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나엘의 신앙 너머
요 1:43-51, 주현절 둘째 주일, 2015년 1월18일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소위 세계 3대 종교는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입니다. 불교 창시자인 부처나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는 천수를 다했습니다. 그들은 살아있을 동안에 종교의 토대를 탄탄히 세웠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가 그리스도로 믿는 예수님은 한창 나이인 서른세 살까지 살았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출가해서 하나님 나라를 본격적으로 선포한 햇수는 3년이 채 되지 못합니다. 종교적 토대를 갖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 탓에 제자들의 역할이 큽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베드로와 안드레를 비롯해서 12명을 제자로 세웠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12명만 제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외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제자들도 어느 정도는 있습니다. 가끔 이름이 거론되는 제자들도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오늘 제3 독서에 나오는 나다나엘입니다.
요 1:35절 이하에 따르면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가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빌립이 뒤따랐습니다. 빌립은 친구인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구약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분을 만났다고 전했습니다. 메시아를 만났다는 뜻이겠지요. 그들은 원래 종교심이 깊어서 평소에 이런 대화를 서로 나눴던 것 같습니다. 나다나엘은 46절에서 다음과 같이 반문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즘 우리 식으로 바꿔 말하면 ‘촌놈이 뭘 할 수 있겠냐.’ 하는 뜻입니다. 나사렛은 당시 유대의 정치와 종교 본산지인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나사렛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지역감정이 작용했습니다. 이런 지역감정은 다윗과 솔로몬과 르호보암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솔로몬이 죽고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북쪽 지역의 지파들이 요구하기를, 선왕인 솔로몬은 억압정치를 했으니 당신은 덕스런 정치를 해달라고 말입니다. 요즘 말로 민주화를 요구한 것입니다. 르호보암은 이런 요구를 외면하고 더 포악한 방식으로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결국 여로보암 장군이 반역을 일으켜 북이스라엘을 건국했습니다. 르호보암의 왕권이 미치는 지역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남쪽 일부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다 북이스라엘에 속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국력이 더 강했지만 다윗 왕조의 정통성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남유다에게 있었습니다. 특히 성전이 예루살렘에 자리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예루살렘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성지였습니다. 모든 정치, 종교, 경제 권력이 예루살렘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모두가 그걸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변방 나사렛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것은 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목수 출신이라는 사실도 별로 좋은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와서 보라.’는 친구 빌립에게 끌려 예수님을 찾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고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의 중심을 알아본 것일까요? 나다나엘은 예수님에게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영적으로 상당한 내공이 있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긴 합니다. 요 21:2절에 따르면 부활의 주님이 일곱 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난 그 자리에 나다나엘이 있었습니다. 부활의 증인은 초기 기독교에서 특별한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나다나엘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진술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입니다. 그가 무엇을 근거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반문합니다. 내가 당신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소?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볼 줄 아는 신기한 능력 때문에 놀랐느냐는 반문입니다. 나다나엘만이 아니라 당시의 대다수 유대인들은 그런 기적, 또는 표적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바울도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는 민족이라고 짚은 적이 있습니다(고전 1:22). 구약에는 그런 표적들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대표적으로는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 물줄기가 멈춘 사건입니다. 이런 사건을 통해서 유대인들은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하고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도 이런 표적에 속합니다. 갈멜산에서 벌어진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과의 싸움에서도 큰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엘리야가 바친 번제물에만 하늘로부터 번갯불이 내려서 그걸 다 불태웠습니다. 이런 전통에서 살아온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도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를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기적과 표적을 행해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눅 11: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핑계를 대고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큰 물고기에 먹혀 뱃속에 들어갔다가 삼일 만에 살아나 회개하고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사건도 물론 기적적인 것이었습니다만 예수님은 그것을 자기의 죽음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지, 대중들이 생각하는 기적과 표적을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표적 신앙을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의 표적과 기사를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사 61:1절 이하의 말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눅 4:18). 공생애 중에도 예수님은 장애인을 고치기도 하고, 물을 포도주로 만들기도 하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표적입니다.
