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6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i7j7kULdcJg&t=762s
▣ 들어가는 말
-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저 사람, 참~ 믿음이 좋아’ 등의 표현으로 사용하는 ‘믿음이 있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믿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필수적 요소라는 말이겠지요.
제가 다시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믿음이 있으십니까?’ 당혹스러운 질문일까요? 혹은 약간 불쾌감이 드시나요? 혹은 믿음이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고… 이런 생각이 드실까요? ‘나는 믿음이 있어’라는 확신이 드시나요? 혹은 ‘솔직히 나는 믿음이 없는 것 같아’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떤 대답을 생각하고 계시는지 제가 알 수 없지만, 그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가요? 믿는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대체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지, 그 믿음이 우리의 삶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그리고 그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무엇을 보여주는, 드러내는 것일까요? (믿는다는 것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오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가장 기본이면서 동시에 가장 어려운 믿음이 무엇인지에 관해 함께 고민해 보려 합니다.
▣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전 내용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앞선 3장의 마지막 부분에서(3:31~35) 예수의 가족들이 찾아와 예수를 찾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얼핏 굉장히 생뚱맞은 장면입니다. 그리고 전혀 중요한 이야기 같지도 않고, 예수가 가족을 대하는 모습이 다소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일부러 찾아온 가족들에게 그렇게 대했어야 했을까요? 너무 냉정한 것 아닐까요?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4장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한 사전포석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35) 이 말씀은 가족을 대하는 방식이나, 가족보다 오직 교회에 충성해라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장에서 말씀을 듣는 이들, 혹은 독자들에게 복음(예수의 가르침)이 유대 땅을 넘어 선교 지평이 확장되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혈연관계를 넘는 복음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말 그대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4장의 비유들에서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씨뿌리는 비유에서 “30배나 60배나 100배가 되었느니라.”(4:8) 씨앗이 어디에 떨어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열매를 맺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등불 비유에서도 등불은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밝히는 것, ‘빛을 드러내는가?’가 중요합니다. 겨자씨 비유에서도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4:32) 씨앗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라 새들에게 깃들일 그늘을 주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종합해 보자면, 믿음에 있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냐 하는 혈통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문제,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혈통이나, 문화, 나이, 종교 생활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겉모습이나 이름이 아니라 삶의 열매를 통해서 드러난다는 두려운 말씀이지요.
▣ 가자. 세상으로.
- 제자들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3:9) 예수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 너무 많은 이들이 몰려들자 예수는 배를 준비시킵니다. 그리고 “배에 올라앉으시고”(4:1) 이런 구절들을 보면, 4장 전체의 말씀(비유들)은 배 위에서 행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3:13) “열둘을 세우셨으니”(3:14) 여러 제자 중에서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불러 12명의 제자를 구성합니다. 그러면서 그 목적을 밝힙니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하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3:14~15) 이렇게 자신들을 따르는 수많은 이들 중에서 특별히 12명을 선발해서 제자로 삼습니다. ‘전도도 하며’라는 말은 말씀을 전파한다는 의미인데, 4:3에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지요. 결국, 말씀을 전파하는 일(전도)을 ‘씨뿌리는 일’로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4:11)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4:34)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 이것은 선교훈련, 제자훈련의 과정으로 보입니다. 무리 중에서 제자를 선발하고, 그들과 함께하며 권능을 가지게 하고 즉, 교육하고, 그리고 그 가르침의 내용을 전하도록 하려는 것이지요.
- 저편으로 건너가자.
그리고 마침내 제자들에게 명령합니다. “저편으로 건너가자.”(4:35) 4:34에서 비유를 제자들에게 풀어준 후에 “맞은편으로 건너가자” 하신 것이지요.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제자훈련이 끝나고 이제 실제 현장으로 가자는 뜻으로 보입니다.
