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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기묘자라! (삿 13 : 15 ~ 25)

2024년 7월 21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Yw9tw1AkgLQ&t=30s

 

▣ 들어가는 말

- 사마천, 『사기』

동양의 대표적인 영웅들의 이야기를 그린 역사서 『사기』 가운데 한 토막입니다. 초나라 장왕 16년 이웃 진나라에서 대부 하징서가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자, 이를 토벌하러 나서면서 진나라 백성들에게 “안심하라, 이 토벌은 오직 하징서를 응징하는 뜻 이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 하지만 하징서를 죽인 다음 진나라를 초나라의 현으로 복속시켜버립니다. 축하연에서 모두가 축하의 말을 했지만, 대부 신숙시는 “소가 자기 밭을 지나갔다고 그 소를 빼앗은 어느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소가 밭을 밟아 밭을 못쓰게 만드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지만, 소까지 빼앗는 것은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진나라를 공격하실 때, 대왕은 진나라에 반란이 일어나 이를 징벌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인의라는 명분을 가지고 정벌하셨는데 도리어 진나라 영토를 합병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는 무엇으로 다시 천하 제후들을 호령하실 수 있겠습니까?”

결국, 장왕은 진나라 땅을 돌려주고 암살당한 왕의 아들을 진나라 왕으로 즉위토록 합니다. 후대에 공자가 이 기록을 읽고 감탄하며, “초나라 장왕이야말로 훌륭한 인물이다. 나라 하나를 얻는 것보다 자기의 말 한마디를 더 귀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동양에 『사기』가 있다면, 서양에는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이 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그리스의 위대한 정치지도자 페리 클래스가 있습니다. 그의 유명한 추모 연설의 한 토막입니다. “아테네에서는 가난 자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개인의 이익을 존중하는 것은 그것이 공공의 이익에 대한 관심을 높일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아테네에서는 시민이라면 누구든 공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따라서 정치에 무관심한 시민은 고요함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도시국가를 떠받치는 시민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매일 눈으로 보고 있는, 그리스인 모두의 학교라고 불러도 좋을 아테네라는 나라입니다.”(페리클래스의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전몰자 추모 연설 중)

 

- 믿음의 영웅, 삼손

동양과 서양 어느 곳 할 것 없이 모든 문화권에는 나름의 영웅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 믿음의 장으로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렇듯 믿음의 영웅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성경 역시 영웅들을 나열하고 있지요.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볼 삼손이라는 인물은 대표적인 성경의 영웅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책 등을 통해서 엄청난 괴력을 가진 사나이로 특히 남자아이들의 선망 대상이 되어왔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영웅은 일반적 세계에서 말하고 있는 영웅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영웅들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던 성경의 저자들은, 세계의 영웅과 대립되는 성경이 말하는 영웅, 진정한 영웅이 누구인지를 말하려 했을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웅은 누구일까요? 삼손의 이야기를 통해 전반적인 성경에 대한 이해와 인간에 대한 이해, 이에 따른 믿음의 영웅의 모습이 무엇인지 등을 함께 고민해 보려 합니다.

▣ 시대 정신과 그리스도인

- 광인의 시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사사 시대는 죄악과 혼돈의 시대, 즉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때였습니다. 법도, 양심도 없고 오직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행하는 시대, 모두가 제멋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셨으므로…”(13:1) 삼손 이야기가 시작되는 13장 첫머리에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무덤 사이에서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살아가는 ‘거라사 광인’의 삶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지난주 가르치는 이들(교사)이 정신질환을 얻게 될 확률이 다른 직업군대비 두 배나 높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아이들이 괴물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지요. ‘군사부일체’라는 문화, 가르치는 자에 대한 존경이나 존중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내게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는지’가 평가의 기준입니다. 교사뿐 아니라, 그 누구라도 내게 이익이 되지 못하는 관계는 쓸모가 없습니다. 정말이지 끔찍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아이들 탓이 아니라 세상을 이렇게 만든 우리 기성세대의 잘못입니다. 돈과 성공을 위해서라면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영혼이라도 팔며, 피도 눈물도 없는 지독한 경쟁의 세계, 이전투구의 세상을 만든 것은 바로 우리 아니었던가요.

