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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누가 내 이웃입니까? (눅 10 : 25 – 37)

2026년 3월 15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MdWp0eDPU0M?si=XEnblZzfOwVJbY5f

▣ 들어가는 말

-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이란 남부 미나브의 한 초등학교가 폭격당했습니다. 170명이 넘는 어린 여학생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대부분 7~12세 사이의 아이들이었습니다. 잔해 속에서 발견된 책가방과 먼지 속에 묻힌 공책과 연필, 절규하는 부모들의 모습… 말로 다할 수 없는 먹먹함과 참담함으로 말을 잃게 만듭니다. 군사작전이니, 전략적 타격이니, 부수적 피해라는 식의 야만적인 전쟁의 언어, 정치적 언어로 설명하지만, 현실에서는 죄 없는 아이들이 죽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과 죄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것이 어떻게 인간이 이럴 수 있을까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우리가 너무 쉽게 다른 사람을 ‘우리와는 다른 존재’로 낙인찍어 버리기 때문이 아닐까요. “누가 우리 편인가?” “적은 누구인가?” 이 질문이 시작되는 순간, 타인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이룰 도구와 처단해야 할 대상이 되고 맙니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은 십자군 전쟁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제목 “킹덤 오브 헤븐”, “하늘의 왕국”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를 상징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이 신의 도시 예루살렘을 차지하기 위해 기독교 군대와 이슬람 군대가 치열하게 전쟁을 벌입니다. 마치 그곳에 행복과 구원이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오늘 우리의 관점에서 “킹덤 오브 헤븐”은 “하나님의 나라” 혹은 “구원”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오늘의 세계도 수많은 이념, 이데올로기, 종교 등이 자기들만의 “구원”을 주장하며 한 치의 양보 없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결코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지요. 그 영화가 끝나갈 즈음, 예루살렘을 지키던 주인공 발리안은 이슬람의 왕(살라딘)에게 도시를 내어주며 묻습니다. 예루살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냐고. 살라딘은 대답합니다. “Nothing” 그리고 돌아서 가다가 뒤돌아보며 “Everything”이라고 하지요. 아무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대체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혹은 구원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모든 것인가요? 아무것도 아닌 건가요?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 도시를 지키던 발리안은 성안 사람들의 생명과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살라딘의 제안을 기꺼이 수용합니다. 사람들의 생명과 도시를 맞바꾼 거지요. 그렇게 전쟁이 끝이 납니다. 그 영화 속에서 주인공 발리안은 예루살렘 성의 공주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그리고 여기에 있다”라고. 영화는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나 공간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가슴에 있는 것이라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구원은 죽어서 다다르는 곳이 아닌 우리의 정신과 마음, 삶의 태도에 있는 것 아닐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땅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명과 자유인 것이지요.

 

▣ 세계의 질문

- “적은 누구인가?”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언제나 같은 질문을 하지요. “누가 우리 편인가?” “누가 우리 적인가?”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누구를 경계해야 하는가?” 정치, 인종, 종교, 국가 간… 세계는 끊임없이 “우리와 그들”을 구분합니다. 독일의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의 핵심은 “친구와 적(friend–enemy)”을 구분하는 것이라 합니다. 즉 정치적 공동체는 결국 적을 규정하면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국가와 정치의 세계는 결국 이 질문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그들은 누구인가?” “누가 우리 편인가?” “누가 우리의 적인가?”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 사람의 인간성은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적은 더 이상 얼굴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위협, 목표, 좌표가 됩니다. 부끄럽지만, 우리 역시 늘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까이할 사람과 멀리할 사람, 적당히 거리를 둬야 하는 관계, 미워하고 혐오하고 욕해도 되는 사람과 칭찬하고 아껴야 하는 사람을 우리는 일상에서 늘 구분하며 살고 있습니다. 세계는, 우리는 오늘도 주위를 둘러보며 같은 질문을 반복합니다. “누가 내 편이지?” “적은 누구지?”

