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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나사렛 예수와 죄용서 (행 10:34-43)

나사렛 예수와 죄 용서

10:34-43, 주현 후 첫째 주일, 201718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37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43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는 모두 기독교인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예수님이 생전에 직접 교회를 세운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 이후 즉시 교회가 시작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모임이 언제 정확하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없습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교회의 특성이 드러나는 시점입니다. 그 시점은 예수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는 때를 가리킵니다. 만약 이런 일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교회는 역사에 등장하지 못하고 유대교의 한 아류로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예수의 복음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1:8절에 따르면 승천 전승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세계 선교, 즉 이방인 선교에 대한 당위성을 담보하는 문장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당시 처한 상황을 추정해보십시오. 그들은 모태 유대교인들입니다. 유대교가 저들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유대교인으로 살았습니다. 유대교를 떠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유대교 안에 머물면서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경건한 사람들로 자리 매김을 했습니다. 유대교 당국에서도 그들을 묵인했습니다.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로마가톨릭교회 안에 여러 종류의 수도회가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추종자들은 유대교 안에서 나사렛파로 자리했습니다. 그들에게 이방인 선교는 관심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어떤 일들이 주변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겁니다. 안디옥, 에베소, 빌립보, 로마 등등, 이방인 지역에 복음 공동체가 우후죽순으로 세워졌습니다. 소위 이방 기독교의 출발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인의 숫자에서도 유대인보다는 이방인이 더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방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의 율법과 거리를 두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이방 기독교의 대표자는 바울입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이방인 선교에 대한 보도입니다. 이방인 선교의 신학적 정당성을 피력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바울이 본격적으로 이방인의 사도로 활동하기 전에 이미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의 활동에서 이방인 전도의 신학적 단초를 찾았습니다. 이방인 선교의 역사적 뿌리가 깊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

오늘 설교 본문인 행 10:34-43절은 이방인인 고넬료 집에서 행한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로마 백부장의 집에 들어간다는 게 지금 우리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큰 모험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아주 길고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이 사건이 당시로서는 뜨거운 감자처럼 예민한 이슈였다는 뜻입니다. 그 배경을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으로서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수비대의 장교였습니다. 이방인이었지만 유대교로 개종한 그는 어느 날 오후에 환상 중에 천사를 봅니다. 천사는 그에게 말합니다. 욥바에 사람을 보내서 베드로라 하는 사람을 집으로 모셔 오라는 겁니다. 고넬료는 믿을만한 심부름꾼을 50km 떨어진 욥바에 보냅니다. 다른 한편 욥바에 잠시 머물고 있던 베드로는 기도하다가 환상을 봅니다. 각종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과 새들이 들어 있는 보자기가 하늘에서 내왔습니다. ‘잡아먹으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유대인으로서는 먹을 수 없는 짐승들이라서 베드로는 거절합니다. 다시 하나님이 깨끗하게 한 것을 더럽다고 하지 말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별로 기분 좋은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그 환상이 끝나는 순간에 멀리 가이사야에서 고넬료가 보낸 심부름꾼들이 들이닥칩니다. 그 심부름꾼들과 함께 베드로는 길을 떠나 다음날 고넬료 집에 도착합니다.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그간 자기에게 일어난 이상한 현상을 설명한 뒤에 행 10:33절에서 이렇게 말을 마칩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34-43절까지 긴 설교를 합니다. 당시 이방인 선교에 대한 신학적 근거라 할 이 설교로 인해서 기독교는 앞으로 당당하게 이방인 선교를 추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겁니다. 만약 이런 신학적 해석이 없었다면 이방인 선교는 동력을 얻지 못했을 것이며, 예수의 복음은 유대교 안에서 소수의 목소리로 머물러 있었겠지요. 베드로는 무슨 설교를 한 것일까요?

 

