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뒤로 물러가라!”
막 8:31-38, 사순절 둘째 주일, 2018년 2월25일
31.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고난받는 그리스도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고 생각할 겁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리스도라고 믿는지를 설명하라는 요구를 받으면 대답이 쉽지 않을 겁니다. 우리와 똑같이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유대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은 예수님을 메시아가 아니라 선지자로 간주합니다. 그런 생각이 예수님 당시에는 일반적이었습니다. 막 8:27-30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제자들은 자신들이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습니다. ‘세례 요한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엘리야라 하는 사람도 있고,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생각은 무어냐고 재차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이 원칙적으로 옳지만 오해의 소지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정확하게 예고하셨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이 시작되는 막 8:31절이 이를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이 구절에 예수님의 운명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네 가지입니다. 1) 예수는 고난당할 것이다. 2) 예수는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받을 것이다. 3) 예수는 죽임당할 것이다. 4) 예수는 삼일 만에 살아날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거칠게 항변했습니다. 이런 일이 당신에게 일어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당시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승리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버림받고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는 ‘둥근 삼각형’이라는 말처럼 형용모순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도 베드로가 항변했다는 게 이상해보입니다.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거부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 해도 부활까지 거부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는 표현은 호 6:2절에 근거합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이 구절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치료하고 위로해주신다는 사실에 대한 문학적 표현입니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거나 취업에 실패한 젊은이에게 하나님이 ‘너를 살리고 일으킬 터이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위로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구절에서 핵심은 고난과 죽음입니다.
오늘 우리도 베드로와 똑같이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고난당하고 버림받고 죽임 당한다면 누가 기독교인이 되겠습니까. 그런 고난도 잠시이고 결국 복을 받아서 잘 살게 된다고 믿기 때문에 기독교인으로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특히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재물에 대한 욕망까지 신앙적으로 포장되고 있는 마당이니 고난과 버림받음이라는 운명은 어디서나 기피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베드로를 꾸짖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3절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베드로의 잘못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무조건 좋은 것이며, 사람의 일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분리하면 곤란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본문이 굳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는 이유는 세상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사람의 일’은 이스라엘인들의 전통에 묶이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들의 전통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검증된 것이라서 누구나 옳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덕, 윤리, 규범, 질서 등은 어디서나 필요합니다. 그것이 잘 발달되고 작동되는 사회를 가리켜서 문명사회라고 보통 말합니다. 이런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고대 유대인들에게는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이 이스라엘을 추동해가는 원리였습니다. 그들에게 인정받아야만 안정적인 삶이 보장됩니다.
본문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일은 이와 달리 이스라엘의 전통을 넘어서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리스도가 고난당하고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한다는 사실은 당시에는 아무도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고전 1:23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미련한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의 일에만 마음이 쏠려 있는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에 묶이지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추구합니다. 삶의 태도가 완전히 다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예수님은 고난당하고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런 운명은 다 불행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이런 운명에 떨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운명을 막아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런 운명을 통해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저주스러웠던 운명으로부터 가장 거룩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것을 순전히 교리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고난과 소외와 고독은 한편으로(사람의 일) 우리의 삶을 파괴하지만, 다른 한편으로(하나님의 일) 삶을 완성합니다. 혼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생명의 세계야말로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를 실질적으로 느끼려면 혼자 아니면 안 됩니다. 우리 집 마당의 소나무 다섯 그루와 하나 되는 즐거움도 혼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책과 시계와 컴퓨터와 책상 등이 배치된 제 서재의 공간을 깊이 느끼려면, 이럴 때만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히는데, 당연히 혼자여야만 됩니다. 고난과 버림받음이 겉으로는 외롭지만 속으로 자유롭습니다. 이 자유가 가장 중요한 생명 현상이기에 저는 남은 인생을 혼자 지내고 싶습니다. 아직 젊어서 그렇지 더 늙으면 외로워질 거라고 말할 분들이 있겠지요. 그래서 자식들이나 지인들이 찾아와주기를 바랄 거라고 말입니다. 지금 집사람과 둘만 지내지만 불편하거나 외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걸 보면 나이가 더 들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집사람도 저와 비슷하게 생각해서 다행입니다. 내가 먼저 죽으면 집사람의 생각이 달라질지는 제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지 나이가 들면 자식들을 비롯해서 주변 사람들이 떠남으로써 더 자유로워진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고독해야만 누릴 수 있는 생명의 절정을 점점 깊이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일은 고독해야만 경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영성가들, 시인들, 예술가들이 다 그런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이 문제는 목회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저는 평생 작은 교회에서 목사 생활을 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기회가 주어지면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교회에서 소신껏 목회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기회를 잡으려면 나름으로 교회 정치를 해야만 합니다. 결국 저는 목회 현장에서 버림받은 것입니다. 목사들 모임에 자주 나갈 필요도 없고, 교회 성장 프로그램을 연수받으려고 세미나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었고, 중대형 교회 담임 목사로서 감당해야 할 온갖 행정적인 것들과 사람관계에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역설적으로 더 좋은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책도 더 읽고, 공부도 더 하고, 삶에 더 천착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외로우니까 정말 중요한 것에서 풍성해진 겁니다.
