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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004.12.19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요 18:33-38

빌라도의 질문
예수님이 살아계시던 당시에 그가 누구인가에 대한 소문이 분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눈치 채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사람의 아들)를 누구라고 하는가?”하고 직접 물으실 정도였으니까 말입니다. 외형적인 부분만 생각한다면 예수님보다 훨씬 강력한 대중적인 인기를 세례 요한마저 감옥에 있을 때 제자들을 시켜 “당신은 누구신가? 우리가 기다리는 바로 그분인가?”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질문에 기독교의 운명과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 그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아마 여러분의 마음에는 이미 어떤 대답이 담겨 있을 겁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처럼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대답 말입니다. 이 대답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단지 교리문답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훨씬 많은 신앙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신앙의 깊이에 들어가기 위해서 늘 새롭게 생각하는 태도를 유지해야만 합니다. 이런 신앙의 심화 과정이 곧 요즘 한국교회가 자주 말하는 영성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곧 “예수 당신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오늘도 여전히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오늘 본문에서 로마 고위 정치인이었던 빌라도는 재판 자리에서 피고인 예수님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 당신은 누구냐 하는 질문과 다를 게 없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른 채, 풍문으로 들었든지 아니면 예수를 고발한 사람들에게서 직접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하자 빌라도는 37절에 반복해서 물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용어에 이 재판의 핵심이 있다고 본 것 같습니다. 두 번에 걸친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첫 번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네 말이냐? 아니면 나에 관해서 다른 사람이 들려 준 말을 듣고 하는 말이냐?”(34절) 하고 반문했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37절).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개역성서는 약간 다르게 번역했습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개역성서만으로 본다면 예수님이 빌라도의 질문을 긍정한 것으로 이해되지만 공동번역이 원문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참고적으로 루터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Du sagst es, ich bin ein König.” 루터의 번역은 간접 화법입니다. “내가 왕이라고 당신이 말하고 있소.”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인가 하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신 것으로 보는 게 정확한 번역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서 모호하게 대답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흡사 재판에서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재판 원리에 따라서 예수님이 자칫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화 당할 일을 피하기 위해서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이미 짐작하고 있듯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는 질문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또는 양면성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도 직접적으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는 정치적인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인 의미입니다. 어떤 의미로 말하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로 새길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네가 유대인의 왕인가?” 하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에둘러서, 소극적으로 대답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의 나라
예수님은 영적인 눈높이가 달랐던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유대인의 왕’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설명해보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했습니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인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36절). 예수님은 오직 정치적인 왕만 생각하고 있던 빌라도에게 자신의 왕권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이라는 점을 두 번에 걸쳐서 확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왕이긴 한데 그의 나라는 이 세상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말이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은 이 세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 ‘바실레이아 투 데우’가 이 세상과 이원론적으로 구분된다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무의미합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강조하다가 결국 역사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일종의 초월주의, 또는 순수심령주의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런 신앙은 하늘과 땅을 철저하게 나눔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공허하게 만듭니다. 물론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만 이 말씀은 그것과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약간 신학적인 생각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에서 ‘나라’는 어느 한 공간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물론 성서를 문자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극단적인 근본주의자들은 이 나라를 공간적인 의미로 받아드리겠지만 그 이외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 다스림, 그의 행위로 이해합니다. 오늘 본문과 연결해서 말씀드린다면 이 세상에 결코 속하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이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통치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통치는 인간 중심의 권력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모든 이치가 이런 권력으로 집중됩니다. 제가 여기서 현실 정치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적나라하게 권력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 문화, 교육도 역시 권력화 한다는 점에서 정치와 매한가지인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종교마저도 역시 권력화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나사렛 예수를 따르던 갈릴리 공동체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랑칙령에 의해서 공인을 받은 이후로 점차 로마의 권력에 길들어지지 않았을까요?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을 좀더 솔직하게 들여다본다면 권력적인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대교회 지향주의는 곧 이런 권력화와 맞물려 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의 통치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의 오심이 말구유에서 이루어졌고, 그의 죽음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의 통치가 이 세상의 통치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반증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 세상의 통치 방법과 얼마나 철저하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합니다.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늘 낮은 자리에 앉으라든지,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열 시간 일한 사람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가르침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급기야 ‘원수사랑’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유명한 산상수훈도 역시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과 다른 통치 방식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재림과 심판
예수님 나라의 통치가 이 세상과 다르다는 사실은 위에서 언급한 아기 예수의 말구유나 십자가, 그리고 예수님 공생애에 일어났던 모든 사건과 가르침에서만 확인되는 게 아니다. 훨씬 궁극적인 ‘차이’는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구유와 십자가와 공생애 사건은 이 세상의 권력 지향적 통치를 ‘거부’하지만 부활은 이 세상의 권력 지향적 통치를 ‘무력화’합니다. 바로 이 두 가지, 즉 이 세상의 권력에 대한 거부와 그것의 무력화가 곧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결코 속하지 않았다는 말씀의 핵심입니다.