‘난세에 영웅이 난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했던가요. 시대와 문화와 환경이 그 시대가 요구하는 영웅을 생산하게 마련인 것이지요. 고대인들의 세계, 그 무엇보다 무력이 절대적인 시대의 가치였던 때에는 힘이 있는 자가 영웅으로 등장할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수많은 영웅은 주로 그런 이들입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성경의 저자들은 그 고대의 영웅들과는 다른 성경적 영웅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혼돈의 시대, 광인의 시대, 힘이 전부인 시대에 그 시대에 어울리는 영웅들이 고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때에 성경은 다른 영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적, 신학적으로 볼 때, 진정한 영웅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려는 것이지요.

- 나실인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13:5) 여호와의 사자가 임신하지 못하는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 아이를 약속하며 한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한 시대에 성서적 영웅의 탄생을 알리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그 시대의 빛이 될 수 있는 인간, 영웅을 성경은 ‘나실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지요. 구별된 삶을 살도록 택함을 받고 태어난 사람 삼손입니다. 오늘날 길을 잃은 세계에 삼손은 그리스도인의 ‘그림자’인 것이지요.

민수기 6장에 의하면 나실인은 하나님께 자신을 구별하고 헌신하기 위해 일정 기간 혹은 평생 자발적으로 서원한 사람을 말하는데, 그 서원 기간 다음과 같은 규정을 지켜야 합니다. 첫째,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못합니다. 둘째, 머리를 깎지 않습니다. 셋째, 시체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실인의 신학적 의미는 헌신과 구별, 성결, 사명 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실인은 하나님께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고 혹은 특별한 뜻이 있어서 스스로 자신에게 부과한 사명을 가지고, 자신이 그 사명을 좇아 사는 사람임을 세상에 공개적으로 드러내며, 추한 것과 더러운 것들 멀리하며 구별된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삼손은 태어나면서부터 나실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어떻게 성경을 이해할 것인가.

- 마노아 부부의 신 경험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사실(Facts)을 전달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사실이 아니라 당시의 인간이 어떻게 신을 만나고 경험했는지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노아의 아내와 마노아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13:3~4) 이런 메시지를 받고 삼손이라는 아이를 낳았다고 표현한 것은, 삼손의 부모는 삼손의 탄생을 “신의 보내심”으로 여겼다. 인식했다. 경험했다. 믿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탄생이 경이롭지 않겠으며 아름답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 탄생에 대한 의미부여, 믿음은 각자가 다른 것이지요. 그런데 마노아 부부는 자식이 없어 어려운 시간을 보냈고, 그러다가 얻은 아들 삼손을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13:5)라고 인식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통찰이며 신비인가요.

덧붙이자면, 성경은 위대한 인간 영웅 서사를 그리고 있지 않습니다. 동양의 사마천의 『사기』나 서양의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과 같이 위대한 인간들, 영웅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오히려 완전히 정반대를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영웅을 보느냐?’ ‘영웅 뒤에 감추어진 신의 손길을 보라.’는 것입니다. 시대가 요청한 영웅의 탄생이 아니라, 신이 보내신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위대함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하찮고 평범하게 보이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나실인이라 선언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놀라운 능력과 비범함, 힘을 가진 특별한 사람만이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13:25)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시대 정신이라는 도구

현대인들은 근본적으로 과학이 모든 것을 알고, 따라서 과학에는 한계가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 지식의 영역에서 과학에 신의 위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최신 기술에 미치지 못하면, 우리는 정체되고 퇴보될 거라고 믿고 있지 않은가요. 우리는 도시화, 산업화, 정보화된 생활환경에서 거의 모든 행동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이런저런 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고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만약 당신이 가진 유일한 도구가 망치라면, 당신은 모든 문제를 못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If the only tool you have is a hammer, you tend to see every problem as a nail.”) 인간의 욕구 계층 이론을 주창했던 세계적인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유명한 말입니다. 우리는 과학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과학으로 바라보고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과학이 가져다준 세계는 오히려 경제적으로 더 가난하게 만들고, 사회적으로 살기 어렵게 만들고, 환경적으로 끔찍한 재앙을 가져오고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요.

