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보면 성령 충만은 악한 시대정신에 대한 저항을 전제합니다. 개인과 사회와 국가, 문명 전체에서 성령의 일과 반대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로마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했다는 사도신경의 한 대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초기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예전적으로 따졌습니다.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에 대항해서 ‘팍스 크리스티’(그리스도의 평화)를 외쳤습니다. 전쟁과 정복과 분열의 질서가 아니라 평화와 희생과 일치의 질서를 주장한 겁니다.
그들의 외침을 단순히 인간 개혁과 세상 개혁으로 보면 곤란합니다. 개혁은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근본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과 그 이후의 전개 과정을 보십시오. 종교개혁의 후예들인 개신교회가 오히려 이제는 가톨릭교회보다 더 보수적인 집단이 되었고, 더 반동적인 집단이 되었습니다. 근대 세계 역사에서도 뭔가 근본적인 개혁을 꿈꾸었던 공산당 혁명이 일어났지만 그것도 역시 실패했습니다. 성경과 기독교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 하나님에게 속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려면 우선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마가 다락방에서 모였던 120명의 경험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새로운 언어, 방언
행 2:4절이 보도하는 두 번째 현상은 거기 모인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서 ‘다른 언어’를 말하게 된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방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방언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아니라 일정한 사람들이 알아듣는 언어였습니다.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성지 순례 차 예루살렘에 와서 이 사람들에게서 나타난 방언 현상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마가 다락방에 모인 예수 추종자들은 대부분이 갈릴리 출신이라 당연히 아람어로 말을 하는데 듣는 사람들은 각자 자기들이 살던 나라 말로 듣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제가 한국말로 기도하는데, 그게 미국 사람에게는 영어로, 독일 사람에게는 독일어로, 중국 사람에게는 중국어로 들린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창조의 능력이 있는 분이시니 그가 개입하신다면 이런 일도 가능하겠지요. 저는 이것이 사실이냐 아니냐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을 기록한 누가가 어떤 생각을 했느냐가 저의 관심입니다. 저는 성경을 시로 읽습니다. 시는 사실을 말하기도 하지만 은유를 통해서 사실보다 더 깊은 차원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1장에는 언어 혼란에 대한 상징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노아 대홍수 후에 사람들은 높은 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토목사업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오늘의 국가 토목사업처럼 각종 이권이 개입되었겠지요. 하나님은 바벨탑을 불의한 것으로 판단하고 사람들의 말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는 다시 언어의 통일, 언어의 소통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방언의 본질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이야말로 보편 언어입니다. 생명을 생명답게 할 수 있는 소통의 언어입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과연 그런 역할을 감당하고 있을까요? 교회는 영적으로 세상의 어른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분열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일치의 길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남북 분단체제에서 통일의 길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기득권에 안주하고 자기를 목적으로 삼으면서 어느 한쪽을 마녀사냥 하듯이 매도하는 건 아닐까요? 교회가 생명의 영인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당연히 언어 혼란을 극복하는 방언의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게 없다면 성령을 오해했거나 아니면 개인의 황홀한 종교 경험으로 축소시킨 겁니다.
놀람과 조롱
예루살렘에 모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마가 다락방에서 일어난 현상을 보고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놀라고 당황스러워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롱했다는 것입니다. 표현이 아주 적나라합니다. 12,13절을 들어보십시오.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이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교회의 정체성에 해당됩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면 세상이 놀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교회를 통해서 일어난다는 증거입니다. ‘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다 부자가 된데, 정말 대단해.’ 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또는 ‘저 교회에는 잘 나가는 청년들이 많아서 결혼 상대자를 찾기 좋데.’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과는 다른 꿈을 꾸면서 살아갈 때 세상이 놀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꿈입니다. 이런 꿈은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서 내려왔으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습니다. 더 축소해서 말한다면 죄인이 용납되는 세상을 향한 꿈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나온 것처럼 모범생 큰 아들만이 아니라 탕자처럼 살았던 둘째 아들까지 ‘죽었던 둘째가 살아 돌아왔으니 어찌 잔치를 베풀지 않을 수 있겠냐?’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지배하는 세상을 향한 꿈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런 꿈이 있을까요? 그래서 세상이 놀라움으로 교회를 대할까요?
우리가 설령 그런 꿈을 꾸며 그런 노력을 한다고 해도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일부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술에 취했다고 조롱할 것입니다. 비현실적인 사람들이라고, 철부지와 같다고, 극단적인 이상주의자들이라고 조롱하는 겁니다. 우리는 술에 취한 게 아니라 성령에 취한 사람들입니다. 생명의 영에 몰입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와 더불어 이미 죽었으나 그와 더불어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될 것을 꿈꿉니다. 십자가형의 운명에 떨어졌던 이를 그리스도로 믿고 있으니 어찌 다른 영에 취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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