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er::bec483ba-d204-47d4-afbd-8005746530c3

성령강림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요 2: 1 - 11)

6월 30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NtBv27LvTBM&t=72s

 

▣ 들어가는 말

- 『에밀』 : 자연으로 돌아가라!

루소의 위대한 교육서 『에밀』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서 교육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하고 유익한 규칙 하나를 얘기하고자 한다. 시간을 낭비하라는 것이다.” 자연에 도약은 없다. 그러니 충분히 무르익을 때까지, 해야 할 경험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다 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자연 그 어디에도 중간과정을 생략하고 곧바로 성숙으로 가는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인간의 성숙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래야만 된다고 본 것이지요.

“어른들이여, 제발 인간다워라. 그것이 당신들의 첫째 의무이다. 신분과 세대를 뛰어넘어 인간답게 행동하라. 아이들을 사랑하라. 자애로운 마음으로 그 아이들의 천성을 독려하라. 당신에겐 그 아이들의 행복을 빼앗을 권리가 없다” 그러니 함부로 우리의 생각과 판단, 조급함으로 아이들의 자연적인 성장을 가로막지 마라. 그들을 파괴할 권리, 그들의 행복을 파괴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입니다. 멋지지요?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욕심과 조급함 때문에, 아이들의 현재를 무참히 짓밟고 있는지요. (예, 세월호의 아이들)

신의 길을 좇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충분한 시간과 경험이 있고 난 후에야 비로소 성숙의 열매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 하나님이 오시다!

- 신의 현현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매우 신학적 철학적입니다. 철저하게 예수를 겨냥하고 있음도 보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첫 구절부터 굉장히 심오하고 어렵고, 매우 의도적으로 철저한 계산에 따라 시작하고 있습니다. 소위 엘리트들, 지식인들에게 ‘예수를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까?’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오래 고민한 흔적이 보입니다. 그리고 명확한 예수에 대한 기독론을 가지고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서론(요1:1~18)의 끝부분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신앙인들의 가장 큰 열망이 있다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 다시 말해서 신을 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열망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은혜로 그분이 직접 예수라는 인간의 몸으로 육화되어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신을 볼 수 있을까요? 다들 아시다시피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추하고 연약하디 연약한 인간이 신을 대면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 인류의 영원한 바람을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셨다는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글은 정말 자세히 볼수록 어마어마합니다. 어떻게 감히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어서 세례 요한의 입을 빌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른 양이로다.”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앞에서 엄청난 주장(하나님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을 하고 난 후, 그 사람이 바로 예수라고 요한의 입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영화 『관상』에서 처음으로 이정재가 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대체 그가 누구인지 궁금증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등장하는 모습은 아니나 다를까 ‘과연 저 사람이구나’라고 느끼게 만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처음 예수를 소개하는 장면은 그 스케일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도록, 반박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완전히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재미있죠?^^)

 

- 무엇을 찾느냐?

요한의 제자 중 두 사람이 스승의 말을 진짜 믿었나 봅니다.^^ 예수를 따릅니다. 그들을 향한 예수의 첫 말씀입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예수의 화법을 잘 보시면, 마치 왕과 같은 말입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무엇을 찾느냐’ 네가 무엇을 원하든 내 마음에 합당하면 이루어주겠다는 넘볼 수 없는 카리스마가 보이지 않으십니까.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나를 따르라”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명령법적 어투를 사용합니다. 명령을 넘어 엄청난 위압감을 느끼는 태도와 내용입니다. 존재를 규정해버립니다. 너는 게바다. 나를 따라라. … 세상의 그 누가 감히 타인의 존재를 규정할 수 있을까요. 무조건 따르라 명령할 수 있을까요. 너희가 그토록 오랫동안 섬겨오던 그 하나님이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정말 엄청난 선언입니다.