“그날 저물 때에…” 유대인들에게 저물 때, 해가 진다는 것은 하루가 끝나는 시간입니다. 동시에 새로운 날의 시작이기도 하지요. 재미있지요. 바로 이 순간에 “저물 때”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말이지요. 뭔가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이지요. 시대의 전환이 이루지는 순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저편’은 어디일까요? “바다 건너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5:1) 그곳은 이방의 땅입니다. 결국, 저편은 이방인의 땅. 선교의 장이 유대를 넘어 이방으로 확장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니 ‘건너가자’라는 말씀은 유대를 넘어 이방의 땅으로 ‘말씀을 전하러 가자.’ ‘씨를 뿌리러 가자.’라는 의미가 됩니다. 첫 번째 복음서인 마가에서 이미 복음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 거센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배
오늘 본문 말씀의 지리적 배경은 바다입니다. 바다 위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이 바다는 실제 자연의 바다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삶의 자리, 현장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탄 배는 거대한 바다, 삶의 현장에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 공동체, 제자 공동체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광활히 펼쳐진 거친 바다 위를 항해하고 있는 작은 조각배 하나. 예수의 말씀을 들고 이 거대한 세계에 마주하고 있는 우리의 작고 소박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 예수를 데리고 가다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4:36) 여기서 주의해서 볼 지점은 주도성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예수님이 주체인데, 여기서는 “그들이… 모시고 가매”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 주체가 예수가 아니라 제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현장실습을 하는 것이니, 제자들이 주도하도록 하셨던 것일까요?
‘모시고 가다’는 높임말로 표현되고 있지만, 실은 ‘데리고 가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마가에게 있어서 “앞서가는” 예수의 모습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수는 앞서가시고 제자들은 따르는 것이지요.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10:32)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14:28)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16:7) 등에서 보여주듯 주님은 우리를 앞서가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그분을 뒤에서 따르는 것이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여기서 예수를 데리고 갑니다.
제자가 되어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교회가 예수를 독점하고 이끌고 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치 필요할 때 사용하는 도구처럼 말이지요. 바로 이런 모습을 마가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간판은 걸었으나 실상은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아니라, 예수를 도구로 데리고 다니는 오늘날의 교회를 향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 광풍이 일다.
이 배에 광풍이 일어납니다. 물결이 배 안으로 들어와 배에 가득 찹니다. “큰 광풍”으로 표현된 ‘바람’은 헬라어로 “아네모스”인데, 이 단어는 ‘바람’이라는 뜻 외에도 ‘풍조’라는 뜻이 있습니다. 결국, 폭풍과도 같은 큰 풍조가 일어났다는 것일 테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때에 어려움이 일어났고 위기가 닥쳤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만나게 되지요. 그런데 본문에서 그 어려움의 내용이 큰바람과 물결인데, 그것이 배/교회/믿음 안으로 들어와 배가 가라앉게 생긴 것입니다. 이 세계의 풍조, 세속의 물결이 휩쓸고 들어와 배가 가라앉아버리게 된 것이지요.
- 예수는 어디 있는가?
삶 속에서 어려움과 고통에 처할 때마다 우리는 묻곤 합니다. “대체 신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을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주무시더니…” 맙소사. 정말 하나님은 자는 걸까요? 세상의 일에 외면하며 편히 잠자고 있을까요?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4:38) 너무나 공감 가는 내용이지 않습니까. 너무나 자주 우리는 이런 기도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지 않은가요. 왜 날 이렇게 내버려 두십니까. 왜 세상은 이리도 고통과 고난으로 가득합니까. 원망합니다. 마치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담보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기도를 하면서, 자신에게 그래도 난 아직 믿음이 있다고 위로하듯이. 뻘짓 하지 않고 예수를 찾고 있으니, 믿음이 있는 것일까요?
“선생님이여~”라는 표현으로 마가는 제자들의 잘못된 인식, 믿음 없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선생으로 여기는 한 그들은 아직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잘못 인식하니 온전한 따름이 있을 수 없지요. 마가의 통렬한 비판입니다. 소위 제자라는 자들의 믿음 없음, 믿는 자들의 불신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너무 아픈 지적입니다. 그러다 보니 마태복음에서는 “주여, 구원하소서.”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8:25~26)라고 표현합니다. 제자들의 권위가 중요했던 초대 교회 상황에서 제자들을 너무 심하게 비판하는 것이 주저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선생님’ 대신 ‘주여’로, ‘믿음이 없느냐.’ 대신 ‘믿음이 작은 자’로 물타기를 합니다.