고대인들이 모든 문제를 신에게로 가져와서 해결하기를 바랐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요? 우리는 지금 과학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있고, 그들은 신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망치를 가진 자에게 모든 문제가 못으로 보이는 것처럼, 신이라는 도구만을 가졌던 이들에게 모든 문제를 신을 통해 해결하려 했고, 지금 우리는 모든 문제를 오로지 과학으로만 해결하려는 것이지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서를 읽고 해석할 때, 지금 우리의 과학적 관점으로만 해석하려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도구가 기대만큼 그리 온전치도 못하다는 것이지요.

▣ 믿음의 영웅

- 나실인, 삼손?

태어나면서부터 나실인,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그의 삶을 살펴볼까요.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14:1) 그는 이방의 여인, 그것도 원수의 나라인 블레셋의 여인을 아내로 삼으려 합니다. 부모의 반대에도 고집을 피웁니다. 결국, 억지로 부모를 모시고 딤나로 내려가지요.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즉 젊은 사자가 그를 보고 소리 지르는지라.”(14:5) 가는 길에 사자와 마주치는데, 사자를 찢어 죽여버립니다. 시체를 멀리하라 했는데, 멀리하기는커녕 시체를 만듭니다. 그것도 굳이 포도밭에서. 포도 열매도 먹지 말아야 하는데 말이지요. 그곳에 부모가 없었던 것을 보면, 부모 몰래 포도밭으로 간 것으로 보입니다.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 떼와 꿀이 있는지라.”(14:8) 앞서 말씀드렸듯이 시체를 멀리해야 하지만, 오히려 그는 자기가 죽인 사자의 몸에서 꿀을 취합니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 곳 사람 삼십 명을 쳐죽이고 노략하여…”(14:19)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15:15)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6:1) 일일이 나열하기도 벅찹니다. 정말이지 참담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백성의 지도자 사사라고? 나실인이며 믿음의 영웅이라고??

- 믿음의 영웅

이런 문제 때문에 삼손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고 어렵습니다. 완전히 정반대의 해석도 존재합니다. 삼손의 기사를 꼼꼼히 살펴보면, 그가 소위 ‘믿음으로’ 무언가를 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지요. ‘나실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거부하고 반항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비극적 종말을 맞은 괴력의 사나이가 더 어울립니다. 어찌 보면 이 세계적 관점에서 그는 영웅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적 관점으로 볼 때,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보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요. 자기 분에 못이겨 여우 300마리로 블레셋의 곡식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그런 어리석은 행동으로 민족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그러다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1천 명을 죽이는… 엄청난 괴력을 가진 사람이 틀림없지만, 이리도 충동적이고 돌발적인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나가는 말

- 초점은 하나님께 있다!

우리가 자꾸만 놓치고 잊어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삼손에 대한 해석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인간 삼손을 주인공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얼마나 위대한가? 그의 헌신과 그의 힘과 그의 겸손과 그의 기도와 그의 수고와 그의 고난과… 우리가 생각하기에, ‘믿음의 영웅이라면 마땅히 이러이러해야 하지 않은가’라는 편견 때문입니다. 초점을 인간 삼손에게 두었기에 해석이 어려운 것이지요. 영웅에 걸맞은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고, 지독한 외로움과 고통, 악의 순간에도 자신의 신념과 믿음을 지키며, 영웅적 품격을 잃지 않고, 마침내 위대함에 다다르는 것이지요.

성경은 인간이 얼마나 위대하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한계성을 폭로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얼마나 추한 존재인지, 얼마나 오만하고 비굴한 존재인지… 그러나 그런 존재가 ‘신을 만나’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이야기입니다. 신의 은총, 신의 은혜가 인간을 얼마나 위대하게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이 아닌, 신의 위대함을 말하는 비밀과 신비에 감추어져 있는 책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삼손이라는 인간이 아니라, 그 인간 너머에 있는 신의 모습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대체 그분은 누구일까요? 어떤 분이시길래 먼지와 같은 존재를 그리도 찬란한 존재로 바꾸어놓을 수 있는 것일까요?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되지 않는,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

“내 이름은 기묘자(wonderful)라”

하나님을 향해 누구냐 물었던 마노아에게, 하나님은 기묘자, “wonderful”이었습니다. 신비입니다. 기묘자, “beyond understanding”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는 자”로 경험합니다. 저와 여러분께 하나님은 어떤 이름을 가지신 분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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