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식
사 58:1-9a, 주현 후 다섯째 주일, 2017년 2월5일
1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2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3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린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기원전 538년에 칙령을 내립니다.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온 여러 나라 사람들은 고국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칙령입니다. 이 칙령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새로운 각오와 희망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만사가 그렇지만 마음먹는다고 해서 모든 일이 늘 순조롭게 진행되는 게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계속 살던 유대인들과 바벨론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여러 가지 갈등이 생겼습니다. 예를 들어 토지 문제가 그중의 하나였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부모들이 이전에 살던 집과 땅은 이미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걸 되찾으려면 송사를 해야 하는데, 관리들이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에는 토호 세력으로 성장한 이방인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 중에서 이방인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사회적으로도 혼란스러웠습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8.15 해방 이후에 좌우 이념대립, 국내파와 국외파의 갈등 등으로 인해서 나라를 바르게 세우지 못한 상황과 비슷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유대 백성들의 하나님 신앙이 별로 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금식 문제
이런 상황에서 이사야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 58:1절에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려라.” 그들의 죄는 겉으로 보이는 종교생활과 실제 삶에서 크게 차이가 나는 위선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그것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신앙을 삶의 능력으로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그들이 마치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않는 민족이나 되듯이,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을 알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무엇이 공의로운 판단인가를 나에게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를 즐거워한다고 한다.” 날카로운 비판입니다.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과 정의로운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처럼 표면적으로 종교생활에 열성적이지만 이사야가 볼 때 실제로는 전혀 신앙적이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그들의 종교생활 중에서 한 가지를 예로 듭니다. 그것은 금식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일정한 절기에 금식을 했습니다. 유월절에서 이어지는 무교절에는 딱딱한 빵과 맛없는 나물 등으로 절식을 합니다. 초막절에는 들판에 나가서 일주일 동안 노숙을 했습니다. 이슬람교에도 해가 떠 있는 동안에 금식을 하는 라마단절기가 있습니다. 모두 숭고한 가치가 있는 종교의식들입니다. 이사야는 3a절에서 금식을 둘러싼 유대인들의 불평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 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유대 백성들은 자신들이 금식하고 고행하면서 애를 쓰면 하나님이 응답해주실 것으로 기대했지만, 즉 나라가 확 바뀔 줄 알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원작으로 한 영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사일런스>가 2월 하순 경에 개봉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선교사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김은국의 『순교자』도 역시 바탕에 하나님의 침묵이 자리합니다. 이사야가 비판하고 있는 당시 유대 백성들의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실하게 살아도 고난을 당하고, 거꾸로 대충 살거나 몰염치하게 살아도 편안하게 지낸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시류에 편승해서 적당히 사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는 당시 유대 백성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금식 행위가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3b-4절에서 네 가지로 분석합니다. 1) 그들은 금식하는 날에 자기 향락에 빠졌습니다. 2) 일꾼들에게 중노동을 시켰습니다. 3) 서로 논쟁하며 다퉜습니다. 4) 그들은 서로 주먹질을 했습니다. 이사야가 볼 때 당시 금식행위는 진정성이 없었습니다. 유대 백성들이 금식을 한다고 말을 하면서 실제로는 즐길 거 다 즐기고, 서로 싸우며 지냈습니다. 다른 때와 똑같이 살았습니다. 두 번째 항목에 나온 걸 보면 이사야의 비판이 주로 부자들을 향한 것으로 보입니다. 금식 절기인데도 일꾼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을 비판합니다. 위선적인 금식 행위, 위선적인 예배 행위를 이사야는 돌려서 말하지 않고 직접 비판했습니다. 