베드로의 설교

베드로는 일단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는 말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율법을 지켰냐 아니냐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편협한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이야기입니다. 율법주의는 분리주의적 사고방식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합니다. 베드로 설교는 이런 율법적이고 분리적인 사고방식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극복되었다고 말합니다. 36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평화의 복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과 율법을 지킨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 백인만이 아니라 유색인까지, 지식인만이 아니라 지식이 없는 사람까지 모든 이들에게 해당된다는 뜻입니다. 독선적인 선민의식과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분 나쁜 주장입니다. 특히 이방인들을 낮추어보던 유대인들에게는 꺼림칙한 주장입니다. 베드로 설교는 그 다음 구절부터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설명합니다. 그가 누군지를 알려면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에게 일어난 일을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그것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교에 의하면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가득 채워주셨습니다(10:38). 예수님은 갈릴리와 유대 땅을 다니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사람을고치셨습니다. 이런 능력이 나타난 이유는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를 나무에 달아죽였습니다. 유대 종교권력과 로마 정치권력, 그리고 그런 권력을 추종하던 이들의 야합에 의해서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예수의 역사가 끝장났다면 정의가 굴복당하고 불의가 승리한다는 논리가 성립되었을 겁니다. 인류 역사에는 이런 논리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40절에서 반전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이 사흘 만에 그를 다시 살리셨다.’고 말입니다. 인간의 악을 하나님이 굴복시키고 궁극적으로 승리하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악은 인간적인 방식으로 자행됩니다. 교묘한 자기 합리화에 떨어집니다. 겉으로 보이는 힘에만 의지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악을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나사렛 예수를 특별한 사람들에게 생생한 생명으로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예수의 부활 경험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갑니다. 부활의 예수를 경험함으로써 그를 따르던 이들에게 새로운 영적 시각이 열렸습니다. 예수가 궁극적인 심판자라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42절은 이렇습니다.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예수님이 살아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죽은 사람까지 모든 이들의 심판자라는 말은 정말 놀라운 진술입니다. 삶과 죽음을 단순히 생물학적 차원이 아니라 더 심층적으로 보기 때문에 이런 진술이 가능합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은 생물학적인 삶과 죽음 현상을 넘어섭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를 믿는 자들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11:25,26). 여기서 심판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부도덕하게 행동한 사람들을 징벌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심판은 생명 심판입니다. 심판을 받는다는 말은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립니다.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하나님의 심판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려운 이 세상살이에서도 용감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 저를 생명으로 이끌어주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죄 용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우리에게 익숙한 말이기는 하지만 이런 말들이 관념적으로 들리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걸 오늘 본문 43절이 정확하게 말합니다.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심판은 생명 심판을 가리킵니다. 생명 심판은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생명 심판을 받아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죄 용서가 곧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바로 생명을 파괴하기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 잘못한 일을 반성하고 회개하라는 말이구나.’ 하고 언짢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현대 지성인들은 죄라는 말 앞에서 알레르기 반응을 보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과 주체성이 없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심리적 질병 현상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죄라고 하는 겁니다. 니체와 프로이트 같은 학자들이 그런 방식으로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런 비판을 받을만한 현상들이 교회에서 종종 일어나긴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겁니다. 그런데 자주 노출되면 신자들의 영혼은 병듭니다.


이런 일은 성서가 말하는 죄를 오해하는 데서 벌어지는 겁니다. 죄는 생명과의 단절이며,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그런 단절과 분리를 신화적으로 묘사한 이야기가 선악과 설화입니다. 선악과 설화는 인간이 왜 죄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지를 실증적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 실존을 가리키는 겁니다.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이 스스로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져서 자기를 완성시켜보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실존적인 상황에서 인간은 그 어떤 방식으로도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생명 충만감을 누리지 못합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온갖 좋은 것을 다 소유해도 영혼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영혼이 피폐하다는 뜻입니다. 최순실과 박근혜 두 사람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우리가 속속들이 아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보더라도 그들의 영혼이 피폐하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영혼의 피폐를 안고 살아갑니다. 생명 충만감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3:9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바울은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생명 충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뚫어보았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믿어 죄 용서를 받고 생명 얻는다는 사실을, 즉 영혼의 피폐성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증거를 손에 들고 싶으신가요? 이 문제는 콘서트 장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을 손에 넣는 거와는 차원이 달라서 자신이 실제로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느낄 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완성해야 한다는 강요와 그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어떻게 말로 설명이 되겠습니까? 이 세상이 다 그런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는데 말입니다. 저는 다시 기독교 신앙의 가장 초보적인 가르침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믿는다는 것은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그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것의 종교의식이 세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생명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을 실제로 믿을 수 있다면 그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성취해야 한다는 강요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런 해방을 경험한 사람들은 생명을 얻은 사람입니다.


여전히 이런 설명이 실감 나지 않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 당장 취업해야 하고, 집을 구입해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하고, 부부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병도 고쳐야 합니다. 일상을 해결하는 것만도 힘에 벅찰 지경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의 운명에 자신의 운명을 일치시킨다는 말은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일 겁니다. 일상의 과잉 현상은 현대인들의 삶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삶의 행태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갈 계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궁극적으로는 믿음의 은사를 구해야겠지만 우리 스스로 삶을 성찰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일상과의 단절이 필요합니다. 그게 일주일에 한번 만나서 함께 참여하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성경공부와 신학공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도 절실하게는 다가오지 않을 겁니다. 그것보다 더 긴급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들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간혹 인간의 삶이 고장 난 우주선 안에서의 삶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구 크기의 우주선을 우리가 지금 함께 타고 여행 중이라고 상상해보십시오. 산소 공급기가 고장 났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은 각자 숨을 적게 쉬자고 주장합니다. 산소가 밑바닥을 드러내는 시간만 조금 늦출 뿐입니다. 산소 공급기를 고치려고 애를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산소 공급기는 완전히 망가져서 복구가 불가능합니다. 일정 숫자의 사람들을 죽여서 산소 소모량을 줄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악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한 일입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가능한 빨리 우주선 밖에서 구원의 손길이 찾아와 주는 겁니다. 나사렛 예수가 바로 밖에서 온 구원자, 즉 메시아입니다. 그를 믿으십시오. 영혼을 피폐하게 하는 죄의 힘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10:34-43
https://youtu.be/31uwHftZJFo
https://youtu.be/DTS-piYk9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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