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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그날이 오리라!

 

그날이 오리라!

(렘 31:31-34)


기원전 609년

기원전 721년에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했지만, 남유다는 식민통치를 받는 조건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유다는 아시리아에게 조공을 바쳤고,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한쪽에 아시리아 종교의 신상을 세워야만 했습니다. 제국의 강압적인 요구 앞에서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 뒤로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 신앙은 악화일로를 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도덕적으로 부패했으며, 우상숭배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 세월이 100년 쯤 흐른 뒤 기원전 629년에 요시아가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개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고취시켰고, 외부적으로는 아시리아로부터의 해방투쟁에 나섰습니다. 국제 정세도 그에게는 우호적이었습니다. 기세등등하던 아시리아는 신흥 제국 바벨론과의 다툼에서 점점 힘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유다를 간섭할 수 없었습니다.

요시아의 개혁운동도 거기까지였습니다. 요시아는 유프라테스를 향해서 진격하던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 군대와 싸우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때가 요시아가 왕이 되어 개혁운동을 펼친 지 20년이 되었던 기원전 609년이었습니다. 요시아의 뒤를 이은 왕들은 왕이 될 만한 자질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었습니다. 이집트나 바벨론에 의해서 봉신으로 임명된 왕들이었으니, 국가를 제대로 관리할 리가 없었습니다. 유다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기원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했고, 많은 지도층 인사들은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바로 이 시기, 그러니까 요시아의 개혁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때로부터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던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예언자가 예레미야입니다. 

그 시기는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던 때였습니다. 요시아에 의해 종교적 개혁이 이뤄질 때는 희망의 빛이 보였다면, 그가 죽고 유대가 총체적으로 흔들릴 때는 절망의 어둠이 짙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요시아의 개혁 앞에서도 예레미야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좀더 확실한 회개와 변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요시아 왕은 예레미야의 눈높이를 따라오지는 못했습니다. 그나마 개혁적이었던 요시아가 죽은 뒤로 주변 제국에 의해서 봉신으로 등극한 허수아비 왕들 앞에서 예레미아의 심정이 어땠을는지는 불문가지입니다. 그의 예언은 전체적으로 심판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오죽했으면 그를 눈물의 예언자라고 불렀겠습니까.

당대의 귀족들과 민중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을 좋아할 사람들은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를 적대하는 사람들에게 의해서 살해당할 위기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렘 37장의 보도에 따르면 고관들이 예레미야를 옥으로 사용되는 서기관 요나단의 집 웅덩이에 가두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시드기야 왕은 그를 궁으로 불러들여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왕이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말라고 탄원했습니다. “내가 거기서 죽을까 두려워하나이다.”(렘37:20)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에게서 별로 큰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시드기야는 고관들과 민중들의 눈치를 보는 유약한 인물이었습니다. 예레미아는 감옥에서 고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예루살렘 멸망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죽었습니다. 역사가 한참 흐른 뒤 그의 예언이 수집되어 오늘의 예레미아서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주로 심판이었지만, 다른 내용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도 심판을 위한 심판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돌아오라는 경고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때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꾸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면 구원이, 위로가 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의 설교본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몰락이 눈앞에 보이는 순간에도 이런 하나님의 구원과 위로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런 구원과 위로를 실제로 확신했을까요? 아니면 일반적인 차원에서 설교 조로 전하고 만 것일까요? 사실 유다가 처한 사태만 본다면 심판 이외에 아무 것도 나올 것이 없습니다. 그는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하나님의 위로를 완전히 손 놓아 버리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새 언약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잠시 뒤로 미루고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구원과 위로가 무엇인지 짚는 게 좋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답이 주어질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구원을 새로운 차원에서 제시합니다. 그것은 새 언약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겁니다.(1절)

새 언약을 맺는 이유는 옛 언약이 파기되었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받은 십계명과 율법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사건을 남편인 하나님과 신부인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으로 표현했습니다. 신부가 언약을 깼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했고, 우상을 섬겼으며, 부도덕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형식적으로만 알았지 그 율법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허울로만 하나님의 백성이었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사실을 그가 살던 역사에서 똑똑히 보았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이 깨진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날 길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주변의 제국들에게 무시당하고 예루살렘이 파괴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신부가 언약을 깼으니 남편이 그를 도와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언약을 회복하신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새 언약입니다. 그것이 옛 언약과 어떻게 다를까요?  

옛 언약은 돌 판이나 양피지에 기록되었지만 새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기록될 것입니다. 옛 언약은 가시적인데 반해서 새 언약은 불가시적입니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옛 언약이 더 확실합니다. 이건 아무도 보태거나 뺄 수 없는 확실한 법입니다. 지금도 재판을 할 때 기준이 되는 헌법과 각종 법률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에 반해 마음에 기록한다는 것은 일종의 양심과 같은 것입니다. 이 세상의 정의를 세우는데 법이 중요할까요, 양심이 중요할까요? 두말할 나위 없이 법이 중요합니다. 양심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데 큰 효과가 없습니다. 사람의 양심은 간혹 마비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왜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기록된다고 주장하는 걸까요?