그런 금식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5절에서(새번역)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으며, 주님께서 너희를 기쁘게 반기실 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2천5백 년 전 이사야의 외침이 오늘 21세기 한국교회에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은 신기하다 못해 두렵기까지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신앙생활은 보여주기 위한 이벤트로 전락되곤 합니다. 예배와 기도회 횟수는 오죽이나 많습니까. 그런 것만 보면 세계에서 한국교회가 가장 신앙이 좋은 교회로 보입니다. 그러나 가장 많이 싸우고 갈라지는 교회입니다. 세계에서 교회의 빈부격차가 가장 심한 나라입니다. 교회 장로가 되기 위해서 가장 치열하게 경쟁하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대형교회의 장로가 되려면 주차관리를 몇 년씩 해야 한다는 말도 합니다. 이럴 바에야 장로도 제비뽑기로 하는 게 훨씬 바람직합니다. 기독교인 기업가들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예배와 금식 행위에 떨어질 때가 많습니다. 자신은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면서 자기 공장의 노동자들은 주일에도 일을 시킵니다. 작년 연말에 기독교 기업을 대표하는 ‘이랜드’가 4만5천명 가까운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의 임금을 체불했다 해서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일이 어쩌다가 벌어진 실수일지 모르지만 금식의 근본정신을 외면한 채 위선에 떨어졌다는 이사야의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
그렇다고 해서 금식으로 대표되는 경건 행위, 즉 예배와 기도와 금식과 성경읽기가 부정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일상에서 추구되어야 할 구도의 과정입니다. 문제는 구체적인 삶이 없는 종교적 형식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 무엇인지를 6,7절에서 8개 항목으로 설명했습니다. 1) 부당한 결박을 풀어준다. 2) 멍에의 줄을 끌러 준다. 3) 압제받는 사람들을 놓아준다. 4) 모든 멍에를 꺾어버린다. 5)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걸 준다. 6) 떠도는 이들을 집에 들인다. 7) 헐벗은 자들에게 옷을 입힌다. 8) (민폐 끼치는) 친인척을 피하지 않는다. 여덟 항목에서 특이한 것은 무엇인가요? 여섯 번째 항목은 수년 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난민에 해당됩니다. 난민을 반기는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난민이 여러 가지로 사회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난민이 정착할 때까지 재정이 들어가야 하고, 그들로 인해서 기존의 노동자들이 불이익을 당할 수 있고, 더 근본적으로 치안의 위협도 받습니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취임식을 끝내자 곧 이라크와 시리아 등 이슬람권 7개국의 이민자들에게 대한 입국 비자를 90일간 허가하지 않고, 난민은 120일간 받아들이지 말라는 행정명령을 내려서 세계가 발칵 뒤집혀졌습니다. 이런 정책이 그대로 수용되면 이미 미국에서 살고 있는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정책도 펼쳐질 것입니다. 미국의 백인 중심주의를 표방하는 트럼프에게서 히틀러의 게르만 민족 우월주의 경향이 농후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얼마 전에는 한국 교포 83세 되는 할머니가 백인 우월주의자인 27세 백인 여성에게 미국 어디선가 피습당해 넘어지는 바람에 머리에 큰 상처를 입는 일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우연하게 벌어진 건지는 모르겠으나 대통령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서 사회 분위기가 크게 달라지는 건 분명합니다. 트럼프의 이런 미국 우월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미국 안팎에서 드셉니다. 반대하는 여러 가지 소리 중에서 인상 깊은 것은 미국이 원래 이민 국가이자 난민 국가라는 주장입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난민처럼 북아메리카로 몰려든 이들이 지금 미국의 조상인 청교도들입니다. 그들의 후손이 이제는 자신들의 뿌리를 부정하는 겁니다. 성경에 손을 얹고 대통령 성서를 하면서 성경의 가르침을 나 몰라라 하고 있습니다. 시위대의 푯말에는 ‘예수님도 난민이었다.’는 문구도 있더군요. 예수님이 유아 시절에 이집트로 피신했다는 마태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이건 맞는 말입니다. 트럼프가 이런 방식으로 나라를 계속해서 운영하다가는 얼마 가지 않아 탄핵 당할지 모르겠습니다. 가치가 혼동되면 될수록 우리는 성경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금식의 본질
이사야는 지금 금식 문제를 놓고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요? 민폐 끼치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이 금식의 본질이라는 뜻일까요? 그래서 금식을 비롯한 예배와 기도 등등 여타의 종교의식은 필요가 없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난민과 굶주리는 사람들에 대한 언급은 위선에 떨어진 형식주의에 대한 지적입니다. 우선 금식이 무엇인지를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의지적으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현대처럼 먹을거리가 넘치는 세상에서는 금식이 더더욱 어렵습니다. 오죽했으면 만병의 근원인 비만이 사회 문제가 되었겠습니까? 살을 빼고 싶어도 그게 잘 안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약은 많이 개발되었지만 식욕 억제 약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나 봅니다. 로마 시대 귀족들은 식탐에 떨어져서 일단 배불리 먹은 다음 다른 방에 가서 먹은 걸 토해내고 다시 먹는 걸 반복했다고 합니다. 그럴 정도로 식욕은 인간에게서 억제할 수 없는 본능입니다. 금식은 인간의 가장 강력한 본능을 거슬러서 가장 원천적인 삶의 중심으로 들어가려는 경건행위입니다.
