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에서 평화까지
빌 4:4-7
왜 기쁨인가?
우리가 신약성서를 읽으면서 오해하는 대목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결정적인 부분은 신약성서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보통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에서 느낄 수 있듯이 신약성서에 묘사되어 있는 그 공동체는 우리가 모범으로 삼을 수 있는, 모범으로 삼아야 하는 한 전형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과 주장은 반만 옳습니다. 신약성서의 기독교가 나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이 말이 옳지만 그 공동체가 서로 다른 특성을 견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옳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런 교회의 분열이나 차이 못지않은 큰 단절 현상이 그 당시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 있었습니다. 예컨대 사도와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직접 끌어가던 예루살렘 공동체는 유대교의 모든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었지만 바울을 중심으로 한 이방인 기독교는 율법과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의 모든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결국 이런 신학적 투쟁에서 바울 파는 판정패합니다. 물론 우리가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여러 서신을 전제할 때 바울의 위치가 처음부터 독보적이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는 그 당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비주류였습니다. 이러한 위치에 있던 바울이 주류인 예루살렘 사도 교회와의 연대성을 유지하려고 눈물겨운 투쟁을 감행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사도행전 및 바울의 여러 서신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4절)라는 바울의 간절한 권면은 단순히 일반적인 교훈을 주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예루살렘 모교회로부터 ‘왕따’ 당한 자신의 구체적인 처지에서 나온 실존적인 고백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곧 이어서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라고 언급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잘해보려고 노력을 기울여도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기피인물’로 간주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의 처신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들에게도 관용을 베푸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인의 가장 바람직한 삶의 태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모든 사람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보인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별로 큰 이해타산이 걸려 있지 않은 관계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생각이 늘 자기중심으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 편협한 생각을 품게 마련입니다. 더구나 바울의 경우처럼 평생 자신을 따라다니면서 율법 문제로 시비를 거는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까지 관용을 베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정신적인 수련을 닦으면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앙갚음을 하지 않고 대신 관심을 두지 않는 것까지는 가능하지만 실제적인 관용의 단계까지 들어서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인간의 한계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우선 기뻐하라고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의 이유가 있다면 자신과 좋지 않은 관계에 있었던 사람마저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이 원했던 사람과의 결혼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평소에 자기와 사이가 나빴던 친구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일상적인 인간관계의 시작은 참된 기쁨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기쁨은 우리의 마음을 공중에 뜨게 했다가 다시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제공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주님과 함께 기뻐한다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그런 상태를 경험했을까요? 모든 사람들을 관용으로 대해야 할 우리 일상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오심
바울은 우리의 기쁨의 근원인 주님이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5후) 지적합니다. 이런 구절이 여기에 인용된 것을 보면 빌립보 공동체가 기독교의 최초 복음에 아주 가깝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으로 기대했던 신앙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교회론적으로, 또는 종말론적으로 새롭게 해석되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해석의 과정이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주님의 재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재림을 자신들의 세대 안에서 일어날 역사적 사건으로 본 원시 기독교 신앙이나 그 사건을 유보한 다음 세대의 신앙이나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이미 도래했다거나 아니면 임박했다거나, 또는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다는 신학적 진술은 아직 시간의 실체를 완전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묘사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비유로 설명해봅시다. 어떤 사람은 젊었는데도 죽음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나이가 충분히 들었는데도 아직 시간이 넉넉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든지 여기서 핵심은 죽음을 염두에 두는 데 있는 것처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진술도 역시 기쁨과 주님의 재림이 깊숙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쁨, 관용, 재림이 한 묶음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강절을 맞을 때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한번 쯤 생각하기는 하지만 별로 실감하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는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휴거 장면이 그럴듯하게 그려져 있겠지만 그런 내용들을 사실적인 것으로 믿는 사람은 지나칠 정도로 단순한 사람들 이외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그림으로 묘사할 수는 없지만 그 리얼리티만은 분명하게 확보해야만 합니다. 