 

- 첫 번째 질문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율법 교사”는 종교적 엘리트입니다. 본문은 한 율법 교사의 질문으로 시작하지요. 그는 단순히 한 사람의 신앙인이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 율법 해석 권위를 가진 지식 엘리트, 공동체 윤리의 기준을 제시하는 종교 지도층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10:25). 이 질문은 단순한 구원 문제라기보다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가?”하는 신학적 논쟁의 성격을 가집니다. 본문의 “얻으리이까?”는 헬라어 ‘클레로노메소(κληρονομήσω)’인데, 이것은 ‘얻는다’라는 의미보다 ‘상속받는다’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또 “하여야”는 ‘포이에사스(ποιήσας)’는 “어떤 율법을 실천해야 하는가?”의 물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 교사는 영생과 구원은 ‘민족 경계’와 ‘율법 실천’ 두 요소가 결합해야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영생)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충분한가, 아니면 특정한 삶의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가?”의 질문이지요. 구원은 소속인가? 삶의 방식인가? 신학적 긴장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예수는 다시 율법으로 되돌려 묻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 “ 너는 어떻게 읽느냐?” 굉장히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기록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어떻게 해석하느냐도 그만큼 중요하지요. 그리고 결국,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성경의 핵심 계명임을 서로 확인합니다. 즉 1차 논쟁의 결론이지요. 구원(영생)은 혈통이나 율법 지식이 아니라 관계적 삶의 실천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핵심은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 두 번째 질문

두 번째 논쟁이 시작됩니다. 율법 교사가 예수께 묻습니다. “선생님, 누가 내 이웃입니까?”(눅 10:29). 이 질문은 단순한 윤리적 질문이 아닙니다. 경계를 설정하려는 질문이지요. 이 질문은 사실 이런 뜻입니다. “어디까지 사랑해야 합니까?” “누구까지 포함해야 합니까?” 사랑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제한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이 질문은 결국 “누가 우리 편이고, 적은 누구인가?”로 귀결됩니다. 이 세계의 질서, 이 세계의 질문이지요.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답 대신 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입니다.

 

▣ 예수의 질문

- 사마리아인 : 왜 이 이야기는 충격적인가?

예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이 비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은 익숙하게 들립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착한 사람 이야기 정도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은 단순히 다른 지역 사람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은 종교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가장 멀리 있는 집단이지요.

이 갈등의 역사는 매우 오래됩니다. 기원전 8세기, 북이스라엘 왕국이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합니다. 그때 아시리아는 혼합 정책으로 여러 민족을 이 지역에 이주시키지요. 그 결과 이 지역에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다른 민족들이 섞여 살게 되었고 종교 역시 혼합되기 시작합니다. 남쪽 유다 지역의 유대인들은 이들을 점점 “순수한 이스라엘이 아니다”라고 보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갈등은 더 깊어집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 성전을 세웠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유일한 성전이라고 주장하지요. 결국 두 공동체는 서로를 정통 신앙이 아니라 이단으로 여기며 증오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유대 문헌에는 이런 말까지 등장합니다. “사마리아인은 돼지고기와 같다.” 즉, 종교적으로 부정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가지도 않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갈 때도 사람들은 일부러 길을 돌아 요단강 동쪽으로 우회하기도 했습니다. 그 정도로 사마리아인은 적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 예루살렘 : 여리고

이 비유의 배경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입니다. 두 도시 사이의 거리는 25~30km 정도로 그리 멀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해발 약 750m, 여리고는 해수면보다 낮은 약 –250m에 위치에 있어,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1,000m 이상 내려가야 하는 급격한 하강길입니다. 또한 이 길은 바위와 협곡이 많은 매우 위험한 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고대 문헌에서 “피의 길”(Way of Blood)이라 불릴 정도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종교 중심도시이고, 여리고는 농업과 상업 중심도시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라는 표현은 듣는 이에게,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거룩한 곳을 떠나 위험하고 세속적인 세계로 가는 길이라는 뉘앙스를 줍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거룩한 성전인가?” 아니면 “상처 입고 버림받은 사람의 곁인가?”라는 신학적 주제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질문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의 신학적 중심입니다.

 

- 나는 누구의 이웃이었는가?