예레미야는 지금 율법의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의 징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나름으로 그것을 따라가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기록하겠다는 말은 이 세상이 법으로 정의로워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서 법이 필요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법을 없애는 게 차라리 낫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표명한 것입니다.

요즘 한국사회도 법 때문에 시끄럽습니다. 박연차 씨의 불법 자금을 받은 사람들이 구속되고 있습니다. 그의 돈을 받은 사람이 여야정치인만이 아니라 지금 칼을쥐고 있는 검찰과 경찰, 그리고 세무의 고위인사들도 있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는 신영철 대법관이 대법원의 조사를 받았고, 지금 공직자윤리위원회에 회부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광우병 보도와 관련해서 MBC 피디수첩 기자들과 낙하산 인사로 내려온 사장을 불법적으로 반대했다는 이유로 YTN 기자가 구속됐으며, 일부는 석방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들의 법적인 정당성 여부를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서로 다투면서 결정 나겠지요. 법이 인간을 구원하기 힘들다는 말씀입니다. 법은 이현령비현령으로 해석될 때가 많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공식에 휘둘리기도 합니다. 특히 권력을 가진 사람은 법 뒤에 숨어서 얼마든지 불법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원래 법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서 생긴 것인데도 이제는 거꾸로 권력의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북한 체제도 나름의 법치를 내세우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법으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차라리 법이 없는 세상이 더 건강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율법의 근본적인 한계를 뚫어보았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알았습니다. 평소에는 그럴 듯해보여도 약간의 위기만 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법이 사람의 마음에 기록될 ‘그날’이 올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사람은 양심을 속일 수가 없습니다. 속에 숨어 있는 것들이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투명인간이 되는 거겠지요. 투명 컴퓨터나 투명 전화기처럼 투명인간은 속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대로 드러날 겁니다. 지금처럼 이중 플레이를 못하는 거지요. 예레미야는 그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는 더 중요한 사실을 전합니다. 새 언약이 사람의 마음에 기록되는 그날이 오면 여호와 하나님을 전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모두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34절) 옛 언약은 사람들에게 학습되어야만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율법을 읽고 외우고 옷소매에 붙이고 다니며, 집안에도 곳곳에 붙여놓아야 합니다.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기관과 율법을 전문적으로 실천하고 가르치는 랍비들이 나와야 합니다. 율법 공부를 잘 하는 사람에게 박사 학위도 줘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계속 따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도 다른 예언자나 고위직 인사들과 크게 다투며 살았습니다. 고관들은 시드기야 왕에게 이렇게 고했습니다.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재난을 구하오니 청하건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렘 38:4) 예레미야가 백성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상황 앞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도 알아듣는 사람들이 별로 없고 오히려 예레미야를 모함하는 일만 많아졌으니 말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와 오늘이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제 각각 자기가 법을, 정의를, 개인이 출세하고, 국가가 잘 되는 길을 안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 더 나아가서 선동하고 있습니다. 급기야 자기의 뜻과 다른 사람들을 웅덩이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저는 이런 다툼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향한 투쟁은 필요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역사는 발전하게 되겠지요. 문제는 이런 투쟁의 방식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레미야의 예언에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옛 언약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적대하는 예언자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뜻을 아전인수로 해석한 채 상대방을 공격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새 언약을 맺는 그날이 온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날이 오면 더 이상 사람들의 다툼이 필요 없습니다. 굳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라고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이 정의이고, 저것이 진리라고 열을 올리면서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이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실체로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생명의 실체를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에 절망했던 예레미야는 바로 이 사실에 매달렸습니다. 그날이 오기를 마치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듯이 기다렸습니다. 그날이 바로 구원의 날이며, 그 날이 바로 참된 위로의 날이라고 말입니다.


예언의 성취

예레미야의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지 않았고, 그들이 모두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바벨론 포로와 귀환과 로마의 식민통치 등으로 이스라엘은 더 어두운 세월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다른 예언자들의 예언과 마찬가지로 예레미야의 예언도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그의 예언은 확신이라기보다는 희망이었다고 봐야 합니다. 다툼과 욕망과 선동이 난무하는 그 칙칙한 세월에 예레미야는 더 이상 옛 언약으로는 인간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고 하나님의 새 언약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의 예언은 폐기되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600년이 지난 뒤에 예레미야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그의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공동체는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 14:7) 이 말씀을 들은 빌립이 예수님에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레미야가 예언한 그날의 구원과 위로는 바로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의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를 알고 믿는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아직은 일부에게만 알려졌습니다. 비밀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재림하실 때 모든 이들에게 알려질 것입니다. 그날에 생명의 실체가 확연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날은 오리라!  (2009년 3월29일) 

예레미야 31: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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