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마태공동체
마태는 오늘의 본문 말씀을 예수님이 군중들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진술로 시작합니다. 문장의 형식으로만 본다면 23장1절에서 39절까지 모든 말씀을 예수님이 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예수님이 이렇게 긴 말씀을 한꺼번에 하셨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더구나 본문에는 원래의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모순되는 대목들도 있습니다. 예컨대 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마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행위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지켜야 하지만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공동체이기 때문에 율법과 행위를 구분해서 율법을 지켜야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마태의 진술은 그렇게 정확한 게 아닙니다. 마태는 왜 율법을 지키라고 설명하는 걸까요?
이런 질문에 대답하려면 우리는 우선 마태공동체가 처했던 삶의 자리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들은 그 당시에 유대교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이 기록된 시기는 사도행전과 비슷한 기원후 80년 이후입니다. 그 시기는 그리스도교가 유대교로부터 노골적으로 박해를 받던 때였습니다. 그들이 제기하는 비난의 초점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율법을 무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는 이런 비난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마태는 5:17-20절에서 이를 분명히 했습니다. 거기서 한 구절만 보겠습니다.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0절) 이런 입장이었기 때문에 마태는 오늘 본문에서도 율법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태복음이 유대교와의 좋은 관계를 위해서 그리스도교의 복음과 전혀 다른 것을 주장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본질에서는 원칙을 지켰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매우 유연하게 대처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더구나 그 당시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분파만 있었던 게 아니라 오늘날에도 로마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프로테스탄트로 구분되어 있듯이, 그리고 신학적으로 극좌에서 극우로 나뉘어 있듯이 많은 분파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걸 여기서 감안해야 합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들이 처한 형편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마태복음인 셈입니다.
유대교 스승들을 향한 비판
마태는 율법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던 바울과는 달리 그런 논쟁을 가능한 피했습니다. 그 대신에 그 율법을 가르치는 유대교의 스승들과는 싸웠습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한다면 마태의 주적은 율법이 아니라 율법 선생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인용한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마태는 율법과 그리스도교는 결코 대립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교는 율법을 더 엄격하게 지킴으로써 완성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율법선생들과는 크게 대립했습니다.
마태는 왜 이렇게 율법과 율법선생들을 구별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일까요? 1절 말씀이 이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때에 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는 오늘 본문의 독자를 군중과 제자들로 정했습니다. 특히 군중, 즉 민중을 대상으로 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마태는 유대교의 압박을 피할 수 있는 길을 바로 여기서 보았습니다. 유대교 지도층 인사들과는 같이 갈 수 없었지만, 대신 유대인 민중들에게는 그리스도교가 어필할 수 있다고 보았겠지요. 그렇다면 마태의 전략이 어떠해야 하는지는 이미 답이 나온 겁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절대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에 마태가 율법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율법 선생들은 별로 존경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은 요즘 우리들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라 할 법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그것을 제정한 국회의원들은 존경하지 않는 것과 비슷할지 모르겠군요.
마태 23장은 일관되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위선을 까발리고 있습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지적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만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 차 있다. 이 눈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먼저 잔속을 깨끗이 닦아라. 그래야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25,26절)
오늘 본문도 역시 큰 틀에서 보면 23장 전체가 말하는 이런 비판의 한 대목입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스승으로 자처한다고 말입니다. 매우 적나라하게 표현된 6,7절 말씀을 보세요. “그리고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를 좋아 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 주기를 바란다.”
지금 마태는 그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행태를 묘사하고 있지만, 이것은 곧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승으로 자처하고 있으며, 그렇게 대우받고 싶어 합니다. 원칙적으로만 본다면 스승이 스승으로 대접받는 건 한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만약 학생들이 선생을 선생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저 지식을 팔아먹는 장사치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 학교가 유지되겠습니까? 따라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는 건 한 사회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마태가 지적하다시피 여기서 문제는 스승들이 스승인 체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학자들이 학자연하듯이 말입니다.
이게 왜 문제입니까? 스승이 학문과 삶에서 스승의 역할을 하기보다 제자들에게 대접받는 것에만 마음을 두게 되면 결국 학문과 삶이 파괴되고, 아니면 최소한 그것의 중요성이 상실되고 대신 억압적인 인간관계만 전면으로 부각될 개연성이 높습니다. 3절 이하에서 마태는 그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말만 그럴듯하게 할 뿐이지 자신들의 삶은 전혀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적어 넣은 상자를 품에 안고 지내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삶의 내용이 사라지고, 학문의 치열성이 파괴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학문과 삶이 없으면서 스승 대접만 받으려고만 한다면 그런 공동체는 무너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스승은 없다!
