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막 11:1-11)
퍼포먼스?
오늘은 사순절 여섯째 주일이기도 하고 동시에 종려주일이기도 합니다. 사순절은 예수님 부활 이전의 40일 동안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교회의 전통이고, 종려주일은 예수님이 공생애 마지막 단계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흔들었다는 요한복음의 보도를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공관복음의 보도에는 종려가지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나뭇가지로 되어 있고, 그것도 흔든 게 아니라 예수님이 가는 길에 깔았다고 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어린나귀를 탔다고만 했는데, 공관복음은 그 어린나귀를 어떻게 구했는지에 대해서도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이런 차이가 있지만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매우 중요한 요소로 다룬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것이 왜 중요할까요?
예수님의 공생애를 거칠게 도표로 그린다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북쪽 마을인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사마리아를 거쳐 남쪽으로 내려와서 예루살렘에 들어가 활동하시다가 체포당해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갈릴리는 우리나라로 치면 함경북도처럼 변방에 속합니다. 별 볼일 없는 지역의 출신에다가 목수의 아들인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의 권위를 손상하는 일을 벌였으니 무사할 리가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당시 유대교 중심인 예루살렘에 들어오지 않고 갈릴리와 사마리아에만 머물렀다면 십자가 처형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예수님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며, 따라서 인류의 미래도 달라졌겠지요.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루비콘 강을 건넌 것과 비슷합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이 사건을 소홀하게 다룰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 근교인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제자 두 명에게 마을에 들어가서 나귀새끼를 하나 얻어오라고 일렀습니다. 큰 나귀가 아니라 어린나귀입니다. 예수님은 그 나귀새끼에 올라탔습니다.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나귀 등에 얹기도 하고 길에 깔기도 했고, 나뭇가지를 길에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고 외쳤습니다.(9,10절)
이 장면에는 두 가지가 중요한 상징적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탄 동물이 나귀새끼라는 사실입니다. 권위 있게 보이려면 나귀가 아니라 말을 타야만 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른 나귀가 아니라 새끼 나귀를 탔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전통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가랴 9:9,10절에 따르면 평화의 왕인 메시아는 새끼 나귀를 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는 전차와 말과 활을 없애고 민족들에게 참된 평화를 선물로 줄 분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나뭇가지와 겉옷을 길에 깔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제왕의식에 속합니다. 이 두 가지 상징적 사건의 핵심은 예수님이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전자는 메시야로서 평화의 왕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만왕의 왕으로서 실질적으로 능력이 큰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가 예수님을 세상의 정치적 왕이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평화의 왕이라는 사실을 그런 방식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자칫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이 가는 길에 깔고, 요한복음에 따르면 종려가지를 흔들었다는 걸 근거로 예루살렘 전체가 발칵 뒤집혀진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사람들에게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한편의 코미디처럼 비쳤을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서른 살이 넘은 한 남자가 나귀새끼를 탔다는 겁니다. 요즘 같으면 동물학대죄로 걸릴지 모르겠군요.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깔았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잠시 구경을 했겠지요. 이게 실제 상황인지 아니면 일종의 퍼포먼스인지 구분이 안 되었을 겁니다. 대다수의 예루살렘 주민들은 “별 이상한 사람들도 다 있군.” 하면서 잠시 구경하다가 흩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소란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예루살렘에 들어갔으면 예루살렘 시민들의 거국적인 환영 대회나 예수님의 일장 연설이 있음직 하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둘러보시고 조용히 예루살렘을 빠져나갔다는 마가복음 기자의 진술을 보더라도 이건 분명합니다.