이 재림신앙의 리얼리티는 이 세계의 역사는 언젠가 끝나게 되며, 옳고 그름에 대한 심판과 함께 생명의 실체가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인 준거로 작동된다는 게 바로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로 이런 재림 신앙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지적함으로써 기독교 신자들이 누려야 할 기쁨의 근원을 해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 재림 신앙과 우리 일상에서 구체화해야 할 기쁨의 관계를 바울이 말하는 것만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물론 재림 신앙은 우리의 일상에 적용되기에는 지나치게 큰 담론이라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래서 바로 위에서 지적한대로 우리의 신앙에서 큰 힘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지만 이런 토대가 확실하지 않다면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참된 기쁨을 발견할 수 없으며, 혹시 기쁨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심리적인 작용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미 부활로 인해서 궁극적인 생명이 선취된 예수 그리스도가 곧 우리에게 오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 때에 우리의 유한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을 흡사 옷을 갈아입듯이 갈아입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믿는 사람은 바울이 권면하듯이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쁨이 우리의 일상에 탄탄하게 자리를 잡는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을 관용으로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림 신앙 이후
바울은 이 짧은 구절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언급한 다음에 이어서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우리의 생명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만 있다면 세상살이로 인해서 걱정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은 기쁨의 근원이 되는 동시에 이 세상의 염려로부터 해방되는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신앙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우리가 여전히 크고 작은 염려와 걱정에 휩싸여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좀더 실제적으로는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서 완성될 생명의 세계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거나 그런 관심이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은 우리에게 아주 소박한 일상적 삶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모든 걱정과 염려를 완전하게 극복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꾸준하게 견지해야 할 기독교적인 삶의 태도가 있습니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6절). 재림 신앙이 단지 거대한 신앙적 형이상학으로 머무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일상으로 침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에서 핵심은 감사와 기도입니다. 재림 신앙에 집중하는 기독교인은, 즉 생명이 완성되는 그 순간을 희망하는 기독교인은 일상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감사’와 ‘기도’로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언제나 감사한다는 것은 단지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일상에 긷든 하나님의 사랑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 마땅히 간직해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오늘 여러 말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약간이라도 영적인 눈으로 이 세상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비록 외면적으로, 또는 일시적으로 낙심할 만한 일들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심층에 놓여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에게 완전히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를 욕망과 연결시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평화
마음 중심에서 감사의 의미를 깨닫고 소박한 마음으로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 기도드리면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를 지켜주신다고 합니다(7절). 그런데 바울은 무슨 의미에서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라고 표현하고 있을까요?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평화라는 말은 이 평화가 완전히 하나님의 자유에 속한다는 뜻이겠지요. 이미 요한복음에서도 설명하고 있듯이 바람처럼 자유롭게 활동하는 성령이 인간의 예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명의 세계를 일구어가듯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샬롬’은 우리의 의도 안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우리가 여려 평화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평화를 실현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평화 실천 방안들은 하나님의 평화에 연결되어 있을 때만 효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계몽된 인류가 그렇게 많은 평화 운동을 펼쳐왔음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실현이 요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차원에서 하느님의 평화(pax Dei)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주문을 외우듯이 입으로만 그렇게 하지 말고 실제로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하나님의 평화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도가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를 심화하는 길이라고 한다면 그런 일상의 삶을 통해서 당연히 하나님의 본질인 평화가 임할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계획하는 그런 형식적인 평화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에 돌입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흡사 형식적인 음악 세계에 머물지 않고 참된 음악의 세계에 들어갈 때 음악이 주는 놀라운 평화를 맛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오늘 우리는 상당히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던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주는 진솔한 권면을 읽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기쁨, 관용, 재림 그리고 감사, 기도, 평화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권면은 단지 교리적인 차원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자기가 당하는 현실에서 나온 신앙고백입니다. 기쁨으로부터 평화로 이어지는 이런 신앙의 길이 바로 기독교인이 일상에서 취해야 할 삶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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