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람의 근거
막 7:24~37, 창조절 첫째 주일, 2021년 9월5일
오늘 설교 본문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수로보니게 종족 여자의 귀신 들린 딸을 예수님이 고치셨다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 장애인을 고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복음서에 흔하게 나오니까 이것도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여 지나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밭에 묻힌 값진 보물을(마 13:44) 찾는 심정으로 이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일단 두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두 이야기
첫째 이야기는 예수님이 두로 지방에 갔을 때 벌어졌습니다. 두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북서쪽으로 오십 킬로미터쯤 떨어진 지중해 연안의 마을입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일로 두로에 가셨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두로의 어느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방문 사실을 숨겼지만, 소문이 마을에 퍼졌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혼자가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몰려 다니셨기에 방문 사실을 감추려고 해도 사람들 눈에 들어옵니다. 한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딸이 더러운 귀신에 걸린 여자였습니다. 이 여자는 딸의 병을 낫게 하려고 백방으로 애썼을 겁니다. 아무 효험이 없어서 자포자기의 심정이었겠지요. 이 여자는 예수님 발아래에 엎드려서 딸을 고쳐달라고 호소했습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예수님은 뜻밖의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자녀에게 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욕적으로 들리는 발언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낮춰본다고 하더라도 바로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 예수님은 이방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집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이방인의 집에서 이방인 여자의 요구를 외면한다는 건 어색해 보이긴 합니다. 이 여자의 반응을 보려고 예수님이 과격하게 표현할 것일까요? 어쨌든지 자리를 박차고 나올만한 상황에서 이 여자는 개들도 자녀들이 먹던 음식 부스러기는 먹는다고 대꾸합니다. 우문현답입니다. 예수님은 29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이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보니 딸이 정신을 차렸습니다.
이어지는 둘째 이야기는 예수님이 두로를 떠나 멀리 돌아서 시돈과 데가볼리 지역을 거쳐 갈릴리 호수에 이르렀을 때 벌어진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언어 장애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 사람이 어떤 이유로 언어 장애인이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선천적일 수도 있고, 나중에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매우 특이한 행동을 취했습니다. 이렇게 퍼포먼스를 보이는 일은 드뭅니다. 그 언어 장애인을 거기 모인 사람들과 떨어지게 했습니다.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당신 손에 묻혀 그 사람의 혀에 댄 다음에 하늘을 보고 탄식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에바다” 이 단어는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로 ‘열리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의 장애가 치료되었습니다.
이 두 이야기를 읽고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각각 다를 겁니다. 예수님은 온갖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니까 하나님의 아들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믿음만 좋으면 불치병이나 장애를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이런 이야기는 2천 년 전 의학 지식이 미천했던 고대에만 어울리지 첨단 과학이 발전한 21세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지성적인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유치하게 여기고, 이런 이야기가 들어있는 성경 자체를 무시합니다. 기적으로 읽힐만한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믿거나, 거꾸로 무조건 무시하는 태도는 둘 다 옳지 않습니다. 성경은 신문 보도가 아니고, 과학 연구서도 아니며, 역사책이 아닙니다. 성경 이야기는, 특히 기적적으로 보이는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가리키는 암호이자 상징입니다. 암호와 상징 자체에 매달리지 말고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집중하는 게 성경 읽기에서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37절의 내용이 바로 귀신 쫓기와 장애인 치료라는 암호를 통해서 전달하려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몹시 놀라서 말하였다. “그가 하시는 일은 모두 훌륭하다. 듣지 못하는 사람도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하신다.”
거기 모였던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반응은 바로 이 ‘놀람’입니다. 때로는 ‘두려움’으로도 나옵니다. 복음서 어디를 펼쳐도 이런 표현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세 군데만 보겠습니다. 1) 막 6:1절 이하에는 예수님이 고향을 방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고향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걸 들은 고향 사람들은 놀라워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막 6:2). 2) 막 5:42절에는 예수님이 야이로의 죽었던 딸을 살리셨을 때 보인 사람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3) 막 4:41절에는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에서 광풍을 잔잔하게 하신 사건을 본 제자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그들이 놀라워하고 두려워한 이유는 예수님에게서 발생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경험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어디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롭고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신의 모든 재산과 직업과 가족을 포기하고 예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숲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살아날 희망을 포기하기 직전에 표지판을 발견한 경우와 같습니다. 그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을 때 그는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살아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뀐 겁니다. 절대적이고 놀라운 경험입니다. 그는 표지판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그 표지판이 가리키는 쪽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걸어갑니다. 제자들에게는 그 표지판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들음과 말함
그들이 놀라워한 일은 막 7:37절에 따르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게 되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말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무엇을 듣는다는 사실과 말한다는 사실을 단순히 겉으로 나타나는 생리 물리적 현상만으로 보면 안 됩니다. 겉으로 듣는 일과 말하는 일은 우리 일상에서 매일 홍수처럼 벌어집니다. 글을 읽고 글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 스마트폰이 일반화된 이후로 우리는 너무 많은 소리, 너무 많은 문자를 듣고 읽고 만들면서 삽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들어야 할 말은 듣지 못하고 읽어야 할 문자는 읽지 못합니다. 할 말을 제대로 못 하고, 써야 할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합니다. 홍수가 져서 주변이 온통 물인데도 마실 물이 없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사람은 무슨 말을 듣고 사느냐에 따라서 정체성이 결정됩니다. 잔소리만 들으면 무슨 말을 들어도 잔소리로 듣습니다. 자신도 다른 이에게 잔소리 방식으로 말합니다. 놀음판에서 놀음에 관한 말을 듣고 사는 사람은 인생을 놀음판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또는 가정에서 무슨 말을 주로 듣고 말하면서 사는지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정말 귀가 열려서 진리와 생명의 소리를 들을 줄 알고, 입이 열려서 말할 줄 아는 사람일까요?
