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대림절 둘째 주일, 2020년 12월6일
오늘 예배를 드리는 분 중에서 혹시 위로받고 싶은 분들은 안 계십니까? 각자 형편이 다르니까 생각도 다르겠지요. 정말 위로가 필요한 사람인데도 그걸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위로가 크게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위로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오늘날 위로를 갈망하는 시대입니다. ‘힐링’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자주 사용된다는 사실이 그 근거입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때로는 아부도 마다하지 않는 등, 과잉 서비스도 많습니다. 달콤한 말을 들으려고 무척 애쓰고, 그게 충족되지 않으면 불안해합니다. 참된 위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주어진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여러분은 동의하시는지요.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 사실을 뚫어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일을 전업으로 삼았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으로 선택한 사 4:1~11절은 그 유명한 ‘제2 이사야’(40~55장)가 시작하는 대목입니다. 우렁찬 말씀이 이렇게 선포됩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위로하라.”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아주 강력한 발언입니다. 이 말을 들어야 할 사람들은 기원전 587년에 일어난 바벨론 포로 상황 이후의 유대인들입니다. 당시에 그들의 처지는 곤란했습니다. 기원전 588년부터 일 년 동안 바벨론 군사에 의해서 예루살렘은 포위당했습니다. 애굽이 도와줄 것이라는 희망도 물거품처럼 사라졌습니다. 바벨론의 총공격을 받아 급기야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멸되었습니다. 그들이 존재 근거로 여겨졌던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되었습니다. 도시가 몽땅 사라지다시피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고, 노예로 팔리고,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은 바벨론 관리에 의해서 통치되었습니다. 나라가 완전히 없어진 겁니다. 이 사건이 당시 유대인들의 마음에는 치유되기 힘든 상처로 남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자신들이 믿던 여호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인지, 무능력하다는 것인지, 깊은 회의에 떨어졌습니다. 2절은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은 이제 고생할 만큼 고생했습니다. 벌을 배나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그들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그 어두운 시간이, 그 찜찜하던 순간이, 그 고통스럽던 때가 끝났습니다. 그 지긋지긋하던 바벨론 포로 시대가 끝날 것이라고 본문이 말합니다. 이런 말씀보다 더 위로되는 말씀이 없습니다. 수년간 투병하다가 건강을 찾아 퇴원하는 사람의 심정과 비슷합니다. 지금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멋진 일들이 그들 앞에서 펼쳐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런 순간을 기다리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질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안 됩니다. 3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고대 근동 지역 지도를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바벨론은 지금의 이라크 지역인 유프라테스강에 면해 있는 도시입니다. 거기서 예루살렘까지 오려면 수백 킬로미터의 광야와 사막을 지나야 합니다. 지금 이 말씀을 선포하는 제2 이사야는 그 길을 머리에 그리고 있습니다. 당시 국제 무역을 감당하던 행상들이 낙타를 타고 다니던 길을 따라가야겠지요. 문제는 유대 백성들의 숫자가 많다는 점입니다. 노약자들도 많습니다. 살림살이가 실린 짐수레를 끌고 아주 느린 속도로 광야와 사막을 횡단해야 합니다. 이런 장면은 기원전 13세기에 있었던 출애굽 때와 비슷합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홍해를 건너야 하고, 미디안 광야를 지나야 했습니다. 유목민이나 노숙자 신세로 광야와 사막에서 오랜 세월을 버텨내야만 했습니다. 바벨론은 애굽보다 길이 멉니다. 그러니 준비도 더 철저히 해야 합니다. 마음의 준비도 단단히 해야겠지요. 그게 바로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선포를 듣는 당시 유대인들의 반응이 어땠을지는 우리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의견이 서로 나뉘었을 겁니다. 좋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했겠지요. 제2 이사야의 선포에 동조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결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바벨론 제국이 언제 망할지 아직은 모릅니다. 전성기가 지났다고 하더라도 제국은 쉽게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이 무너지고 대신 들어선 제국이 유대인들을 고국으로 보내준다는 보장도 아직은 없습니다. 길을 떠난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힘든 일들이 얼마나 많을 것이며, 예루살렘에 도착한다고 해서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가나안보다는 바벨론 문명의 수준이 훨씬 높았기 때문에 바벨론에서 계속 살기를 바라는 유대인들도 적지 않았을 겁니다.
제2 이사야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복잡한 문제를 접어두고 아주 궁극적인 주제를 그들에게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설득합니다. 그 내용은 6~8절에 나옵니다. 이를 한 마디로 줄이면 “모든 육체는 풀이요.”(6절)입니다. 7절은 다시 강조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짧은 문장이지만 엄청난 힘이 느껴집니다. 이어서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듭니다. 지금 포로로 잡혀 와서 50년 가까이 타국에서 산 유대인들이나 그들을 수준 낮은 외국인 노동자 정도로 여기던 바벨론 사람들이나 모두 똑같이 풀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바벨론 제국의 막강한 힘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에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바벨론을 떠날 준비를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내 백성을 위로하라.”라는 선포로부터 시작한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육체가 풀이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위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젊은 사람들도 풀처럼 시듭니다. 저도 지난 시절을 돌아보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인생과정에서 겪었던 모든 일은 시드는 풀이나 꽃의 운명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세상에서 인정받았던 모든 일도 시들고 맙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열정적인 삶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닙니다. 그런 삶의 한계를 외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에게도 위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서로 위로할 여유가 생기겠지요.
