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누구냐?”
요 1:19~28, 대림절 셋째 주일, 2020년 12월13일
여러분은 세례 요한을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초기 기독교에서 세례 요한이 차지하는 비중은 예상외로 높습니다. 가장 단적인 예는 세례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세례를 베풀지 않았는데도 세례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종교의식으로 자리를 잡은 이유는 세례 요한의 영향력이, 더 정확하게는 요한을 따르던 사람들의 영향력이 교회 안에서 크다는 데에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만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그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가는 예수님보다 세례 요한을 더 중요한 지도자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읽어야 합니다.
본문 19절에 따르면 유대 당국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세례 요한에게 보냈습니다. 당시 유대 당국은 세례 요한의 활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당시에 대중들에게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당국자들은 그런 현상이 사회를 자칫 혼란에 빠지게 할지 모른다고 판단했겠지요. 세례 요한의 설교는 기존의 사회 체제에 매우 비판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마 3:7~9절이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세례 요한이 종교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던 바리새인들과 정치적으로 기득권층에 속한 사두개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면서 지금까지의 삶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외쳤으니 유대 당국자들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조사해보고 종교 재판에 부칠지 아닐지를, 요즘 표현으로 기소할지 말지를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대표자들이 요한에게 던진 질문은 “당신은 누구냐?”입니다. 당신 정체를 밝히라는 뜻이겠지요. 요한은 이미 공개적으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그들이 요한을 모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일단 그들의 질문을 선의로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늘 새로운 지도자를 기다렸습니다. 세상살이가 어려울 때는 그런 기대감이 더 강했습니다. 당시 그들은 로마 식민지배를 받았습니다. 헤롯 왕은 유대 민족을 위해서 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유대의 전통들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 행위는 형식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들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언어가 되었습니다. 대신 그들은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유대 민족을 구원할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유대 당국은 세례 요한이 실제로 그리스도, 즉 메시아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을까요? 그게 궁금해서 확인하러 온 것일까요?
20절에서 요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사실 세례 요한처럼 지도력이 뛰어난 사람은 메시아로 불릴만합니다.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세례 요한 같은 사람이 없다고 예수님이 평가할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에게 빛을 느끼고 그가 활동하는 요단 광야로 물밀 듯이 몰려들었습니다. 요한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세례받았습니다. 일반 사람들만이 아니라 사회 지도층 인사들도 요한 앞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유대인들이 요한을 지지한 이유는 그의 설교가 감동적이었다는 사실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두 가지 사실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는 요한이 무소유를 실천했다는 사실입니다.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유명 인사가 이렇게 살기는 힘듭니다. 다른 하나는 요한이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인 사람까지 비판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일도 쉽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다그칠 수는 있으나 왕과 귀족을 그렇게 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정도의 사람이라면 그리스도라고 불릴만합니다. 그의 영향력은 훗날 초기 기독교에까지 크게 끼쳤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그는 명시적으로 밝힙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유대 당국의 대표자들은 다시 묻습니다. “당신은 엘리야입니까?” 이런 질문을 던졌다는 말은 당시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서 엘리야의 카리스마를 느꼈다는 뜻이겠지요. 엘리야는 유대 역사에서 가장 강력하게 초자연적 기적과 표적은 행한 사람입니다. 심지어 죽지 않은 채 불 수레를 타고 승천했으며, 세상 마지막 때 다시 역사에 등장할 인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요한은 이번에도 자신은 엘리야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유대 당국의 대표자들은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선지자입니까?” 이어서 2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해 줄 말이 있어야 하겠으니 당신이 누군지 좀 알려주시오.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
이 질문은 유대 당국자의 이름을 빌렸으나 실제로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은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늦게 기록된 성경의 하나입니다. 아무리 당겨서 잡아도 기원후 90년 이후입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오는 시점입니다. 이제는 독자노선을 걸어야 해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더 분명하게 확립해야만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세례 요한 문제는 건너뛸 수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과 그의 가르침은 기독교 안에서 어떤 위치로 자리를 매겨야 할까요? 그런 배경에서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라는 질문이 나온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고 해도 교회 안에서는 독자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본문 23절이 밝히듯이 세례 요한은 이사야 40:3절에 해당하는 인물이라는 게 초기 기독교가 내린 대답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며, 진리 자체가 아니라, 즉 생명 자체가 아니라 진리와 생명을 전하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유대 대표자들이 다시 질문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며, 선지자도 아닌데 왜 세례를 베푸는 겁니까?” 유대 당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허락을 받지 않고 세례를 베푸는 행위는 위법이라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의 영적 권위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앞에서 짚었듯이 요한복음 공동체 안에서도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교회가 관행적으로 세례를 베푼다면 결국 세례 요한의 전통에 기울어지는 게 아니냐 하는 걱정도 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례예식을 중단할 수는 없습니다. 세례가 이미 기독교의 고유한 종교의식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교회의 존재 근거를 위태롭게 할 정도는 아니나 이로 인해서 일부 사람들에게 혼란이 가중될 수는 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세례 요한의 입을 빌려 대답합니다. 26절과 27절입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물로 세례를 베푸는 요한과 차원이 완전히 다른 한 사람이 교회의 중심이어야 합니다. 요한은 그 사람의 신발끈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위치에 서야 합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 문제를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33절에서 이렇게 정리합니다.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풉니다. 물은 형식이고 의식입니다. 성령은 영이고 실체입니다. 물세례만으로는 사람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물세례는 교양과 윤리의 변화라고 한다면 성령세례는 존재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차이를 알아야만 예수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어느 정도 안전이 보장된 유대교에 안주하지 않고 허허벌판이라 할 새로운 길로 들어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대 당국은 요한에게 자격이 없으면서 왜 세례를 베푸냐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예수에게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 병자를 들것에 실어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눅 5:20) 예수의 발언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신성 모독으로 평가했습니다.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세례 요한은 사람들의 죄를 지적했으나 예수님은 죄의 용서를 선포했습니다. 이게 두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바로 앞에서 성령세례는 존재의 변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죄 용서가 바로 존재의 변화를 일으키는 성령세례라고 보면 됩니다.
