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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교회 일치의 신비

 

교회 일치의 신비

(고전 12:12-27)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즉 구원자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 사실보다 더 중요한 건 없습니다. 구원은 절대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매주일 교회에 나오고,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여하고, 교회 역사를 배우며 거기에 동참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거룩한 사건에 함께 연루되어 갑니다.


교회 분쟁

이렇듯 거룩한 공동체에 속해 있는 교인들 사이에 왜 분쟁이 있을까요? 크게는 로마가톨릭교회와 정교회와 개신교 사이에 분쟁이 있고, 작게는 개신교 안에서 교파에 따라 분쟁이 일어납니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싸우고 갈라지는지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심지어는 같은 지교회 안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분쟁이 일어납니다. 실제로는 멀리 있는 로마가톨릭교회와의 분쟁보다는 같은 개신교 안에서의 분쟁이, 그리고 지교회 안에서의 분쟁이 더 심각합니다. 큰 싸움까지는 안 간다고 하더라도 서로 이질적인 느낌을 받는 경우는 많습니다. 박 집사는 성격이 왜 저래, 저 사람을 보면 불편해, 김 집사는 왜 저렇게 잘난 척 하는 거야, 등등, 거룩한 공동체에서 있지 말아야 할 싸움들은, 그리고 불쾌한 감정을 일으키는 갈등들은 많습니다.

이런 분쟁은 초기 기독교에도 비일비재했습니다. 사도들이나 사도 급에 해당되는 사람들 중에서도 사이가 좋지 않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유대기독교와 헬라기독교와의 분리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와 베드로가 중심으로 활동하던 예루살렘 교회와의 신앙적인 갈등으로 결국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도 분파가 생겼습니다.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 그리스도 파로 나뉘었습니다.(고전 1:12)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에 따라서 파가 나뉜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런 분파주의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이런 분파적 현상은 단순히 세례를 누구에게서 받았는가 하는 차원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었습니다. 훨씬 다양한 문제들이 고린도교회를 분파적 소용돌이에 빠지게 했습니다. 우상 앞에 놓았던 음식을 먹는 자유가 있는 사람과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서로 비난했습니다.(8장) 때로는 성만찬에서도 이런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바울의 말을 직접 들어보십시오.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고전 11:18) 당시에는 음식을 함께 나눠먹는 애찬식도 성찬식에 포함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 후에 밥을 먹는 것과 비슷합니다. 거기서 어떤 사람들은 집에서 가져온 것을 자기들끼리만 나눠먹었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신유, 방언, 예언, 축귀 등을 가리키는 열광적 은사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은사가 더 우월하다고 보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교회의 일치를 파괴하는 요소들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모임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이렇게 갈가리 찢어진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평화를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 평화를 거부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다고 하면서 하나님 나라와 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그런 분파와 분쟁과 파당을 고린도교회에서 목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몸

바울은 교회 일치가 교회의 정체성이며, 본질이라는 사실을 본문에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바울은 교회를 몸으로 비유합니다. 1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바울은 그림을 그리듯이 교회를 설명합니다. 교회의 구조와 기능은 몸의 원리와 비슷하다는 겁니다.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1) 몸은 여러 지체로 구분됩니다. 손, 발, 눈, 가슴, 그리고 몸 안에 심장, 신장, 위, 큰창자, 작은창자 등, 여러 장기가 있습니다. 모든 지체는 한 몸을 이룹니다. 발이 자기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않았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몸에 붙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귀가 눈이 아니라고 해서 몸에 붙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서로 다르지만 모두 몸에 붙어 있습니다. 그런 지체들이 합해서 하나의 몸을 이룹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지체가 다르다는 겁니다. 각각의 지체가 나뉘지 않고 모두 하나의 지체라고 한다면 그건 몸이 아닙니다. 모두 손이거나 모두 발이거나 하면 제대로 된 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원리를 교회에 적용합니다. 교회 신자들이 제각각 다르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달라야만 합니다. 각각 할 일도 다릅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배우는 사람도 있고, 청소하는 사람도 있고, 남을 돌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두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배척할 수 없습니다.

2) 약한 지체가 더 소중합니다. 22-24절이 이를 설명합니다. 팔과 다리는 강하고 눈은 약합니다. 그러나 눈이 더 중요합니다. 팔이 하나 없는 게 눈이 없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보이는 지체보다는 보이지 않는 지체가 더 중요합니다. 심장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몸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약한 지체, 아름답지 못한 지체를 귀하게 보호해야만 몸이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교회도 이와 같습니다. 약한 신자들을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교회를 섬기는 이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원리를 정리하면 몸의 지체 사이에 분쟁이 없고 서로 돌보는 것입니다.(25절) 이런 원리에 따라서 교회 구성원들이 관계를 맺는다면 근본적으로 일치를 이룰 수 있겠지요. 거꾸로 교회가 분열하고 신자들의 마음이 찢긴다면 교회의 근본 원리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겠지요. 이것을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돌려보십시오. 우리는 어떤 원리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요?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어 있지 않다는 식으로 서로 분리하려고만 하거나, 약한 지체를 서로 돌보고 싶다기보다는 그들 앞에서 우월감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요?

