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18. 빌 4:4-9
<기뻐하십시오!>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4절이 가장 핵심적인 구절입니다. 다시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바울이 빌립보 교우들에게 이렇게 기뻐하라고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기독교 신자들에게 기쁨이 가장 중요한 신앙적 덕목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당연히 기뻐해야 합니다. 수능 점수만 잘 나와도 기뻐하고, 원하는 사람과 결혼해도 기뻐하는 마당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의 비밀을 알고, 그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 중에도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경험한 사람들이, 즉 구원받았다는 확신으로 기쁨을 경험한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이런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리면서 두 손을 들고 복음 복음을 부르는 모습을 기독교 티브이 화면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그런 기쁨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이런 분들을 세분하면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처음부터 신앙의 기쁨을 알지 못하는 분들이고, 다른 하나는 처음에는 기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시들해진 분들입니다. 전자의 사람들은 대개 모태신앙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난다는 특별한 경험을 하기 어렵니다. 뜨겁지도 차갑지 않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지요. 후자의 사람들은 친구나 친지의 권유로 예수님을 믿게 되어 신앙의 기쁨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세상살이에 지치거나 신앙의 성장이 없는 탓에 그 기쁨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어느 쪽이 옳은가요?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무조건 기쁘게 살아야 하나요? 아니면 그런 삶은 이상일 뿐이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가요? 이 질문에 결정적인 대답을 찾기는 힘듭니다. 양쪽 다 일리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기쁨을 모른다면 말이 안 되는 거고, 항상 기쁘게 살기에는 이 세상살이가 너무 험악합니다. 우리가 천사가 아니라 몸을 갖고 사는 인간인 이상 이 세상의 어려운 형편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 없으면 실제로 사는 게 불편하고, 더 나아가 마음까지 위축됩니다. 기도한다고 해서 이런 문제들이 당장에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항상 기뻐만 할 수는 없습니다.
고후 8:2절에 따르면 마케도니아 지역의 여러 교회들이 극심한 가난에 쪼들렸다고 합니다. 그 마케도니아 지역의 교회에는 당연히 오늘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빌립보 교회도 포함됩니다. 빌립보 교회는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신앙적으로 핍박을 받기도 했고,(빌 1:28) 바울을 적대하는 사람들이 들어와 거짓된 교리를 가르쳤고(3:2), 교회 내부적으로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자가 크게 다투었습니다.(4:2) 빌립보 교우들은 오늘 우리와 마찬가지로 힘들게 세상을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힘들어 하듯이 빌립보 교우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외친 바울도 빌립보 교우들이 기뻐할 수 없는 형편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의 어려운 형편을 말할 입장이 아닙니다. 그가 처한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합니다. 그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입니다.(1:13)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난 것도 아니며, 보증을 잘못 섰다가 덤터기를 쓴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사회질서를 문란케 한다는 누명을 쓴 것입니다. 억울한 일이지요. 그 당시 감옥생활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인지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건 접어두더라도 바울의 건강이 원래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더 긴 설명이 필요 없겠지요.
감옥생활 자체도 어려웠지만 선교기금이 끊겼다는 사실이 그 어려움을 가중시켰습니다. 먼 곳을 여행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에게 돈이 떨어진다는 것은 곧 생존이 위태로워졌다는 뜻입니다. 그가 피혁세공 기술이 있어서 자비량 선교 원칙을 지켰다고는 하나 그것으로 재정적인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꾸준히 보내준 돈이 큰 힘이 되었는데, 빌립보 교회의 도움이 오랫동안 끊겼습니다. 앞서 지적한대로 빌립보 교회도 재정적으로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이 빌립보 교회는 오랜만에 다시 바울에게 선교기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맡은 사람이 에바브로디도입니다. 그는 선교기금을 가져오면서 빌립보 교회의 소식도 갖고 왔습니다. 그 소식들은 별로 반가운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형편도 어렵고, 자기를 기억해준 빌립보 교우들의 형편도 어려운 가운데 편지를 쓰는 중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기뻐하십시오.” 하고 권면했습니다.
<기쁨의 길>
저는 앞에서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늘 기뻐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을 요구하는 건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뻐하라는 말은 옳은데, 우리는 실제로 기뻐할 수 없다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하나요? 늘 기쁜 마음이 되도록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이 그 해결책인가요? 아니면 매일 아침저녁으로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나는 사랑을 받고 있다. 나는 구원받았다. 그러니 나는 지금 말할 수 없이 기쁘다.” 하고 자기암시를 하면 좋을까요? 이런 방식으로라도 우리의 일상이 기쁨으로 채워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은 것보다 낫겠지요. 사람에 따라서 그런 방법으로 약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신앙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실제로 큰 유익도 없습니다. 잠시 기쁜 것 같아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허무한 사람은 계속 허무할 것이며, 짜증이 나는 사람은 계속 짜증이 날 것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말했는지 잘 보십시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잘 안되지요? 잘 안되는 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늘 주님과 함께 하는 게 잘 안 되듯이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없다는 건 결코 이상한 게 아닙니다. 저도 그게 잘 안 됩니다. 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게 잘 안됩니다. 당연히 항상 기뻐하지도 못합니다. 여러분도 아마 저와 비슷할 겁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긴 합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현실을 완전히 초월한 도사든지, 아니면 사이비 기쁨에 스스로 속는 사람입니다. 실제로는 기쁘지 않으면서도 기쁜 척하고 사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여러분이 항상 기뻐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너무 충격을 받거나 좌절하지는 마십시오. 항상 기뻐하라고 외치는 바울도 아마 실제로 그렇게 살지는 못했을 겁니다. 물론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신앙으로 살기는 했겠지만요.