이제 다시 예수님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됩니다. 먼저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다음으로 레위인이 지나갑니다. 청중들은 아마 이렇게 기대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평범한 유대인이 등장하겠구나.’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을 등장시킵니다. 사마리아인입니다. 이 순간 청중의 마음에는 아마 이런 반응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 “왜 하필 … 사마리아인이?”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보고, 불쌍히 여겨, 싸매고, 돌보아 주니라” 멈추고, 다가가고, 상처를 싸매고, 짐승에 태우고, 여관에 맡기고, 비용까지 부담하지요.

이야기의 중심인물은 경건한 종교인이 아니라 적대 집단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은 단순한 윤리 질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율법 교사는 끝내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 이야기는 이웃의 범위를 넓히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경계 자체를 무너뜨리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묻습니다. 누가 우리 편인가, 누가 남의 편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묻습니다. “누가 이웃이 되었느냐.” 이 질문은 사람을 분류하는 질문이 아니라 “누구의 이웃이 되어 살아왔느냐?” “너는 누구의 이웃이었더냐?” 삶의 태도를 묻는 물음입니다. 청중의 사고를 역전시키고 토대를 흔드는 말이지요.

 

▣ 나가는 말

- 타자의 얼굴을 만나는 순간

제가 종종 인용하는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윤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윤리는 “타자의 얼굴을 만나는 순간” 시작된다고 말이지요. 타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 사람은 숫자가 아니라, 적이 아니라, 하나의 고유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습니다. 전쟁이 가능해지는 이유는 사람이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도 위의 점이 되고 레이더의 좌표가 되고 통계가 됩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좌표를 본 것이 아니라 얼굴을 본 사람입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윤리는 법보다 먼저 오고 정치보다 먼저 옵니다. 무엇보다 먼저 오는 것은 책임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와 놀랍도록 닮아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먼저 묻지 않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어느 민족입니까. 어느 종교입니까. 그는 단지 상처 입은 사람의 얼굴을 봅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멈춰 섭니다.

 

- 이 세계의 질문 : 복음의 질문

오늘 세계는 계속 묻습니다. 누가 적인가? 누가 제거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복음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 세상은 경계를 세우지만 복음은 경계를 넘습니다. 세상은 적을 만들지만, 복음은 이웃을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평화는 적을 인간으로 보는 것, 경계를 넘어가는 것,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이웃이 되는 삶입니다. 전쟁의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적을 규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이 되는 사람입니다.

 

- 왜 이웃을 묻는가?

이 본문은 율법 교사와 예수의 신학 논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율법 교사의 첫 질문에서 두 사람은 성서의 핵심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데에 동의합니다. 이후 율법 교사는 이웃이 누구인지 묻지요. 그런데 순서상, 그는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지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구조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메시지는 이렇게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이웃의 범위를 묻지 않게 된다.” 즉, 이웃을 제한하려는 질문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 이해가 아직 경계 중심에 머물러 있다는 징후이지요.

다시 말해서, 율법 교사의 신학에서 하나님은 언약 공동체 안에 계신 하나님이고, 사랑은 공동체 내부 윤리입니다. 우리만의 하나님, 우리끼리의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반면 예수의 비유가 보여 주는 하나님 이해는 ‘상처 입은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분’이며, 사랑은 ‘경계를 넘어 생명을 살리는 행동’입니다. 즉, 예수에게 하나님은 고통받는 인간에게 다가가시는 하나님이며, 대가 없는 사랑, 자비가 하나님의 뜻이며, 경계를 허물고 모두에게 이웃이 되는 분이지요.

예수님은 명령합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율법 교사의 질문에 대한 최종 답입니다. 율법이나 신앙은 거룩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기 위함이 아닙니다. 상처 입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존재합니다.

 

 

주님,

여전히 ‘나와 너’를 구분 짓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소서.

입술에만 머문 사랑, 내 가족, 내 교회, 내 민족,

내 신앙에만 머물러 있는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우리의 마음과 눈을 열어,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보게 하시고

이웃이 되어 주는 삶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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