그렇습니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뜻으로 제2 이사야가 이런 말을 선포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이 엄중한 사실에서 위로를 받으라고 외치는 겁니다. 저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8절 말씀을 보십시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하나님 말씀이 영원히 선다는 말이 손에 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여기 구도적인 태도로 농사를 짓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젊어서부터 평생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의 몸은 시들어가지만, 농사에 관한 생각은 더 깊어집니다. 날씨에 대해서 더 민감해집니다. 곤충과 개구리와 벌의 활동이 더 생동적으로 들어옵니다. 이 사람이 농사에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찾았다면 늙어도 단순히 늙는 게 아니라 더 생생해지고 든든히 서는 겁니다. 바울도 고후 4:16절에서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 인생이 풀처럼 마른다는 그 사실에만 급급하여 하나님 말씀에 가까이 가려는 노력을 게을리할 뿐만 아니라 그런 노력을 시도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악순환에 떨어집니다. 이 문제는 제가 해결해드릴 수 없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돈벌이로만 농사짓지 말고 농사의 도(道)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해도 이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도 최소한 신앙생활의 진정성을 유지하고 살다 보면 언젠가 그 사실이 온몸에 전율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은총의 시간입니다. 그제야 오늘 본문을 선포한 제2 이사야를 도반으로 받아들이겠지요. 그런 도반과 함께 길을 가는 것보다 더 행복한 삶은 없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습니다. 풀과 꽃처럼 시들어도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함께 영원한 생명 세계로 들어간다는 사실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9절은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걱정 근심 염려 좌고우면하지 말고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라고 말합니다. 대단한 표현입니다. 본문에는 이런 명령문이 자주 나옵니다. 위로하라,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외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을 보라. 그들이 봐야 할 “너희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10절이 이렇게 밝힙니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
“보라.”는 표현이 여기서도 두 번 반복되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의 “임하신다.”라는 번역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다른 번역은 주로 “오실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강한 능력자로 오실 것입니다. 와서 상을 받을 자에게 상을 베풀고 벌을 받을 자에게 벌을 내리실 겁니다. 여기서 예외는 없습니다. 아무리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제국과 그 황제라고 하더라도 이 능력자 앞에서는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들은 모두 얼마 후에 시들 풀과 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자로 오신다는 사실이 어떤 이들에게 위로가 되고, 거꾸로 어떤 이들에게 낙심될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장 노골적인 비유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내일 전쟁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피난을 떠나야 합니다. 모두 일주일 먹을거리만 챙길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던 재산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 모든 사람이 똑같은 액수의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누구에게 위로가 되고, 누구에게 낙심이 되겠습니까. 홍수가 나서 모든 집이 무너졌다고 생각해보세요. 홍수가 끝난 다음에 정부가 모두 똑같은 집을 지어주었습니다. 재산이 없던 사람이나 많던 사람이나 이런 절대적인 사건 앞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많은 재산에 목숨을 걸던 사람들은 가장 비극적인 상황에 떨어질 겁니다.
그런 특별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으나 일상에서는 결국 세상이 말하는 돈과 권력과 명예가 우리를 위로한다고, 우리에게 힘이 된다고 말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게 돌아가기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걸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일상이라고 말하는 삶이나 특별한 상황이라고 말하는 삶이나 사실은 다를 게 없어요. 삶의 궁극적인 깊이에서는 다 똑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위로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위로가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착각하는 것뿐입니다. 그걸 구별하기가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이 문제를 극복하려면 다른 수가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여호와의 능력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이 능력을 오늘 본문 11절은 유대인 고유의 문학적인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을 테니, 들어보세요.
목자처럼 당신의 양떼에게 풀을 뜯기시며, 새끼 양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시고 젖먹이 딸린 어미 양을 곱게 몰고 오신다.
어떻습니까? 목자가 양을 몰고 가는 그림 같은 장면이 떠오릅니다. 목자 표상은 시편에 자주 나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그 외에도 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 나옵니다. 목자는 양을 책임집니다.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양을 돌봅니다. 양은 목자 곁에 있어야 생명이 보존됩니다. 궁극적인 위로입니다.
이를 상투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세상과 인생살이를 자기가 투쟁해야 할 전쟁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받는 은총의 순간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인생살이에서 여호와가 목자로 경험되시나요? 아니면 자신의 삶이 고아처럼 버려진 느낌인가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서 많은 것들이 혼란에 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상황이 제각각이기에 일반화해서 말씀드리는 게 힘듭니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목자처럼 여전히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걸 느끼는 사람은 여호와로부터의 참된 위로를 받을 겁니다. 그걸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코로나19 이전에도 역시 느끼지 못했을 겁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라고 표현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요 10:11). 예수 그리스도가 왜 우리에게 목자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바벨론 제국과 똑같은 권위의 로마 제국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가장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운명이 어떤 수렁에 떨어진다고 해도 위로받을 수 있는 근원입니다. 의인이 불의한 이들에게 학대당했으니 우리는 억울할 게 없습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도우려고 요즘의 이야기로 예를 들겠습니다. 이태석 신부(1962-2010)는 의사가 된 뒤에 가톨릭 신학을 공부한 후 사제가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에서 가톨릭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다가 채 오십이 안 되어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태석 신부의 삶에서 위로받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비상한 방식과 뜻하지 않은 순간에 우리에게, 우리의 일상에 능력자로 오십니다. 양을 책임지는 선한 목자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참된 위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영혼의 깊이에서 위로를 받은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치며 살아갈 것입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