 

- 사흘째 되던 날

오늘 본문의 시작은 “사흘째 되던 날”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디에서부터 사흘째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학자마다 해석이 분분합니다. 요한복음의 서론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창세기의 시작과 닮아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 요한복음은 천지창조 사건과 예수님의 육화를 대등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5)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이는 둘째 날이니라”(창1:8)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이는 셋째 날이니라”(창1:13) 세상의 처음을 묘사하는 창세기의 장엄한 표현들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튿날 요한이…”(요1:29) “또 이튿날 요한이…”(요1:35) “이튿날 예수께서…”(요1:43) “사흘째 되던 날…”(요2:1) 비슷하지 않습니까? 예수의 등장, 시작을 마치 세상의 시작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타난 예수에 대한 요한의 묘사는 정말이지 경탄을 금치 못할 정도입니다. 자신이 소개하고 있는 예수가 얼마나 엄청난 분인지, 감히 표현할 수조차 없는 그분은 곧 ‘하나님이시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 가나 혼인 잔치

- 기적 & 표적

공관복음에는 장마다 기적 이야기가 실려 있다고 할 만큼 기적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으나 요한복음(총 21장)에는 일곱 개의 기적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톨스토이는 사복음 통합 복음서를 만들면서 이적 이야기는 다 뽑아버렸습니다. 거짓말이기 때문에 진리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19세기 저명한 신학자 르낭은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를 위대하게 만들려다가 더 품격을 떨어뜨렸다고 애석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처럼 기적 이야기는 예수의 신성을 높이는 도구가 되기도 했지만,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가나 혼인 잔치’ 사건은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행한 첫 기적 사건입니다. 이 점에서 이 사건은 요한이 앞으로 말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신학적 의미들을 함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11절) 구절로 이 기적 사건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표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표적으로 묘사된 예수의 기적 사건들은 그 기적 사건들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기적 사건들을 통하여 암시하고, 지시하는 어떤 것에 더 큰 비중과 의미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기적 사건을 표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적 사건이 가리키는 본질, 핵심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표적이란 단어에서 우리는 기적을 행하신 예수의 정체를 드러내려는 저자의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의도적으로 기적 사건을 최소로 줄였나 봅니다.

그리고 사복음서 가운데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는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말로 맹물을 포도주로 만든 일이 일어났다면, 다른 복음서는 왜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이것은 사실성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 이 사건을 보아야 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가나 혼인 잔치 사건을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줄거리

이 사건은 예수님이 몇몇 제자들을 부르시고 난 다음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면서 시작이 됩니다.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잔치에 참여합니다. 아마 잔치는 많은 사람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무엇보다 행복한 신랑과 신부 등으로 인해서 흥겹고 즐거운 잔치가 되었겠지요. 한참 잔치가 무르익어갈 무렵 문제가 발생합니다.

마리아가 예수께 와서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합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내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하인들을 불러 뭐든지 예수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는 돌 항아리 여섯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말합니다. 이 돌 항아리는 유대인들이 집안에 들어갈 때 손과 발을 씻을 때 쓰는 항아리였습니다. 보통 그런 항아리들은 돌로 만들어졌는데 왜냐하면 돌그릇들은 불결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항아리가 여섯 개가 있었던 걸을 보면 그날 손님들이 많아 이웃에게 빌려왔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고 한편으로는 그 집이 상당히 부유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 여섯 개 돌 항아리에 물이 가득 채워졌고 예수님은 다소 엉뚱한 명령을 내립니다. 그 물을 떠서 연회장과 손님들에게 가져다주라는 것입니다. 하인들은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손님들은 당연히 포도주로 알고 있는데 맹물을 가져다주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겠지요. 주인은 망신을 당하고 잔치는 엉망이 되고 하인들은 몰매를 맞게 되겠지요. 그렇지만 여느 사람에서는 느껴질 수 없는 예수님의 당당함과 위엄에 하인들은 순순히 따릅니다. 가슴을 졸이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뜻밖의 소리가 들립니다. 연회장은 너무나 만족해서 좋은 포도주를 남겨두었다고 칭찬을 합니다. 다른 손님들도 기뻐하며 잔치는 더욱 흥에 젖습니다. 이렇게 잔치는 무사히, 행복하게 끝이 납니다. 그리고 결론에서 “처음 표적을 행하여, 자신의 영광을 드러냈고,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라고 기록합니다.

 

 

▣ 신의 때는 없다.