표적이라는 말을 좀더 일상적인 것에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다운 모습을 보이라는 요구가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요즘 개신교인들의 숫자는 줄어들고 가톨릭 신자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이유는 본이 되는 삶의 표적에서 개신교회가 뒤쳐진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표적 신앙입니다. 귀중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 표적을 통한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입니다. 5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도대체 이 말씀이 무엇을 가리킬까요? 대충은 알아들을 수 있지만 손에 딱 잡히지는 않습니다. 저런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인지, 아니면 상징적인 의미인지를 딱 부러지게 말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성경에 분명히 나오는 거니까 부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해되지 않는 거를 무조건 사실적인 것으로 믿기도 힘듭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신구약 전체와 기독교 신학을 바탕에 놓고 종합적으로 판단해야만 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사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이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묘사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도 나옵니다. 마 3:16절에 따르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했다고 합니다. 행 7:56절에 따르면 초기 기독교 당시에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사 64:1절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나옵니다.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하늘은 고대인들에게 비밀이 가득한 영역이었습니다. 하늘에는 태양과 달과 별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구름이 일기도 하고 비가 내리고 하고, 천둥과 번개가 치기도 합니다. 고대인들의 눈에 이런 물리적 현상이 얼마나 신비하게, 또는 두렵게 생각됐을지는 불문가지입니다. 하늘이 없으면 이 땅에서의 삶도 역시 불가능합니다. 하늘은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하나님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리학적인 지식이 없던 고대인들과 달리 현대인들은 첨단의 물리적 정보를 알고 있으니까 성경이 말하는 하늘 따위는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성서시대 사람들에는 하늘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중요했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그 엄청난 능력의 하늘도 하나님이 만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설명은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벧엘이라는 광야에서 노숙을 하다가 꿈을 꿉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창 28:12). 이러한 구약 이야기에 근거해서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이라는 사실을 전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성서주석을 보면 대충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으로 본문이 말하려는 근본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신자들도 있고, 여전히 모호하다고 생각하는 신자들도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요? 후자에 속한 분들을 위해서 제가 조금만 더 보충 설명을 하겠습니다. 이를 통해서 전자에 속한 분들도 자신의 생각을 더 명확하게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성경 기자들이 왜 하늘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언급하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살아있다는 것이 별로 확실하지가 않다는 게 우선적인 대답입니다. 이런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으면 신앙은 아예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건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원당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 살기 때문에 자연 현상을 몸으로 대할 경우가 많습니다. 처마 밑에 거미줄을 늘 봅니다. 거기에 몇몇 곤충들이 걸려듭니다. 나비가 걸려서 퍼덕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나비가 불쌍하니까 내가 가서 살려줘야 할까요? 그렇게 하면 거미와 그 새끼들은 굶어 죽을지 모릅니다. 자연에서는 모든 것들이 먹고 먹힙니다. 사자가 배고픈 새끼를 위해서 약한 물소 새끼를 잔인하게 공격합니다. 인간 세상도 방식만 다르지 실제로는 그런 생존경쟁, 약육강식의 원리가 그대로 작용됩니다. 요즘 대구목회자 인문학교 모임 때문에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중앙로 약전골목 근처를 갑니다. 커피 집이 정말 많더군요. 몇 집은 살아남을 거고, 다른 집은 망하게 될 겁니다. 영화업계도 한 영화가 대박을 치면 다른 영화는 망합니다. 출판업계도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돌아가야만 할까요? 더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과 삶 자체는 손에 확실하게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가르칩니다. 인간 삶의 현상에 대한 정확한 지적입니다. 모든 것들은 무상합니다. 계속 변할 뿐이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들은 유기적으로 돌아갈 뿐이지 자기(我)는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곧 죽고,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은 몽땅 원소로 해체되고 말 것입니다.
좀더 일상적인 문제로 질문할 테니 대답해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인가요? 여러분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돈은 물론 아닐 겁니다. 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돈과 함께 삶이 허물어질 것입니다. 취미생활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정치와 사회활동도 물론 아닙니다. 자식과 가족들은 아주 소중한 가치이지만 그것들도 우리에게서 곧 떠나고 맙니다. 어떤 분은 교회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래서 교회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기도 합니다. 교회도 역시 영원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옳은 대답입니다. 다만 하나님 신앙이 바로 서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 신앙을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더 성취하고 싶은 욕망의 통로로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신앙은 우상숭배가 되고 맙니다.
결국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이구나, 그러니 다른 욕심 내지 말고 인생살이를 즐겁게 살기만 하면 되겠네,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인생론과 처세술을 강의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문제는 여러분이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저는 설교자로서 성서 기자들이 경험했고 깨달았으며,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했던 어떤 사건, 또는 어떤 세계를 설명하는 중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이 열렸다는 그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를 비롯해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여러 초기 기독교인들은 제행무상, 제법무아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살이와 생명의 비밀이 예수님에게서 밝혀졌다는 사실을 경험했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신앙고백을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님을 통해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죄와 죽음은 삶을, 생명을 파괴합니다. 겉으로 살아있다고 해도 죄와 죽음에 묶여 있으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은 곧 우리가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로마정치와 헬라철학과 유대종교가 기독교의 이런 신앙을 당시에 어리석고 무가치하다고 비난했지만 초기 기독교는 거기에 흔들리지 않고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에 ‘올인’, 매달렸습니다. 우리는 그런 신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2천 년 전 예수님이 나다나엘과 나누신 대화를 함께 읽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에게 칭찬을 받을 정도로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유대인들의 종교 전통인 표적 신앙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진수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더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복음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에 우리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그 약속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이, 즉 생명의 비밀이 열리는 걸 보게 될 뿐만 아니라 거기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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