마태는 이 순간에 전혀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시각으로 이 문제를 풀어나갑니다. 그가 비록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율법을 강조하면서 율법 선생들을 비판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매우 정확하게 해명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선언합니다. “너희는 스승 소리를 듣지 말아라.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8절). 놀랍지 않습니까? 모두가 당연하다고, 또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던 스승과 제자의 수직적 관계를 마태는 한 마디로 해체합니다. 아예 스승이라는 소리를 들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스승이 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스승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라고 말입니다.
지난 금요일(12일) 강의 때문에 영남신학대학교에 갔습니다. 강의실에 들어가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흑판에 “목사님, 사랑합니다.”는 큰 글씨가 쓰여 있었고 교탁이 풍선으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스승의 은혜는”으로 시작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 장면이 저에게 흔하지 않아서 좀 어색했습니다. 그런데 그 노래는 왜 그리 긴지 모르겠네요. 노래가 끝나자 한 학생이 꽃을 달아주고, 다른 한생이 대표로 작은 선물을 주더군요. 15일의 ‘스승의 날’ 이벤트를 형편상 미리 한 거라고 합니다. 어떤 학생이 기분이 어떠신지, 신학적으로 말씀해주세요, 하더군요. 제가 무엇이라고 코멘트 했겠습니까? 첫 마디는 “여러분, 스승은 없습니다.”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갔습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스승들은 학생들을 진리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인데, 스승 자신이 그 진리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몇 가지 정보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그런 정보 자체가 학생들에게 진리가 되는 건 아닙니다. 저의 이런 코멘트는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마태가 말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형제관계
그런데 여러분, 마태는 스승이 없다는 정도에서 머무는 게 아니가 훨씬 극단적으로 나갑니다. 그는 세상에서 사람을 보고 아버지로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분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지도자로 자처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분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말씀을 문자의 차원에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도 있고, 지도자들도 있고, 스승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분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마태는 지금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그런 형식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삶을 실제로 살려내고 그 공동체를 생명의 영으로 채울 수 있는 인간관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 본질은 하나님만이 모든 관계의 근본이라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각각 하나님과의 관계를 충실하게 누릴 때만 개인과 공동체에 생명의 힘이 활성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스승들도 스승으로 자처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아버지들도 자녀들 앞에서 아버지로 자처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아버지로 섬겨야 합니다. 자녀들도 역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길 줄 알아야만 그 가정에 생명의 능력이 풍요로워집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만을 스승이며, 아버지이며, 지도자로 섬긴다는 이 말이 여러분에게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겠군요. 예수를 잘 믿으라는 말로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을 가리키지만 그런 신앙은 우리의 삶에서 구체화해야 합니다. 이미 마태가 그것을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8b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그리스도교적 인간관계의 기초는 ‘형제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기본적으로 형제들입니다. 형제관계의 특징은 수직이 아니라 수평입니다. 형제관계는 경쟁이 아니라 협조입니다. 그리고 형제관계는 수동적이지 않고 자발적입니다. 약간 다른 관점에서 형제관계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개개인들의 독립적인 정체성이 보장된다는 것이겠지요. 일반적으로 제자들의 인격적인 독립성은 스승 앞에서 훼손되고, 자녀들의 독립성은 부모 앞에서 훼손되고, 민중의 그것은 지도자 앞에서 훼손됩니다. 그러나 마태가 설명하고 있는 형제관계는 우리 각자의 인격을 살려냅니다. 바로 이런 관계에서는 아무도 다른 사람에 의해서 고유한 인격을 훼손당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태가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개인의 삶과 사회 안에서 구체화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스승과 제자가 근본적으로 형제관계라는 사실을 구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부모와 자녀가 근본적으로 형제라는 사실을 구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사업주와 노동자가 형제라는 사실을 구현할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모든 인간관계가 이런 형제애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현실화할 수 있을까요?
구체적인 방법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찾아나서야 하겠지만, 기본방향은 이미 마태가 설명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대개의 가정과 사회는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가 구별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은 그런 구조에 익숙해있기 때문에 이 말씀의 실현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습니다. 자기 낮춤의 삶만이 이 세상을 억압적 구조에서 평등의 구조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배웠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운명 자체에서 배웠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 낮춤의 세계를 받아들이며 사는 것 말입니다. 이런 영적 경지에 이르면 우리는 더 이상 높아질 필요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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