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8:18-9:1, 창조절 셋째 주일, 2016년 9월18일
18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19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하시니 20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21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22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9장1절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기원전 7세기 초부터 6세기 말입니다. 예레미야의 조국 유대가 매우 위태로운 시절이었습니다. 유대는 당시 바벨론으로부터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침략을 받았습니다. 한번은 기원전 597년입니다. 유대는 무조건 항복하는 조건으로 멸망만은 면했습니다. 대신 바벨론이 원하는 조건을 들어주어야만했습니다.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볼모로 잡혀갔고, 값진 궁정 집기들도 내주어야만 했습니다. 그 뒤로 반복해서 조공도 바쳤을 테지요. 유대는 이집트의 힘을 빌려 바벨론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결국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되었습니다. 왕궁은 물론이고 제사를 드리는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졌습니다. 다윗으로부터 시작된 유대 왕조도 끝났습니다. 이씨조선 왕조가 1910년 한일합병조약에 의해서 끝장난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한 중심에서 살았던 예레미야는 그 어떤 선지자보다 보다 훨씬 더 격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가 남긴 글을 읽을 때 뭔가 마음이 뜨거워지기는 하지만 우리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로 느낍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예레미야와 우리 사이에 놓인 시간적인 차이입니다. 5백 년 전 사람이라고 해도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데, 예레미야는 2천5백 년 전 사람이니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하면 시간의 차이도 별 것 아닙니다. 인류 조상인 호모에렉투스가 출현한 3백만 년 전을 생각하면 2천5백년은 거의 같은 시간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레미야의 생각을 우리가 얼마나 가깝게 따라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같은 시대에 살면서도 훨씬 더 멀게 느껴지는 사람이 많다는 걸 여러분들은 경험할 겁니다. 다른 하나는 예레미야가 처한 상황과 우리의 상황 사이에 놓인 차이입니다. 예레미야는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처한 조국에 대한 염려로 늘 가슴이 저렸습니다.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북분단이라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긴 하지만 예레미야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주로 개인의 일상에 대한 염려로 시간을 보냅니다. 우리 입장에서 예레미야 같은 사람은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을 때 귀한 말씀이기는 하지만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낍니다. 우리 모두가 예레미야처럼 영성의 대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일상보다는 조국에 대한 걱정으로 밤을 지새울 수는 없습니다. 각각의 분수에 맞게 자신과 가족, 그리고 나라와 사회 공동체를 위해서 살면 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 하더라 하더라도 하나님 신앙만은 정확하게 붙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예레미야나 우리 같은 평범한 기독교인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글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사회적 안목이나 정치적 판단을 배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 신앙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비록 우리와 전혀 다른 상황에서 기록된 말씀이지만 예레미야의 글은 오늘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족할 게 없습니다.
하나님 부재
예레미야는 오늘 설교 본문 18절에서 자기의 영적 소회를 이렇게 토로합니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이 짧은 문장에서 우리는 예레미야의 심정이 어땠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슬프고, 근심에 차 있고, 위로가 필요하고, 마음에 병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예레미야의 심정과 비슷한 것을 경험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태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손실을 당했거나, 가족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거나, 큰 질병에 걸렸을 때 이런 심정이 됩니다.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일을 당할 수도 있고, 자신이 잘못을 저질러서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것이 다 우리의 뜻대로만 진행되지 않습니다. 언제 어느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실제로 큰 재난을 당하는 경우만이 아니라 다 평안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슬픔과 근심과 마음의 병을 경험합니다. 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아무리 행복한 일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행복에 겨워 고함치고 싶다 하더라도 슬픔과 허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죽어야 할 인간의 실존이라는 게 원래 그렇습니다. 마치 칠흑같이 어둔 밤에 낭떠러지가 앞에 놓인 길을 차를 몰고 가는 거와 같습니다. 인간의 이런 실존이 바로 하나님 부재입니다. 절대자의 외면입니다. 영적인 고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대 민족의 영적 실존을 19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야훼께서 시온에 안 계시는가? 왕 노릇 그만 하시려고 물러나셨는가? 이렇듯이 내 딸, 내 백성이 신음하는 소리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려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직도 우상을 섬기며 내 속을 썩여 주느냐? 어찌하여 남의 나라 허수아비를 들여다가 섬기며 내 속을 썩여 주느냐?
예레미야는 19절에서 유대 예루살렘 주민들의 주장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대비시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여호와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으시며 왕으로서 통치하지 않는 거 같다고 신음합니다. ‘하나님 부재’로 인한 절망입니다. 당시 유대는 주변의 열강들에게 심한 압력을 받고 있었습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말을 들어야 할지, 이집트의 말을 들어야 할지 갈팡질팡했습니다. 말들은 많았지만 유대를 살릴 수 있는 확실한 길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불안해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예레미야는 유대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2천5백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는 이런 하나님 부재 현상을 똑같이 경험합니다.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합니다. 삶의 토대가 흔들립니다. 지난 9월13일 화요일 밤에 경주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대한민국 지진관측 이래로 가장 강력한 지진이었다고 합니다. 크게 놀란 분들도 있고, 그러려니 하고 지난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저는 후자에 속합니다. 지진은 지구가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즉 지구 차원에서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현상이니까 우리가 무조건 배척할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지 지진이 일어나면 무엇을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방향이 잡히지 않습니다. 몇 가지 요령은 있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지진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토대를 흔드는 일들은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돈, 건강, 가족이나 인간관계 등등인가요?
