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나님이다.”
호 11:1-11, 성령강림후 열한번째 주일, 2016년 7월31일
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2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3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5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6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7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10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11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늘 우리는 제1 독서로 호세아 11:1-11절을 읽었습니다. 이 본문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대목도 있고, 또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본문이 한글로 된 문장인데도 마치 외국어로 된 문장을 읽는 느낌이 들었을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본문은 지금부터 2천7백 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배경으로 합니다. 까마득히 먼 시절의 이야기라서 낯설게 다가오는 건 당연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2천7백 년 전 호세아 선지자 시대로 안내하겠습니다.
바알숭배
호세아는 기원전 750년부터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멸망당한 기원전 722년 직전까지 대략 30년 동안 선지자로 활동했습니다. 당시는 앗시리아 제국이 팽창 정책을 쓰고 있었기에 북이스라엘에게는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 왕들은 주변 여러 나라들과 동맹을 맺어 앗시리아 제국에 맞서보려고 했습니다. 그런 정치 군사적인 동맹이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오히려 화를 자초하기도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경우에는 나쁘게 작용했습니다. 이렇게 국가적으로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절에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 선포를 훗날 사람들이 문서로 만든 것이 구약 호세아입니다. 호세아는 국가의 위기를 단순히 정치 외교적인 차원으로만 보지 않고 더 근본적으로 북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속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우상을 섬긴 것이 문제였습니다. 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호세아만이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알숭배를 가장 큰 죄라 여기고, 바알숭배와 투쟁했습니다.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 시대에 활동한 엘리야가 대표적입니다. 선지자들은 왜 바알숭배를 배척했을까요? 우리는 지금 성경을 통해서 배운 대로 바알숭배를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알은 생긴 것도 역겹고, 추종자들을 성적으로 문란하게 만든다고 말입니다. 그렇게만 보면 오해하는 겁니다. 바알은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섬기던 신의 이름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농경문화를 크게 꽃피운 사람들인데, 자신들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신을 바알이라고 보았습니다. 바알은 다산과 풍요의 원천이라고 말입니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아무리 말려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숭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이해됩니다. 그들의 뿌리는 광야입니다. 가나안에 정주하고 농사를 지으며 풍요로운 문명을 발전시킨 가나안 사람들과 달리 광야에서 정처 없이 떠돌면서 살았던 노마드(유목민)이었습니다. 이들이 40년 광야시절을 끝내고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에 나오는 이야기만 보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드라마틱하게 애굽에서 빠져나와 의기양양하게 가나안을 정복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역사는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출애굽도 그렇고, 광야생활도 그렇고, 가나안 정복도 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늘 생존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가나안 정복도 마음먹은 대로 진행된 게 아닙니다. 여리고와 아이 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 지역의 땅을 열두 지파에게 분배했다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된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은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거기 사는 사람들이 멋져보였습니다. 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자신들과 비교해볼 때 월등하게 멋진 인생을 살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을 부러워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종교인 바알을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돈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 마음과 그 열정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21세기 우리들도 2천7백 년 전 호세아 시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바알숭배를 마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따르는 중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장은 다 번영과 풍요를 절대 이념으로 작동됩니다. 개인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반복해서 바알을 따를 거 같습니다. 오늘 제3 독서인 눅 12:13-21절에는 소위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산 문제로 다투는 사람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어떤 부자가 농사를 잘 지어서 소출이 크게 늘었습니다. 속으로 생각하기를, 곡식을 보관해둘 곳이 부족하니 창고를 넓혀서 거기에 쌓아놓고 평생 편안히 먹고 즐기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사람이 어느 정도의 재산이 있으면 만족한 채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요? 대한민국은 어느 정도 경제 수준에 오르면 그것으로 만족한 채 정의로운 사회를 세워나갈 마음을 먹을까요? 세계 5대 강국에 들어가면 만족할 수 있을까요? 세상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교회는 어느 정도 성장하면 만족할 수 있을까요? 거의 끝이 없을 겁니다. 헬라 신화 이야기처럼 사람은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허기에 시달리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바알숭배를 멀리해야 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헐벗고 굶주리고 고통을 당해야만 할까요? 북이스라엘은 다시 광야의 척박한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일까요? 삶을 즐기면 안 되는 것일까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느 정도의 연봉이 적당한 것일까요? 3천만 원이나 5천만 원까지는 되고, 1억이면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가난 자체를 신앙적으로 미화할 수는 없습니다. 부 자체를 신앙적으로 찬양하거나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선지자들은 자기 백성들이 가나안 사람처럼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문화적으로도 품위 있게 사는 것 자체를 부정한 게 아닙니다. 문제는 바알숭배가 결국 하나님 신앙을 멀리하게 만들고,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 신앙 자체를 파멸시킨다는 데에 있습니다. 다산과 번영과 풍요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참된 자유와 평화와 정의가 실종된다는 뜻입니다. 저는 선지자들의 이런 통찰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긍휼
