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신비와 선한 일
(엡 2:1-10)
진노의 자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엡 2:8)는 것입니다. 이 문장에서 핵심 단어는 세 가지입니다. 은혜, 믿음, 구원이 그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구원이라는 말을 종교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일상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큰 착각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들은 기본적으로 구원론적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경제적인 억압에서 구원받기 위한 것입니다. 교육을 받은 것도 무지로부터 구원받으려는 것입니다. 의사, 변호사, 과학자들의 행위도 역시 구원을 목표로 합니다. 가정주부들의 일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인간의 삶을 뿌리로 하는 소설과 시, 예술의 주제는 모두 구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바울은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b)고 말했습니다. 생명을 얻는 것이 구원이라고 할 때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공기, 물, 태양빛이 우리의 생산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에서 이 사실은 분명합니다. 더 궁극적으로 부활을 참된 생명이라고 할 때 우리의 업적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믿음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엡 2:9) 믿음입니다.
성서의 이런 설명이 실질적으로 와 닿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이 실제로는 나를 도와주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아무리 잘 믿어도 인생살이가 뒤틀리기도 하고, 거꾸로 믿음이 없어도 인생살이가 잘 풀리기도 합니다. 이런 마당에 은혜와 믿음을 거론하는 것은 아주 공허한 것처럼 들립니다. 이런 생각은 기독교 신앙의 진수로 들어오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성서는 우리의 삶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보라고 요구합니다. 그럴 때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참된지,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됩니다.
새로운 시각은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음 후의 차이를 보는데서 시작됩니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에베소 교우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합니다.(엡 2:3b) 에베소 교우들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허물과 죄는 세상의 풍조와 공중의 권세자들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공중의 권세자는 악한 영을 가리킵니다. 그런 악한 영을 따른다는 건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한다는 뜻입니다. 허물과 죄는 특별히 심한 부도덕한 행위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육체와 마음이 지향하는 본성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아주 당연한 것으로, 경우에 따라서 고상한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얼마 전에 자살한 탤런트 장자연 씨에 얽힌 스캔들이 지금 일파만파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매스컴에 알려진 바로는 매니저가 그녀에게 폭행을 일삼고, 술시중을 강요하고, 심지어 잠자리까지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소위 장자연 리스트에는 유력지 신문사의 대표를 비롯해서 지도층 인사들이 상당수 거론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의 진위여부는 제가 모르고, 그것에 관해서 관심도 없습니다. 다만 연예계에서 벌어지는 이런 추문들이 인기와 돈, 권력, 그리고 육체적 욕망을 비정상적인 방식으로라도 채워보려는 이 시대정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일들이 어디 이렇게 극단적으로 불거진 사건에만 있겠습니까. 대학과 법조와 종교계에서도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가면서도 우리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이 시대정신은 오히려 그것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이런 방식으로 살았던 에베소 교우들을 향해서 바울은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합니다. 겉으로는 잘 되는 것 같아도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온다는 말씀입니다. 이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거지요. 재수가 없어서 걸렸을 뿐이지 그런 방식으로라도 출세하고 재산을 증식하고 인기를 얻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알게 된 뒤로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삶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늘에 앉다
바울은 5,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시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말입니다. 반복해서 ‘함께’라는 낱말이 따라옵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를 살리시고, 일으키시고, 하늘에 앉히셨다고 합니다. 살리셨다는 말은 허물과 죄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뜻이며, 일으키셨다는 것은 죽음을 극복하게 하셨다는 뜻이고, 하늘에 앉히셨다는 말은 완전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게 했다는 뜻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정답을 말씀드렸습니다. 그가 우리를 살리시고 일으키시고 하늘에 앉히셨다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입니다. 여전히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프고,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지면 약이 오르고, 여전히 교만하고 이기적이고 쉽게 낙심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세련되고 고상하고 인격적인 훈련이 많은 사람들에 비해서 앞서는 게 없으며, 오히려 못할 때도 많습니다. 우리는 병들고 또 죽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살리셨다는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니, 참으로 믿기 어려운 주장처럼 들립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은 오늘 우리 삶에 실증적인 현실로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지금 우리의 삶에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은 하나님의 미래인데, 그 미래가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실존적인 불안은 당연한 것입니다. 드러난 것만을 확실한 것으로 여기는 이 세상에서 드러나지 않은 것을 오히려 더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니까요.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려면 생각 자체를 완전히 바꿔야만 합니다. 만약 세상 사람들처럼 현재 드러난 것만을 확실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는 것이 곧 메타노이아, 즉 회심입니다. 회심이 없으면 우리는 은폐의 방식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설명이 좀더 필요하겠군요.