돈, 건강, 가족 등등이 소중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삶의 근본 토대는 아닙니다. 돈이 없을 때는 돈이 절대적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걸 삶의 토대로 여깁니다. 돈이 넉넉해지면 돈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넉넉한 돈으로 내면의 삶이 풍요로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인해서 오히려 삶이 더 꼬이거나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건강도 그렇습니다. 병에 걸리거나 허약한 사람들에게는 건강이 절대적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건강한 사람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건강하기 때문에 오히려 삶이 더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돈과 건강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거나 돈과 건강을 찾는 게 잘못된 거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이런 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에 과도할 정도로 집착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다만 돈과 건강이 확보되지 않으면 삶이 피곤해지니까 돈도 벌고 건강을 챙기려고 합니다. 그런 방식의 삶을 아무도 비판할 수 없습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대충 좋은 게 좋다는 방식으로 살다가는 결국 삶의 중심을 놓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구도 수행의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게 삶 앞에서 단독자로 서는 것입니다. 돈을 거절하고, 몸을 고행에 이르기 까지 절제합니다. 그들은 돈과 건강을 비롯한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는 상황인 무덤 안에 들어가 있는 순간을 현재의 삶에서 경험하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전문 구도자처럼 살지는 못하지만 삶의 방향만은 그들의 것과 같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조건 추종하는 대상으로는 삶의 토대가 흔들리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제 삶의 궁극적인 토대가 무엇인지 감이 잡혔을 겁니다. 삶의 토대는 하나님입니다. 삶의 토대가 흔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재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 그대로 무소부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를 경험하지 못할 수는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여기에 예외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의 상황이 더 심각한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야 그럴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달라야 하니까 말입니다. 지난 주일의 설교 본문에 나오는 잃은 양을 찾아 나선 양치기와 잃은 드라크마를 찾으러 등불을 손에 들고 집안을 샅샅이 뒤진 여자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부재를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주민들의 부르짖음을 ‘하나님 부재’로 규정한 다음에 이제 하나님의 입장을 이렇게 전합니다. “어찌하여 아직도 우상을 섬기며 내 속을 썩여 주느냐? 어찌하여 남의 나라 허수아비를 들여다가 섬기며 내 속을 썩여 주느냐?” 예레미야가 볼 때 예루살렘 백성들은 하나님의 속을 썩였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로 인해서 부르짖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큰 나라의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을 겁니다. 하나님은 손에 잡히지 않지만 우상은 일단 보기에도 그럴 듯해 보입니다. 이게 유대 백성들의 운명을 파탄에 떨어지게 한 악순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니까 우상을 따르게 되고, 우상을 따르게 되니까 하나님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건 곧 그들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의사의 치료 행위로 비교해서 설명했습니다. 22절입니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유대 백성들은 위로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안식과 평화가 없었습니다. 참된 만족을 몰랐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으니 늘 불안한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 지배를 받을 때와 비슷합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 자체가 결정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어렵다고 하더라도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가족이 서로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거와 같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그런 위로를 얻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거짓 위로에 속았을 겁니다. 하나님이 곧 우리를 바벨론의 억압에서 풀어주실 것이라고, 요즘 말로 부자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말은 듣기에 솔깃합니다. 위로받을만합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라서 잠시 위로를 주는 것 같다가 곧 크게 실망하게 합니다.
예레미야의 눈물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구원에서도 멀어지고 치료도 안 되는 조국 유대와 그 백성들이 처한 상황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렘 9:1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을 테니 들어보십시오.
내 머리가 우물이라면, 내 눈이 눈물의 샘이라면, 밤낮으로 울 수 있으련만, 내 딸 내 백성의 죽음을 곡할 수 있으련만
문학적으로 세련된 문장입니다. ‘내 머리가 우물이라면, 내 눈이 눈물의 샘이라면...’이라고 했습니다. 어린 딸을 잃고 장례를 치르는 이웃의 슬픔에 동참하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우리가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예레미야처럼 조국과 백성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지는 못합니다. 나라가 ‘왜 이 모야 이 꼴이야.’ 하면서 비판할 수는 있지만 영혼의 눈물을 흘리지는 못합니다. 비판도 연민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 연민이 없이는 그 어떤 비판도 진정성을 의심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연민이 바로 눈물입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은 값싼 동정심이 아닙니다. 그런 동정심은 서로의 삶을 오히려 파괴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조국 유대와 그 백성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 실존의 가장 깊은 차원을 가리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죽어야 한다는 차원입니다. 시편 기자는 곳곳에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바울도 롬 8:22,23절에서 이렇게 피조물의 탄식을 말합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죽어야 할 피조물의 운명인데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동안에 여전히 삶의 토대가 흔들린다는 사실을 볼 때 예레미야는 조국 유대와 예루살렘 주민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예레미야는 유대 왕과 귀족들과 다른 선지자들을 향해서 유대 민족이 나가야 할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옳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과 사람과 나라와 이웃을 대했다는 것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제가 예레미야처럼 영적인 대가는 못되지만 세상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약간이나마 따라가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가장 가깝게는 가족입니다. 아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내를 처음 보았을 때가 1977년 1월이니까 아내 나이가 19살이었습니다. 40년 가까이 흘러서 금년에 아내 나이가 58세입니다. 곧 더 늙어 죽겠지요. 불쌍합니다. 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우들도 불쌍하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런 운명에서 벗어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깊은 자리에는 눈물이 자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눈물만 흘리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이 이미 알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매일 눈물만 흘린 게 아닙니다. 분노할 때는 분노하고, 싸울 때는 싸우고, 즐거워할 때는 즐거워했습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은 하나님을 찾으라는 강력한 요구입니다. 더 이상 우상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맡기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레미야의 눈물은 인류 구원을 위한 거룩한 사건입니다. 그의 눈물은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에게서(눅 19:41)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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