‘내 뒤로!’
사람의 일만 생각하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으뜸 제자를 사탄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구나 바로 직전에 ‘주는 그리스도이시다.’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그런 호칭을 붙인다는 것은 지나쳐 보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생각을 아주 엄중하게 본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사탄은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악한 세력입니다. 병행구인 마 16:23절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사탄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일에만 마음이 쏠리면 그가 아무리 인격적이고 교양이 넘치고 마음이 따뜻하더라도 사탄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눈을 감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서신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내 뒤로 물러가라.’는 헬라어 문장은 원래 ‘내 뒤로!’(오피소 무)라는 단어로 표현되었다고 합니다. ‘내 뒤로!’는 ‘나를 따르라.’는 명령,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명령과 같은 뜻입니다. 이 순간에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은 제자로의 부르심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은 실수한 베드로를 물리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깝게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 3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이라는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분간하지 못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사탄이 될 수 있지만, 그래서 자책에 떨어지기도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귀만 열려 있다면 ‘내 뒤로!’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내 뒤로!’가 가리키는 예수 따름은 두 가지 점에서 기독교 신앙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하나는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이었던 ‘예수’를 따르는 것이지 진리나 지혜나 삶의 모범을 따르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삶의 오묘한 진리를 깨우치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수를 믿으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실제로 믿고 따르려면 바로 그 예수가 누군지를 알아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따름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이 어느 정도 성숙해지면 이제 혼자서 구원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반복해서 다시 ‘내 뒤로!’로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자신이 이루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예수님을 따르는 게 아닙니다. 34절은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현대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입니다. 현대는 자기 부인이 아니라 자기 긍정을 중요한 가치로 가르칩니다. 자기 긍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자기 긍정과 대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자기의 삶을 긍정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자학이나 냉소나 열패감에 떨어지라는 게 아니라 자기의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한다면 생명의 완성도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그 어떤 삶의 조건에서도, 즉 고난당하고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조건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불편하게 여기거나 오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생활에서 더 그렇게 나타납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은 상투적으로 ‘내가 십자가를 져야지.’ 하고 말합니다. 자기를 희생하고 양보하고 손해 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희생, 양보, 손해가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집중함으로써 벌어지는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십자가인지가 중요합니다. 지난 몇 달에 걸쳐서 ‘강원랜드 채용 비리’ 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수백 명의 신입사원들이 소위 ‘빽’으로 합격한 사건입니다. 그 수사를 맡은 안 검사가 외압을 받았다고 내부자 고발을 했습니다. 쉽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처리했다면 좋은 자리가 보장되었을 겁니다.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느냐 하는 질문에 안 검사는 ‘검사로 살고 싶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게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옳은 일을 위해서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이니까요.
생명의 길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면서 예수의 제자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35절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그리고 이어서 36, 37절에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고 했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바로 구원받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반복해서 예수를 믿고 따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목숨을 얻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구원받는다는 게 무엇인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오늘 예배에 참석한 분들 중에서 있을까요? 신앙의 경력만 늘어날 뿐이지 자신에게 기독교 신앙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분간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구원 경험이, 즉 생명 경험이 없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제자가 된 것도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해 본 적도 없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져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제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제자가 되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생명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500미터 스피드 스케이팅 종목에서 라이벌인 한국의 이상화 선수를 제치고 금메달을 딴 일본 선수 고다라 나오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스케이트 날 아래에 있는 고리(얼음)을 즐긴다. 그것이 내가 스케이팅을 하는 이유이다. 나는 스케이터로서 얼음과 일치되는 것 자체를 즐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이 혼란스러울수록, 무엇이 옳은지 종잡기 힘들수록 예수님의 뒤로 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그게 최선입니다. 실제로 믿고 그 길을 가보십시오.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가 여러분에게 경험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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