요즘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열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한국팀이 베네수엘라와 준결승을 벌이고 있습니다. 여기 대표선수로 발탁되어서 뛰는 선수들도 어린 시절에는 아직 그런 가능성만 있었지 실제로 대표선수로 결정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세요. 그 당시의 현재 그들은 연습 선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미 국가대표 선수라는 사실이 숨어 있었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이 하늘에 앉히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의 징표로 우리는 세례를 받았으며, 성만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가 되었으며, 그의 부활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서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생명 사건에 참여합니다. 물론 이것도 은폐의 방식입니다. 아직은 숨어 있지만, 야구 연습선수가 결국 대표선수가 되듯이 궁극적인 현실로 드러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구원은 신비입니다. 신비는 막연하거나 불확실하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현실이 숨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구원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런 구원의 신비를 오늘 본문에서 에베소 교우들에게 전했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셨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말입니다. 에베소 교우들은 이런 사실에 열광적으로 몰입했습니다. 구원이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모든 영혼을 쏟았습니다.
선행의 요구
기독교 신앙은 이것으로 모든 게 끝난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이것이 최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이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산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온전히 실체로 드러나기 전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역사적으로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잠정적인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우들을 향해서 구원의 신비만이 아니라 또 하나의 중요한 신앙의 중심을 말합니다. 선한 일입니다. 선한 일, 선행은 아주 구체적입니다. 신비는 관념적입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의 신비는 선행으로 드러나야 하고, 선행은 신앙의 신비에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그 중심에는 창조자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니”라는 구절이 사도신경의 첫머리라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행위, 그 능력이 기독교 신앙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창조 신앙에 근거해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엡 2:10a)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선한 일과 직결된다는 뜻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선한 일을 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이 사실을 더 적극적으로 해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도록 미리 예비해 두셨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그리고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사람은 이 세상과 역사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세상과 긴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거기서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지난 역사에서 이런 선한 일을 늘 감당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구원의 신비를 오해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구원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의 믿음으로 주어집니다. 그 구원은 오늘의 삶에 숨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걸 이룰 수는 없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놓칠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 토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생각에 일방적으로 묶여 있다 보니 선한 일 자체를 무시합니다. 이런 생각은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왜곡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함으로 구원을 이루는 건 분명히 아니지만 구원의 신비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세상에서 선한 일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비한 방식으로 구원을 일으키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신비에 대한 오해는 세상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이원론적으로 구별하게 만듭니다. 기독교 신앙을 개인적이고 사적인 차원의 용건으로 축소시킨 것입니다. 즉 기독교 신앙을 개인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받는 것에만 한정시킨 것입니다. 그런 탓인지 교회생활을 성실하게 잘하는 사람들일수록 세상의 문제와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군사독재와 물질만능주의가 지배해도 교회에만 잘 나가면 된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그렇게 예비하셨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 재정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대다수 교회의 재정은 교회 자체를 위해서만 사용됩니다. 대외 지출이 평균 10%도 안 됩니다. 아마 5%도 안 될 겁니다. 교회 재정의 몇 %를 대외로 사용해야 하는지는 교회 형편에 따라서 다릅니다. 미자립 교회는 대외 지출을 하려고해도 할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중대형 교회들은 지금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밖으로 돌려야 할 겁니다. 한국 전체 교회 예산의 십일조를 통일기금이나 생태계 복원을 위한 기금으로 내놓는 결단을 보이면 좋겠지요.
선한 일이 반드시 구제, 봉사 문제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삶 전체에 대한 보살핌을 가리킵니다. 거기에는 정치, 경제, 군사적인 문제까지 포함됩니다. 최신 전투기나 탱크를 구매하지 않을 수 있는 정치적 선택을 할 수만 있다면 복지활동을 위해서 더 많은 돈을 투자할 수 있을 겁니다. 기독교 신앙의 성숙성을 강조했던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술 취한 운전사가 버스를 운전하는 경우에 다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머물 수 없고 운전사를 끌어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저는 그런 극단적인 선택이 옳고 그름을 말씀 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교회가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과 그 역사에서 선한 일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각각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책임을 져야 할 선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는 무엇인가요? 그것을 찾아보십시오.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면 학생들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바르게 가르치는 게 곧 선한 일이겠지요. 가사도 역시 선한 일입니다. 주변을 돌보는 모든 일들이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선행이 우리의 자랑거리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것뿐입니다. 더구나 그것은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 예비하신 일입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 신비를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선한 일에도 동참합니다. 그런 마음이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껍질에 불과합니다. 신동엽 시인은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순절 넷째 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신비에 놀라워하십니까? 마음이 설레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과 우리 교회가 어떻게 이 세상의 선한 일에 참여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2008.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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