이 대목에서 궁금증이 생길 겁니다. 실제로 교회에서 말썽을 피우는 사람과도 무조건 화합해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건 아닙니다. 파렴치한 일을 행한 사람은 교회가 공식적으로 적절하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그런 일들은 필요합니다. 더구나 신앙적인 진리를 위해서는 경우에 따라서 치열하게 싸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진리 투쟁에서는 바울도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마틴 루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은 그런 진리의 차원이 아닙니다. 자기를 내세우는 소모적인 경쟁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욕망으로 인한 분쟁을 말합니다. 앞에서 짚은 대로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신유, 예언, 영 분별, 방언, 통역 등의 은사를 놓고 무엇이 더 큰지 싸웠습니다. 불필요한 경쟁이고 분쟁이었습니다.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사소한 문제로 싸웁니다. 좋은 일을 앞에 놓고도 적대적으로 대합니다. 바울은 몸 가운데 분쟁이 없고, 여러 지체가 서로 돌봐야 하듯이 교회에 속한 이들도 그래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면 실제로 교회가 일치를 이룰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그런 일치를 이룬 적이 별로 없습니다. 지금도 분열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교파 사이에도 그렇고, 신자 개인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신자들의 수준이 낮거나 인격이 불량하거나 신앙이 부족한 탓일까요? 아닙니다. 꽤 괜찮은 사람들이 모여도 분쟁은 없어질 수 없습니다.

교회 분열의 이유는 사람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데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에 걸쳐 있다는 사실이 그 이유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지금 우리가 공동체로 모이는 이 현실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보이는 교회의 토대가 되는 영적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완전한 교회, 이미 승리한 교회, 그래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마치 삼위가 일체를 이루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교회는 불완전한 교회,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아직 투쟁 중에서 있는 교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분리되어 있습니다. 보이는 교회의 그런 상처는 종말이 되어야 완전히 치료될 것입니다. 종말에는 보이는 교회가 아예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크고 작은 분열의 상처를 안고 있는 교회를 지고 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보이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승리의 교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가 보이는 교회의 상처를 치료합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마치 우리 몸의 백혈구와 같습니다. 몸에 균이 아무리 많아도 백혈구가 충분하면 몸의 건강을 완전히 잃지 않습니다. 백혈구가 암세포도 방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면역력이 왕성하게 작동하는지 아닌지 달려 있습니다. 면역력을 높이는 훈련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미 승리한, 이미 영광에 들어간, 종말에 그 실체를 확실하게 드러낼 보이지 않는 교회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광의 교회를 가리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12절에서 여러 지체로 된 하나의 몸이 교회라는 말을 하면서 ‘그리스도도 그러하다.’고 말했습니다. 27절에서 이를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갖고 살았는데, 그의 몸이 어떻게 지금 교회가 된다는 말인가요?

우선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물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 예수님은 부활 이전과 이후로 구분됩니다. 부활 이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방식의 몸으로 살았지만, 부활 이후에는 전혀 다른 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부활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부활의 몸은 궁극적인 생명의 몸입니다. 부활의 몸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근원입니다. 골로새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골로새서는 여기서 우주론적 그리스도론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주를 몸으로 하는 머리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우주론적 생명의 근거라는 것이 신약성서 전체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이런 신약성서의 설명이 너무 막막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요. 부활의 주님을 믿고 우리도 부활한다는 사실을 믿으면 충분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신앙은 중요합니다. 각자가 부활의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그 부활의 실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생명의 질적인 변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직 그에게만 그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권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주의 근본이 되셨습니다. 우주는 그의 몸입니다. 우리도 역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우주 전체를 생각해보십시오. 태양과 별과 달도 모두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물, 공기, 흙, 산, 강, 꽃, 산양, 고래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아침 안개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지체들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 세계와 자연이 그리스도 자체라는 말이 아닙니다. 태양을 신으로 섬기는 이집트의 신앙을 흉내 내자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몸’이 그 대답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입니다.(엡 4:15) 또한 그리스도는 세상의 머리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차원에서 교회와 세상은 똑같습니다. 세상은 확대된 교회이고, 교회는 축소된 세상입니다. 그리스도는 양쪽 모두의 몸입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각각의 지체로 하나를 이루고 있듯이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세상에 각각의 지체로 하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바울의 진술이 실감 나지 않는 분들이 계신가요? 우리가 이 세상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소유, 경쟁, 욕망으로만 삶을 확인하는 세상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시각으로 세상과 교회를 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 영성입니다. 그게 보이는 사람이 있고,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라일락이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사람이 있고, 들리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몸’이라는 사실은 은폐의 방식으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와 존재 신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신비를 아는 사람들은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교회 일치의 원리를 몸으로 살아낼 수 있습니다. 서로 분쟁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 돌보는 삶이 그것입니다. 이런 능력이 우리 교회에서 넘쳐나 세상으로 밀려들기를 바랍니다.(주현절 후 둘째 주일, 1월24일)

고린도전서 1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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