나귀새끼를 올라탄 예수
당대의 예루살렘 주민들은 아무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루살렘 입성 사건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당시의 사람들에게 크게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몇몇 사람들에게만 중요했습니다. 부활 사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그것이 생명의 현실로 인식되고 경험되었을 뿐입니다. 역사적으로 정말 의미심장한 사건들은 늘 그렇게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야말로 갈릴리 촌사람들이 일으킨 에피소드에 불과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예수님에게 무관심 했다고 한다면,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적대시했습니다. 예수님을 블랙리스트에 올려놓은 채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이 조금이라도 손상되면 당장 요절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자기를 어떻게 대할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더 이상 갈릴리와 사마리아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종교권력이 얼마나 부패했는지, 그들의 종교행위가 하나님의 뜻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증언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듯이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무관심한 예루살렘 민중들과 다른 한편으로 종교 기득권에 안주하는 제사장이 장악하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희망을 걸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무언가 열심히 움직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번 기회에 실제로 왕으로 옹립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몇몇 제자들은 그런 정치적 야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자신들도 출세할 거라고 생각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로 일컬어지는 베드로마저 사탄처럼 예수님의 길을 방해하고 있었으니, 긴말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들은 호산나 하고 외칠 뿐입니다. 자기들의 흥에 겨워할 뿐입니다. 그런 와중에 예수님은 죽음을 불사하고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는 혼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 입성의 순간만이 아니라 늘 혼자였습니다. 고립무원의 지경이라는 말이 그에게 해당됩니다.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자신은 머리를 둘 데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격적으로 괴팍해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는 게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세리와 죄인, 술친구들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렇게 어울린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를 이해하는 게 아닙니다. 심지어 그는 십자가 처형의 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게 아닌가 하고 외쳤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는 예수님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추종자들과 구경꾼들이 모였지만 그는 속으로 그렇게 외치고 있었을 겁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채 그렇게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우리는 그를 메시야로 믿고 찬양합니다. 그렇게 죽은 이에게 우리는 구원을 요구합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외친 찬송 “호산나, 찬송하리로다.”가 바로 그런 뜻입니다. 가장 희극적인 방식으로 가장 비극적인 운명을 향해서 도살장의 어린양처럼 끌려가고 있는 예수님을 향해서 가장 높은 곳으로부터의 구원을 바라고 있습니다. 엄청난 역설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해 나가고 있는 예수님을 호산나 하고 찬송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예수님이 어떤 상태입니까? 며칠 안에 죽습니다. 죽을 사람에게 “구원하소서.” 하고 외치다니 말이 되나요? 예수님 스스로도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의 외침은 나중에 현실이 되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오늘 성서본문이 가리키고 있는 이런 역설적 상황, 그런 신앙을 이해하려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처한 신앙의 자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당한 십자가 처형 앞에서 혼비백산했습니다. 자신들이 집도 가족도 버리고 따라온 선생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그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이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실은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몰랐습니다. 가능하면 이 잔을 물리쳐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괜한 게 아닙니다. 십자가 죽음 이후에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했던 지난 1,2년 동안의 생활을 되돌아보며 각자 고향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으로 모든 게 끝났다면 예수님과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다른 여러 메시아 운동 중의 하나에 머물렀겠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경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었던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는 경험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경험하고, 집단적으로도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이 무엇인지 그들은 구체적으로 묘사할 능력이 없었습니다만, 그들에게 분명한 것은 죽었던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함께 모였습니다. 그들의 경험이 무엇인지 터놓고 생각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그 경험이 구약에서 이미 예언으로 제시된 부활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모든 것이 확연해졌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에 행하신 모든 사역이 메시아의 일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만이 메시야이며, 그리스도이고, 주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밖으로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식이 오늘 극동에 사는 우리에게까지 전파되었습니다.
마가복음 공동체도 이런 복음의 역사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로 믿게 되자 예루살렘 입성 장면이 새롭게 기억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곧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길이었다고 말입니다. 그의 수난이 바로 인류 구원의 길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그 당시에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된 새로운 시각으로 예루살렘 입성을 부분적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이 수난과 죽음의 길이었지만 그것만이 인류가 생명을 얻는 길이었기에 예수님은 ‘호산나’, 구원하소서 하고 찬송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나귀새끼를 탄 예수님의 모습이 희극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예루살렘 주민에 의해서 무시당한다 해도 그들은 주님을 통해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그 장면은 마가공동체의 신앙적 실존 실존의 자리였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 찬송을 부르지만 세상은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디가 문제입니까? 마가복음의 전체 주제인 메시야 은폐성이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식하지도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그것은 훗날 제자 공동체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것은 그것을 인식한 사람만이,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진리가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조상 대대로 동굴 안에서만 살고 있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우연하게 동굴 밖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했습니다. 햇살, 나비, 꽃향, 민들레 홀씨를 보았습니다. 그가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와서 동굴 밖의 세계를 아무리 자세하게 설명해줘도 동굴 안에만 있던 사람들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인격이나 지식의 유무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진리의 은폐성이 그 대답입니다.
오늘 기독교인의 실존은 마가복음 공동체의 그것과 늘 동일합니다. 우리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직접 환상적인 경험을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그의 성만찬에 참여합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의 신앙에서 늘 새롭게 반복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곧 부활 경험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은폐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예배를 모른 척 할 겁니다. 우리의 예배가 그들에게 희극적으로 비칠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찌해야 할까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뿐입니다. 우리의 길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죽은, 표면적으로는 아주 평범해 보이는 그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것의 최선은 예배입니다. 종려주일을 맞아 우리 모두 영혼의 목소리로 이렇게 외칩시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2009.4.5)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