바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다시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무슨 말인가요? 그 길을 가라는 가르침입니다. 현재는 그게 안 되겠지만 바로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길입니다. 그 삶은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빌립보 교우들이 현재는 많은 어려움으로 기쁘게 살기가 힘들겠지만 거기에 주저앉지 말고 기쁨의 삶으로 꾸준히 진보하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미래에 우리는 주님과 온전히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궁극적인 미래에 우리는 항상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종말론적 미래에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삶은 분명히 미래이지만 지금 여기서 그쪽을 향해서 길을 가는 게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의 길이 그쪽을 향하기만 했다면 아직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라도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미 그런 기쁨을 맛본 사람들이 기독교 역사에 많습니다. 우리도 그들 중의 한 사람들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맛본 기쁨은 비록 퍼즐의 한 조각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전체 그림에서 없어서 안 될 조각입니다. 퍼즐 조각을 맞추면서 그림을 완성해나가듯이 우리가 기쁨의 길을 가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이미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는 삶에 발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관용과 기도>
‘기쁨의 길’이라는 말에 다시 귀를 기울이십시오. 길은 진행 중이라는 뜻입니다. 기쁨의 길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기뻐하는 삶의 길을 꾸준히 가야만 합니다. 길을 가다보면 기쁨이 충만해지는 순간도 있지만 바람 빠진 풍선처럼 가라앉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길을 가야 합니다. 만약 가라앉는 순간에 길을 멈추면 그는 결국 참된 기쁨의 세계에 이를 수 없을 겁니다. 기쁨의 길을 간다는 것은 지금 당장 실제로 기쁘냐, 아니냐에 구애받지 말고 기쁨의 끝에 이른 것처럼 앞으로 나간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바울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을 관용으로 대하는 것입니다.(5절) ‘똘레랑스’라는 프랑스어로 유명한 관용은 기쁨의 열매입니다. 실제로 기쁨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게 됩니다. 기쁨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인색하게 대하겠지요. 가족 사이에도 관용이 필요할 겁니다. 저에게는 이 관용이 많이 부족합니다.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을 보면 아주 쉽게 저 사람은 왜 저래, 할 때가 많습니다. 기쁨이 부족한 탓이겠지요. 신학적으로 아무리 깊은 세계를 안다고 하더라도 기쁨을 모르면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기도입니다.(6절)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아는 사람은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아뢸 수 있습니다. 기도는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미래를 온전히 맡긴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무엇인들 아뢰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부끄러움까지 그분에게 아뢰겠지요. 부모를 신뢰하는 아이들이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모든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아이는 비록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아도 크게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기에게 결국은 좋은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길을 가는 사람은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이건 의무가 아니라 기쁨의 길 자체입니다. 그것이 바로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화>
관용과 기도로 기쁨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죽을 때까지 관용과 기도만 붙들고 있으라는 말인가요? 힘든 일을 무조건 참으면서 감당하라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영성의 대가인 바울이 무엇을 말하는지 보십시오. 7절 말씀입니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기쁘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과 생각이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괜찮은 생활조건인데도 짜증을 내거나 우울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보면 결국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관건이라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지요. ‘에이레네 투 데우’, 하나님의 평화는 그 어떤 조건이나 형편에 따라서 오락가락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생산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가리켜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평화가 무엇인지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유엔 평화유지군은 전쟁이 일어난 곳에 가서 전쟁을 막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분적으로만 평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수능은 전쟁과 같습니다. 청소년들이 이런 전쟁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찾은 평화의 방법은 별로 근본적인 해결책이 못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염려와 걱정을 없애는 사람들의 방법은 돈을 벌거나 건강을 찾거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우리가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은 없겠지요.
하나님의 평화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뛰어넘어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이런 경험이 여러분에게 있을 겁니다. 완전히 죽을 지경이라고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평화로워지는 경험 말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런 평화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그렇게 하십니다. 그럴 때는 참으로 신기하다고 느낄 겁니다. 그런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버텨낼 수 없습니다. 저도 저 자신에게 실망할 때가 많지만 하나님의 평화가 저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크게 좌절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만 본다면 그런 순간들이 흔하지는 않습니다.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힘든 순간이 없었던 사람은 이런 경험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삶이 너무 평탄한 것도 무조건 좋은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어쨌든지 우리 삶의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는 이런 놀라운 경험이 자주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 경험이 아주 일상적으로 일어난다면 더 좋겠지요.
다시 빌립보 교회를 돌아보십시오. 빌립보 교회와 바울의 형편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그 형편에서도 바울은 기뻐하라고 외쳤습니다. 이건 낭만적 신앙도 아니고 광신적 신앙도 아닙니다. 우리 인간 삶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근거해서 제시된 진리의 말씀입니다. 저도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쁨의 길을 가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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