배가 고플 때 무슨 생각이 납니까? 밥이 생각나겠지요. 피자나 치킨이 생각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솔직한 이야기입니다. 배가 고플 때는 모든 것이 맛있습니다. 고급 식단이 아니라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남이 먹다 남은 것도 맛있습니다. 며칠 굶으면 모든 일상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누구에게 인정을 받느냐 하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한 끼 식사에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행복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에게 가까이 간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굶주림도 생각합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라는 말로 열거한 여덟 가지 항목은 다 이것과 연관됩니다. 억눌린 사람들, 멍에를 맨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민폐를 끼칠 수밖에 없는 난민들을 생각합니다.
금식을 좀더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이 가는 연습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아주 단순합니다.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사람이 며칠 굶으면 죽을까요? 사람의 체력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보통 사람은 물만 마시면 50일은 살 수 있습니다. 물도 마시지 않으면 그 시간이 훨씬 짧아집니다. 병약한 분들은 더 빨리 생명을 잃겠지요. 나이가 들거나 불치병에 걸려서 더 이상 스스로 생활할 수 없게 될 때에 곡기를 끊는 분들도 간혹 있습니다. 그건 의료의 힘을 빌리는 안락사와 달리 자연사에 가깝습니다. 금식을 통해서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훈련을 한다는 것은 생명의 원천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영혼이 정화됩니다. 사람들의 여러 가지 이해타산과 욕망과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생활은 영적인 금식입니다. 일상 과잉으로부터의 탈출입니다.
여러분들은 실제로 금식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제가 신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금식 기도가 유행처럼 자주 행해졌습니다. 심지어 금식 기도원도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저도 신학생 시절에 조금씩 금식을 하긴 했지만 그런 걸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신학생들 중에도 기도를 좀 한다는 친구들은 금식 기도원에 가서 일주일 씩 금식을 했습니다. 제가 전도사로 사역하던 교회의 담임 목사는 신자들의 불만이 쌓이자 40일 금식기도를 다녀오더군요. 외모가 불쌍하게 변한 목사에게 더 이상 불만을 토로하는 신자들은 없었습니다. 금식기도가 교회의 리더십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떨어진 경우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강력하게 호소할 용건이 생겼을 때 금식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럴 수 있고,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오늘 이사야의 설교에서 보듯이 아무리 경건한 행위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수도 있고, 기뻐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우리가 일상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가장 소박한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 대답입니다. 현대의 삶이 너무 복잡하다는 것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거기서 특별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삶이 복잡해질수록 우리는 삶의 근본에서 멀어집니다. 목사의 경우에도 목회가 복잡해질수록 목회 본질에서 멀어지는 거와 같습니다. 현대사회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져서 소박한 삶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모두 농사짓고 고기 잡는 농어촌의 낭만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최선은 생명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집중하는 깊이만큼 우리의 삶은 소박해질 수 있습니다. 금식할 때는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생명과 창조주만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무슨 일을 어디서 어떻게 하면서 살든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집중할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의 삶이 무엇인지를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절로 주변 사람들을 살피게 될 것입니다.
마 6:16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금식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사람처럼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고, 오히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단정한 모습으로 아무도 모르게 금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자신의 삶을 축소시키는 것이야말로 생명을 가장 풍요롭게 누리는 최선의 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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