- 예수의 때/신의 시간

전 3:1~1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가 있습니다. 신이 일할 때. 예수의 때, 신의 시간은 언제일까요? 모든 인간사에 때가 있듯이, 그때를 따라 인간의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이 물결처럼, 바람처럼 오고 갑니다. 우리는 그때를 알 수 없지요. 그러니 사람일 것이고, 그러니 주어진 삶에 성실하게 임할 뿐이지요. 그때를 알고픈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그러한 욕망 때문에 삶이 일그러지고 인간의 품격이 왜곡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신에게는 ‘시간’ 따위가 있을 리 없지요. 시간이나 때는 인간이 경험하는 것일 뿐, 신은 그런 것에 벗어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로운 신의 운행과 인간의 어떤 순간이 만나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 비로소 신을 인식하고 만나고 신의 옷자락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순간이 아닐까요. 거룩한 신께서 인간의 인식 안으로 들어올 때. 인간이 광대한 신을 경험하는 순간. 어찌 한낱 우주의 먼지나 미물에 불과한 인간이 무한한 존재를 대면할 수 있을까요. 그런 점에서 구약성서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믿음은 당연한 것 아니었을까요. 따라서 신의 임하심은 인간의 능력 너머에 있습니다. 신의 임하심은 인간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임함의 주체는 절대적으로 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래야 마땅하고 그래야 진정한 신 아니겠습니다. 감히 어떤 인간이 신의 임하심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만약 가능하다고 한다면 반 성경입니다. 사이비입니다.

 

- 하나님의 때를 경험하는 사람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때, 예수의 때를 경험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의 임하심을 경험하는 사건을 설명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을 드렸듯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인간을 보면서 그 형상 너머에 있는 신을 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인간들에게 드러내실까요?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셨으나 그것을 인식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혼인 잔치에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 기적(사건)을 알고 경험한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이렇게 기적을 경험한 사람만이 예수가 누구신지 알게 되고 그를 주인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기적의 결과물을 누리면서도 정작 그것을 기적으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저 일상성 빠져 살아갈 뿐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놀라운 일인지, 감격스러운 일인지 알지 못합니다. 오직 기적을 눈으로 보고 체험한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그분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신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은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모두가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대다수 사람은 신의 부재를 경험하지요.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나의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그분의 대답처럼 들리지 않으신가요?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우리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 “아직 내 때가 아니다”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침묵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가장 힘든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일에 관심이 전혀 없다고 느낄 때, 너무나 차갑게 ‘내 일이 아니라고,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실 때, 그분의 임재를 전혀 느끼지 못할 때, 그분을 볼 수 없을 때 우리는 큰 좌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 나가는 말

- 임재의 목적

앞서 말씀드렸듯 신의 임재는 감히 인간이 요구하거나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임하심, 드러내심은 완전히 전적으로 신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2:5) 예수가 자신의 때가 아님을 밝혔으나,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명합니다. 그대로 하라고. 얼핏 예수의 뜻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이유는 자신을 드러내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인간에게 보여주려는 것이지요. 인간은 오직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는 만큼만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의 어떤 노력과 수고로 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리고 있는 하나님은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시려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신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이지요. 그로 인해 인간들이 진정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것이 신의 은혜. 은총입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인간의 신 경험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인간의 기도와 헌신과 노력이, 신의 모습을 열어 밝히는 데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에게, 예수가 마리아에게 그 가능성을 열어 준 것입니다.

 

-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까?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문을 열어준 주인의 배려와 은혜로 우리에게 문이 열립니다. 그러나 문이 열렸다고 해서 그 안으로 마음대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그 실마리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인임을 인정하는가입니다. 그 잔칫집에서 예수님은 손님이셨습니다. 문제는 주인이 해결하는 것이지, 손님이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그분의 주인 됨을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분의 때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인들이 예수님이 시키시는 대로 순종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가 주인일 때 비로소 그분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2:11) 주님의 때, 주님이 누구신지를 인식하고 경험하게 되면 그것은 반드시 “믿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삶은 잔치, 축제와 같을 것입니다. 그 축제와 같은 삶에 저와 여러분이 함께 참여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자신의 존재를 기꺼이 열어 밝히시는

그 은혜, 그 사랑, 그 뜻을 깨닫게 하소서.

우리의 눈을 여시고 당신의 거룩한 임하심을 보게 하소서.

온전히 주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게 하시고

축제와 같은 삶으로 인도하소서.

우리 삶이 주님과 더불어 날마다 흥겨운 잔칫날이 되게 하소서.

설교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