어찌 되었건 예수가 누구인지 잘못 인식하니 온전한 따름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알았다면, 그들은 결코 예수를 데리고 가거나, 선생님으로 이해하거나,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 두려워하거나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믿음이란 무엇인가.
- 바람과 바다를 꾸짖다.
일어나신 예수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하게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질책하지요.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4:40) 따르는 수많은 이들 중에서 선택해서 제자들로 세우고, 그들과 함께 있으며 가르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었는데… 너희는 아직도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느냐는 지적이 아니었을까요?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에서 ‘꾸짖다’ 표현은 헬라어로 “에피티마오”인데, 마가복음에서 9번 사용됩니다. 그런데 대부분 귀신을 쫓아낼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즉, 꾸짖다는 표현은 강한 힘이 약한 힘을 제압할 때 쓰이는 것이지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듯이 ‘거룩한 것만이 더러운 것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추하고 사악한 것을 쫓아낼 수 있는 것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거룩함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대하는 방식이 바로 꾸짖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바람을 꾸짖었다는 표현은 바람이 거룩한 것에 반하는 사악한 존재라는 뜻이지요. 그러니 바람을 꾸짖었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믿음이 없느냐’는 지적은 왜 기적을 믿지 못하는가? 예수에게 초자연적 현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은 추하고 더러운 영, 세상의 풍조, 물질만능주의 세계의 추함과 사악함에 당당히 맞설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우리도 그분처럼 바람을 꾸짖고 바다를 향해 명령할 수 있는 제자로서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세상의 불의에 맞서고 있나요? 우리는 더러운 영에 거룩함으로 저항하고 있나요?
- 예수는 누구인가?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4:41) 그들은 이제야 예수를 깨닫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인식합니다. 그들의 두려움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바람과 물결에 두려움을 느끼던 그들이 이제 예수에게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다릅니다. ‘두려운 두려움’이 아닌, ‘두렵지 않은 두려움’입니다. ‘눈먼 자의 두려움’이 아닌 ‘눈뜬 자의 두려움’입니다. 진정한 두려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두려움입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핵심입니다.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믿음의 첫걸음입니다. 믿음의 전부입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안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물음은 인간에 대한 물음과 같습니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앎은 우리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한 자신으로,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 믿음은 구원의 사건이다.
마가복음에서 ‘믿는다’ 동사는 자주 등장합니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명사는 5곳에 등장합니다. 그 다섯 곳(2장-중풍 병자 고침, 4장-오늘 본문, 5장-혈루증 여인 치유, 10장-맹인 바디매오 고침, 11장-무화과 나무 마르게 한 사건)은 전부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기적은 믿음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마가에게 기적 이야기는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난 사건입니다. 믿음 없이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믿음에서 능력이 생겨나고, 그 능력이 사건을 일으킵니다. 결국, 기적 이야기는 믿음이 일으킨 구원의 사건입니다.
믿음은 예수가 초자연적인 행위를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만 생기면 예수에게로 달려가서 도와달라고 외치는 행위가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와 같은 행위, 귀신을 쫓아내고 바다와 바람을 꾸짖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다와 바람을 잔잔케 하는 것입니다. 불의에 저항해서 불의가 사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추하고 더러운 생각에 맞서 올바르고 건강한 가치관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온전히 인식하고,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며, 거짓된 두려움에 당당히 맞서는 것입니다. 믿음 없음은 예수를 온전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통해서도 예수와 같은 능력이 발휘될 수 있음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가에게 믿음은 예수가 누구인지 앎으로써 나도 그와 같이 될 수 있다는 자기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믿음은 무엇인가?”
이 질문이 언제나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그리고 너는 누구냐? 너의 믿음은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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