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가난과 우리의 부요
(고후 8:7-15)
기원 후 50년대 중반 사도바울의 중요한 사역은 가난한 교우들을 위한 모금이었습니다. 롬 15:25 이하에 따르면 바울은 마게도니아 신자들과 아가야 신자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신자들을 위해서 모아준 헌금을 들고 예루살렘을 방문할 예정이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고린도전서 16:1-4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갈라디아 교회에 헌금을 부탁했고, 고린도교회에도 부탁했습니다. 여기에 거론되는 지역은 주로 헬라와 소아시아입니다. 모두 이방-기독교가 자리한 곳입니다. 이 이방-기독교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기독교를 돕는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를 도와야 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박해로 인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당시에 유대 지역에 여러 해에 걸쳐 흉년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교회를 다른 지역의 교회가 십시일반으로 돕는 건 당연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벌인 모금 운동은 상황이 좀 다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바울이 개척하고 떠난 갈라디아 교회에 예루살렘의 대표자들이 와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비판했습니다. 분노한 바울은 그들에게 저주를 퍼붓기도 했습니다. 신학적으로 크게 달랐고, 인간적으로 배신감을 느낄 만도 했지만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팔을 걷어붙이고 수년에 걸쳐서 모금 운동을 펼쳤습니다.
기원후 54년 초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 모금 운동에 참여할 것을 편지로 요청했습니다. 그 편지가 고린도전서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고전 16:1-4절에서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바울은 고린도교우들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시간이 지났는데도 적극적인 호응을 얻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편지를 썼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 고후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균등한 재물
고린도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헌금하겠다고 약속해 놓았지만 별로 큰 성과가 없었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교회를 위해서 헌금한다는 것은 원래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경제적으로 남을 돕는 일 자체가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지만 남에 대해서는 인색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차이가 있긴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남에게 극도로 인색하지만, 어떤 사람은 상대적으로 넉넉하게 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본다면 사람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남의 어려움을 잘 돕지 못합니다. 이런 이기적인 생각과 태도를 무조건 매도할 수도 없습니다. 인류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이기적인 생존 경쟁 방식을 학습했기 때문일 테니까요.
개인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교회 공동체는 이런 이기적인 생존 방식을 벗어나야겠지요. 그게 바로 어려운 교회를 위해서 헌금하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실천하라고 고린도교회에 거듭해서 권면했습니다. 어려움에 빠진 예루살렘 교회를 경제적으로 돕는 일은 고린도교우들에게도 유익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행간을 살펴보면, 우리도 어려운데 어떻게 남을 돕느냐 하거나, 또는 남을 돕다가 그들은 넉넉해지고 우리는 가난해지는 거 아니냐, 하는 불평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논리는 오늘도 한국교회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가난한 교회를 자꾸 도와주면 거지근성만 키운다고 합니다. 배가 고파봐야 목사도 정신 바짝 차려서 목회를 열심히 하고, 그 교회 신자들도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어려운 교회를 돕는 교회도 많습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 재정의 50%를 대외적으로 사용한다고 하네요. 물이 부족한 아프리카의 한 마을에 펌프시설을 해주거나, 아이들을 위해서 학교나 도서관을 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어려운 이웃 교회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미자립교회가 30%가 더 된다는 말이 있으니 더 할 말이 없습니다.
바울은 구제헌금을 고린도교우들에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고후 8:13) 예루살렘 교회는 구호금을 받아서 풍족하게 생활하고 고린도교회는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균등하게 하려는 것이 바로 이 구제 헌금에 담긴 본래 취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14절에서 구제헌금이 도움을 베푸는 교회에 일방적으로 불이익이 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도움을 받던 교회가 훗날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도움을 주던 교회가 나중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바울의 이런 가르침은 사회의 경제 제도에도 적용됩니다. 지금 부자였던 사람이 나중에 가난해지기도 하고, 지금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당대에 부자였지만 그 후손들이 가난해질 수도 있고, 당대에 가난했지만 그의 후손이 부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자기들의 것만을 독차지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경제정의는 요원합니다. 넉넉한 데서 부족한 쪽으로 재물이 흘러가도록 해야겠지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부자에게서 세금을 더 많이 거둬서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게 하면 되겠지요. 이런 경제정의에 입각한 제도를 세워두면 지금 부자지만 나중에 가난하게 될 후손들도 그런 혜택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 15절에서 이런 균등한 삶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출 16장에 나오는 만나 이야기로 제시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중에 만나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아침 일찍 광야에 나가면 만나가 널려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루치의 분량만 거둬들이라고 했습니다. 욕심이 있거나 다음 날의 먹을거리로 걱정하던 사람은 더 많이 거둬들였습니다. 만나를 집에 가서 되로 재어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은 게 없고, 적게 거둔 사람도 부족한 게 없었다고 합니다.