저는 늘 고급스러운 말만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평범하지만 필요한 말들도 많습니다. 개인에 따라서 해결해야 할 문제에 얽힌 말들도 있습니다. 희소병에 걸린 자녀를 둔 부모들은 어쩔 수 없이 그것에 관한 말만 귀에 들어옵니다. 어떤 말이 정말 자기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즉 생명의 언어로 들리는지는 다른 사람이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순간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상 언어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말이 귀에 들립니다. 그러면 그는 마치 천사를 만난 듯이 놀라워합니다. 이런 경험이 자주 주어지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말장난에 가까운 수다에 떨어집니다. 우리는 어떤 점에서 언어 장애인이고, 문맹이자 색맹일지 모릅니다.
저는 설교자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여전히 저의 정체성에서 불안을 느낍니다. 설교자로 살려면 제가 먼저 성경에서 놀라운 세계를 경험해야 합니다. 나를 살리는 말들을, 영감을 주는 말들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들을 줄 아는 능력이 없으면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성경 안에 은폐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해바라기 씨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씨는 볼품이 없습니다. 그 씨에서 해바라기가 피어난다는 사실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꽃이 씨앗 안에 은폐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볼 눈을 가진 사람은 씨에서 꽃을 미리 봅니다. 신비로운 경험입니다. 거기서 놀라워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일을 본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까지 설교 내용이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고 생각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가능한 한 소박하지만 착하고 행복하게 살면 충분하다는 겁니다. 저는 일상을 살아내는 일만으로도 벅찬 인생살이에서 여러분의 생각을 공연히 복잡하게 만들거나 피곤하게 만들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가능하다면 착하며 멋지고 행복하게 살아보십시오. 나름으로 인격과 교양을 갈고닦아서 세상일에 크게 흔들리지 않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겁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원하는 삶입니다. 그게 실제로 가능할까요? 최선의 경우는 그냥 체념하고 사는 겁니다. 실제로는 소박하지도 않고 행복하지 않은데도 속으로 인생이 뭐 별것 있나, 무탈하게 소박한 꿈을 이루기만 하면 되지, 하고 자기만족에 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소박하게 산다고 해도 실제로는 걱정이 늘 많습니다. 소소한 일을 두려워하고 놀라워합니다. 말이 많아지고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정말 놀라워해야 할 일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놀라지 않아도 될 일은 너무 크게 다가옵니다. 악순환 가운데서 인생이 흘러갑니다.
이 문제를 단칼에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놀라워할 대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대상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 대상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그게 해결되지 않으면 여러분은 계속해서 놀라워하지 않아도 될 문제에 매달려서, 깜짝 놀라거나 무료하게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놀랄만한 하나님의 일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일을 놀라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 인생의 근본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자신의 운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건 사람들입니다.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서 상대적인 만족감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듯이 듣지 못하던 사람이 듣게 되었고, 말하지 못하던 사람이 말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바울의 말로 바꾸면 다음과 같습니다. 빌 4:12~13절입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은 원래 유대교 전통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에 철저했고, 경건 생활에서도 둘째라면 서러워할 정도였습니다. 요즘으로 바꾸면 최고 학벌에다가 다른 이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얻은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잘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정도면 출세했다고, 성공한 인생이라고 만족스럽게 생각하나 바울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활의 예수를 만나고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천기누설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놀라운 일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바울은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힘으로써 이제는 자기가 사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서 산다고 말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주체적으로’ 살기를 좋아하겠으나 바울은 예수 ‘의존적으로’ 살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우리가 모두 바울처럼 살지는 못해도 그의 경험만은 배워서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모두 위대한 시인이 될 수는 없어도 시적 경험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하듯이, 그리고 우리가 모두 위대한 물리학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물리학이 풀어내는 그 물리의 세계와 그 깊이만은 대략 알아야 하듯이 말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모를까, 예수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알고 느끼고 경험하는 일보다 우리 인생에서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죽음이 멀지 않았기에 제가 ‘시급하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문제를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의 문 앞에 서 있습니다. 어떤 이는 열 걸음 떨어져 있고, 어떤 사람은 백 걸음 떨어져 있을 뿐입니다. 지구 역사나 우주 역사를 보면 그 차이라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정도로 미미합니다. 올해가 2021년입니다. 2000년도가 엊그제 같았습니다. 2000년도에 저는 사십 대 후반이었습니다. 이제 칠십 나이가 다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 순간에 이미 제가 구십 나이에 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사십 대 후반에 계신 여러분도 눈 깜짝할 사이에 제 나이가 될 겁니다. 이십 대나 삼십 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지 못한 채 불안하거나 기고만장한 태도로 인생을 흘려보낼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일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에 놀라십니까? 무엇에 관심이 많습니까? 혹시 20대 대통령 선거에 신경이 많이 쓰입니까? 정치 문제가 중요하기는 하나 여러분의 궁극적인 삶의 차원에서 보면 이번 대선은 코끼리 몸에 달린 털 하나의 무게밖에 되지 않습니다. 바르게 판단하여 선거권을 행사하는 일은 중요하나 정치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일은 부질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슨 일에 놀라십니까? 부동산과 주식으로 밤잠을 자기 어렵습니까? 실제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나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재물 쌓기에 목을 매는 일은 가장 어리석은 삶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슨 일에 놀라십니까? 혹시 그냥 밋밋하게 인생을 보내고 계십니까? 그게 행복한 인생이라고 믿으면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남은 인생에서 이런 사실이 더 분명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말씀을 뻔한 기독교 교리로만 듣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참된 해방과 평화와 안식이 충만해지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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