이 두 가지는 그 성격이 좀 다릅니다. 이 세상의 권력을 거부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성공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당하셨듯이 세상의 강한 힘 앞에서 허물어지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의 권력이 어찌 해볼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생명 사건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승리입니다. 앞의 사건은 우리가 최선을 기울여 이루어가야 할 삶의 태도이지만 뒤의 사건은 하나님의 개입으로만 가능한 사건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역사 안에서 그 권력을 거부하는 몸짓으로 살아가면서, 더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이 개입을 기다린다는 점에서 이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우리 기독교는 대강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2천년 전 예수 사건에, 특히 예수님의 부활에 개입했던 바로 그 하나님이 다시 우리 인간의 역사에 개입한다는 사실을 새기는 절기입니다. 이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의 재림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건 하나님의 전혀 다른 생명의 통치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 세상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은 대충 이해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재림을 통한 전혀 다른 통치가 무엇인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통치는 은폐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 통치가 실행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비밀이며, 종말의 비밀입니다.
유대교 신학자인 마틴 부버가 기독교 신학자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예수 이후의 이 세상이 무언가 달라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상하게 이 세상은 예수 이전이나 이후나 아무런 변화도 없다. 여전히 무죄한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폭력과 증오가 지배하고, 삶의 무의미가 우리를 감싸고 있다. 메시아가 왔다는 증거가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예수를 메시아로 믿으라는 말인가? 부버의 논리는 정당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을 확실하게 하나님의 나라고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메시아를, 그런 ‘유대인의 왕’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유대교 신학자의 질문에 대해서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충분한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어쩌면 그들에게 믿음이 없다거나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대답으로 그들을 설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은폐의 방식으로 이 세계와 역사를 통치하신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를 확장시키고 있으며, 결국 종말에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 생명의 세계를 완성시키십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이 기다리는 종말론적 생명의 세계는 일종의 신비 사건입니다. 사실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님의 재림만이 아니라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도 역시 신비이고, 우리의 현재 생명도 신비라는 점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될 궁극적 생명이 은폐되어 있다는 말은 그렇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이렇게 은폐의 방식으로 생명을 완성시키러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오셨으며, 다시 오신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외형적 삶의 조건을, 그런 복지를 향상시키는 분 정도로 생각한다면 ‘유대인의 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에게는 그런 능력은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궁극적으로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이 완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천년 전 예수님이 오실 때 동방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수소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습니다(마2:2). 이제 마지막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는 예수님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는 질문을 받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우리에게 누구이십니까?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여러분들에게 어떤 왕이기를 희망하고 있습니까? 참된 ‘유대인의 왕’인 예수님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의 생명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오십니다. 이런 대강절의 신앙 안에 있는 여러분, 그 간절한 기다림의 끈을 놓치지 말고 기쁨으로 살아가십시오.

요한복음 18:3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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