풍성한 은혜
만나 이야기나 바울의 구제헌금 이야기 모두 옳긴 하지만 우리가 그 방식대로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그런 말씀대로 살기에는 녹록치 않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교육관을 건축하고, 교회 묘지를 구입해야 하는데 어떻게 다른 교회를 돕느냐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무조건 남을 돕는 일에만 헌금을 쓸 수는 없습니다. 각각의 교회가 놓인 형편이 다른 것을 감안하지 않고 구제헌금을 충분하게 하지 않는 교회를 무조건 인색하다고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또 하나의 다른 관점에서 볼 때 구제 헌금이 업적의(義)로 변질될 염려도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고전 13:3) 문제는 신앙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구제헌금이 어떤 신앙적인 태도에서 우러나오는가 하는 것 말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설명하는지 보십시오.
바울은 구제헌금에 참여하는 걸 은혜라고 했습니다. 고전 16:3절에서 바울은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은혜는 구제헌금을 가리킵니다. 고후 8:1, 4, 6절에서, 그리고 오늘 본문인 7절에서도 그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은혜를 뜻하는 헬라어 ‘카리스’는 관대함, 선한 뜻, 신적 능력의 특별한 현시, 선물, 축복 등등,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이 볼 때 마케도니아, 아가야,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구제헌금을 모금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좋은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일을 카리스, 즉 은혜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카리스가 여러 의미가 있지만 핵심적으로 하나님과 연관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다른 사람에게 관대할 수도 없고, 좋은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우리는 부패했습니다. 죄인입니다. 이 말을 그러려니 하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자기에게만 집중할 뿐입니다.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 일어나는 모든 폭력과 저주와 싸움도 나르시시즘, 즉 자기연민에 있습니다. 거의 자폐증에 가깝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가난을 몸으로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제헌금에 참여하는 걸 카리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카리스와 세상이 말하는 휴머니즘과 똑같은 것일까요? 형식적으로 본다면 똑같습니다. 양쪽 모두 자기를 초월해서 타인과의 참된 관계를 맺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은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애쓰는 휴머니스트들과 연대해야합니다. 그러나 그런 휴머니스트들은 많습니다. 1999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국경없는 의사회’라는 단체 이름을 들어보셨겠지요? 민족과 종교의 차이를 불문하고 의료의 사각지대에 가서 의술을 실천하는 의료인들의 모임입니다. 유럽에는 이와 비슷한 사회단체들이 많습니다. 개인이 직접 몸으로 참여할 수 없다면 기부금을 내는 방식으로 참여하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인 차원에서 휴머니즘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이 휴머니즘으로 표현될 수는 있지만 휴머니즘이 곧 신앙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휴머니즘은 구제와 사랑의 실천을 사람의 내면적 능력이라고 보지만, 기독교 신앙은 사람의 밖에서 주어진 선물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휴머니즘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지만,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사람 사랑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휴머니즘은 사람 스스로 가능한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게 우리 기독교 신앙의 입장입니다.
휴머니스트들은 이렇게 반론을 펼 겁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구제와 봉사를 실천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휴머니즘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요? 이건 논쟁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각자의 길을 가야겠지요.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뿐입니다. 모든 것의 마지막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시겠지요. 문제는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마지막 판단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참된 박애주의가 하나님,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바른 길을 가고 있을까요? 그리고 실제로 그런 경험이 있나요? 우리가 자기 집중과 자기 집착에서 초월하여 타인을 향해 개방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하나님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신다는 분명한 인식과 경험 있나요? 이것이 바로 바울이 구제헌금을 카리스, 즉 은혜라고 말한 근거입니다.
부요하신 이의 낮추심
본문 고후 8:9절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요점은 세 가지입니다.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원래 부요하신 분이었습니다. 2)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3) 그로 인하여 우리가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첫 요점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였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했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부요한 존재는 없습니다. 두 번째 요점도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보통의 낮추심이 아니라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까지 낮추셨습니다. 십자가는 그 낮추심의 끝자락입니다. 빌립보서 2:1-8절에 이런 그리스도의 낮추심에 대한 찬양이 나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요점은 조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의 낮추심으로 우리가 부요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별로 부요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내세울 게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을 돕고 싶어도 그럴만한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형편이 좋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부족한 게 많다고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10억을 가진 사람은 50억을 가진 사람 앞에서 가난하다고 생각합니다. 고린도교회 교우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바울이 말하는 부요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입니다. 그 부요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은 알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부활생명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과의 일치입니다. 거기서만 우리는 절대적인 부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만 우리는 바울의 고백처럼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며,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빌 4:12)
이런 절대적인 풍부, 부요함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실제로 가장 풍요롭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 이외의 것들은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지 못합니다. 다른 것들이 얼마나 자잘한 것인지를 알만한 분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 그런 자잘한 것들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가 많지만, 우리가 절대적인 풍요를 경험했다면 이런 작은 어려움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풍요로운 생명을, 즉 영적인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이 영적인 풍요로움에서만 우리는 자기에게만 집중하는 삶의 타성에서 벗어나 타인에게 참되게 개방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가난함으로, 그의 낮추심으로 넘치도록 풍요로운 생명을 약속으로 받았으며, 오늘 여기서 신비한 방식으로 그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생명의 신비를 아십니까? 이 진리를 경험하셨습니까? 인생의 세월과 더불어 그 놀라운 영적 세계 안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나요? 아니면 겉돌고 있으신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참으로 부요한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부요한 사람답게 살아가십시오.(2009.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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