죄라는 말을 일단 언짢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계몽 이후를 살아가는 현대 지성인들이 주로 그렇습니다. 죄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교회에 나가기 싫다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죄 개념을 오해하기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죄를 생명과의 단절이라고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또는 인간다운 삶의 파괴로 봐도 됩니다. 기독교 교리로 설명하면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힘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니 죄는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이라는 말이 됩니다. 현대인이 아무리 지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인격적이고 휴머니즘적이면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삶의 소외와 위축에서는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아주 직설적으로 말하면, 교양인이라고 자처하는 현대인들이 참된 의미에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행복하다면 이렇게 나대면서 다투지는 않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 죄 가운데서 살아간다는 말이, 그리고 죄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 오늘 현대인들에게도 해당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도대체 당신이 말하는 예수 예수 그리스도의 죄 용서가 뭔데,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여기에도 오해가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부터 오해가 벌어집니다.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회개하기만 하면, 회개 헌금만 드리면 모두 가볍게 용서받을 수 있을 것처럼 주장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그런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가벼운 은혜에 떨어지는 겁니다. 이런 현상을 교회 밖의 사람들은 우습게 생각합니다. 그들이 우습게 생각할 여지를 우리가 제공했습니다. 우리의 무거운 실존에 해당하는 죄와 용서 문제를 심리적인 카타르시스 수준으로 떨어뜨린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 죄의 기준은 율법이었습니다.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 죄의 결과로 인생이 뒤틀립니다. 가난, 질병도 다 죄의 결과입니다. 하층 인생은 죄인입니다. 그런 가르침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모두 공부 잘하고, 연봉이 높은 직장에 다니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라가서 행복하게 사는 세상이 오면 좋겠지요. 모든 사람이 십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면, 요즘 식으로 세상의 질서인 실정법을 잘 지키면 건강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법을 지킨다는 게 어떤 건지는 일단 접어두고, 법으로 운용되는 사회를 가리켜서 문명사회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좋습니다. 문제는 문명사회에서 통용되는 행복한 삶의 조건을 절대화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조건에 따라서 사람을 판단하고 분리합니다. 앞의 사람들은 의인이고, 뒤의 사람들은 죄인입니다. 앞의 사람들은 행복한 인생을 사는 거고, 뒤의 사람들은 불행한 인생을 사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런 오늘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중풍 병자에게 “당신은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다른 데서는 “귀신아 물러가라.”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또는 “당신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소.”라고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내릴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일련의 말씀은 모두 당시 나름 문명 공동체인 유대 사회가 규정한 죄 개념으로부터 사람을 해방하는 것입니다. 이게 실제로 무슨 뜻일까요?
예수의 죄 용서는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하다고 규정하는 삶의 조건에서도 참된 행복이 가능하다는 선언입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말씀이 가리키는 실제 내용이기도 합니다. 중풍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도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죄인이 아닙니다. 그의 삶에도 이미 하나님 나라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삶을 파괴하는 죄에서 놓여야 합니다. 병에서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고침을 받은 것과 같은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가능성을 율법이 막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곧 행복한 삶이 빛처럼 자기 인생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영혼의 깊이에서 깨닫는 사건이 곧 죄 용서입니다. 그런 사람은 죄로 인한 생명의 위축과 파괴에서 벗어납니다. 아주 궁극적인 해방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거꾸로 세상은 사람을 점점 더 죄의 늪으로 몰아넣습니다. 삶의 깊이와 그 신비를 온몸으로 배우고 경험해야 할 청소년들까지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규범과 조건 안으로 몰아넣고 다그칩니다. 그런 다그침에 묶여서 사는 삶이 곧 죄의 삶입니다.
세상이 다 그런 방식으로 굴러가는데 우리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다르게 살아갈 수 있냐고, 지나치지만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 문제는 여러분 자신이 판단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사람은 상황에 영향을 받기에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세상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힘듭니다. 저도 비슷합니다. 다만 삶의 방향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방향이 또렷해지면 주변 상황에 크게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길을 걸어갈 용기가 생길 겁니다. 우리 삶의 방향이 세월이 갈수록 더 또렷해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세례 요한이 받은 “당신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주목하십시오. 이 질문은 우리에게 똑같이 해당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어디에서 우리의 존재 근거를 확인할 수 있나요? 어디에서, 그리고 누구에게서 생명을, 즉 행복을 경험하는 사람입니까? 요한의 대답은 이 서사의 마지막 구절인 요 1:34절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자”라는 게 세례 요한을 비롯한 우리 기독교인의 정체성입니다. 그 말은 곧 예수가 생명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즉 죄 용서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증언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살이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생각해도 사실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거기에 매달리다가 지쳐버립니다. 단순하게 한 가지 사실에 집중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확보하는 과정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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