호세아는 우상숭배에 떨어진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3절 이하에서 일종의 우화 형식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1인칭으로 묘사된 3절은 이렇습니다.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여기 아기 키워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아기의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기립 보행입니다. 대개 돌 언저리에서 기립 보행이 가능합니다. 그 것이 유인원 ‘호모 에렉투스’에게 일어난 사건입니다. ‘에브라임’에게 걸음걸이를 하나님이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둘째 아들입니다. 열두 지파를 따질 때 요셉의 두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들어갑니다. 둘째 아들이지만 에브라임은 할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오히려 장자의 축복을 받습니다.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가 됩니다. 호세아는 요셉의 둘째 아들을 거론하면서 북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각별했다는 사실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기를 돌보듯이 걸음걸이를 가르쳤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호세아는 7절에서 이렇게 호소합니다.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이런 것만 본다면 이스라엘은 싹수가 노란 민족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포기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외쳐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렸다고 선포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선포했습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8절)고 했습니다. 호세아의 마음이 여기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바알에게 영혼을 팔아먹은 민족입니다. 그런데도 호세아는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에게 붙들어 두고 싶어 합니다. 그의 소명 이야기에 그런 마음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호 1:2 이하에 호세아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여호와로부터 듣고 순종합니다.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람함이니라.’ 여기서 음란한 여자는 성전 창기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상징적인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만, 호세아가 이런 극단적인 퍼포먼스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리려 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호세아는 지금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매달리는 중인지 모릅니다. 9절에서 호세아의 이런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진노하지 않는다는 호세아의 예언은 성취되었을까요? 여러분이 다 아는 것처럼 그의 예언은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앗시리아와의 전쟁에서 졌습니다. 왕족은 다 참수 당했고, 귀족들과 가족들은 유배를 당하거나 종의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북이스라엘 지역에 들어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호세아가 순진해서 이렇게 전개될 국제 정세를 전혀 모르고 낭만적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선포한 게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돌아서기를 간절하게 원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위해서 말씀드린 것처럼 백척간두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매달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지 호세아의 간절한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떨어졌습니다. 나라가 끝장났습니다.
호세아의 예언이 성취되지 못했다면 호세아는 실패한 선지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언은 성취 여부가 아니라 그 예언 자체에 의미가 있습니다. 선지자들도 사람이기에 역사를 잘못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생각과 마음은 여전히 예언으로서 가치가 있습니다. 호세아의 경우에 그것은 ‘나는 하나님이다.’는 문장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존재입니다. 사람과 구별되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긍휼과 사랑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호세아는 이 사실을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맞으라는 명령에도 순종했습니다. 칼 바르트의 유명한 신학 명제의 하나가 이와 비슷합니다. Gott ist Gott.(하나님은 하나님이다.)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하나님에게는 가능합니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하나님에게는 옳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다.’는 명제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만 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하나님이다.’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또는 자연과학을 통해서 세상을 완성할 수 있다면, ‘나는 하나님이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선지자들이 그렇게 강한 톤으로 바알숭배를 비판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알숭배와 하나님 신앙은 병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는 데까지 몰고 갔습니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율법과 성전 전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은 변형된 바알숭배입니다. 하나님을 자신들의 율법전통 안에 가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를 우리는 복음서에서 많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친 사건을 보고 예수님을 죽여 없애버릴 생각을 했습니다(마 12:14). 그들은 율법주의 안에 갇혀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시는 일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호세아 시대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로 돌아오지 못한 거와 같습니다. 호세아 시대 사람들이나 예수님 시대 사람들이나 모두 종교적으로 세련된 사람들이었고, 나름으로 삶의 진정성도 있었지만, 자신들의 세상 경험과 삶의 기준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단지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들은 인류를 대표합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들 살해에 똑같은 책임이 있습니다. 인류가 하나님의 아들을, 즉 하나님을 살해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노아홍수와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심판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신성모독 판결을 내린 산헤드린 공회 회원들이나 실제로 십자가 선고를 내린 빌라도 총독이 이 일로 인해서 심판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하늘의 날벼락을 내려서 십자가 사건의 장본인들을 직접 처분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이 세상에 정의가 살아있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습니다. 호세아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사람과 달라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긍휼과 사랑을 세상에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바알숭배에 기울어지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호세아가 절규하듯 외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분의 긍휼과 사랑은 무한합니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런 기독교의 가르침을 단순히 교리로만 알고 있으면 곤란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는 진리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비록 순간적으로 바알숭배에 떨어졌다 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돌아설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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